#65
쩐 티 한.
베트남의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5년 전에 한국으로 시집을 왔고, 그 곳에서 윤진미라는 이름을 얻었다.
처음에는 국제결혼이라는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고, 안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진미 씨는 그런 일을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 조금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아껴 주는 남편을 만났고, 꽤 괴팍하고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지만 큰 사고는 절대로 안 치는 시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 생활은 결실을 맺어 아이까지 생겼다. 아이 이름은 윤철, 그러니까 송윤철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이후에도 근처 식당에서 계속 일을 했다. 하지만 임신한 지 5개월이 지났을 때,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쉬라고 이야기했다.
“내 직업 알잖아. 여름에는 할 일이 많거든.”
남편의 직업은 건설 기술자였다. 인테리어와 목수도 겸업했다. 겨울에는 공사가 별로 없었다. 물이 얼어버리기 때문에 시멘트 시공을 하는 데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매일 힘들게 퇴근한 남편과 과자를 먹으며 야구를 보는 일. 야구는 진미 씨의 유일한 취미였다. 한국에 왔을 때, 수줍게 웃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잠실의 야구장에 갔던 일이 기억났다. 첫 번째 데이트였다.
야구는 하나도 몰랐지만, 공을 쳐서 담장을 넘기면 잘하는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모자에 L자가 그려진 팀이 남편이 응원하는 팀이라는 것도 눈치로 알았다. 그래서, 모자에 L자가 그려진 선수가 담장 너머로 공을 쳤을 때, 그녀는 한껏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남편은 그 모습을 보고 진미 씨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파울을 보고 안타라고 좋아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남편이 쑥스러워하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 기억이었지만, 그 기억 덕분에 진미 씨는 야구를 좋아하게 됐다. 자신이 응원하던 팀의 이름이 LG 트윈스라는 것도 알았다.
“…윤철이도 쌍둥이면 좋았을 텐데.”
“왜요? 아이, 많이 갖고 싶어요?”
“난 두 명이면 좋을 것 같은데. 두 번 고생시키긴 그렇잖아. 출산일이 이제 두 달 남았나?”
“맞아요. 똑똑해.”
그렇게 말하며,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미 씨는 야구가 방영 중인 TV로 시선을 돌렸다. 스코어는 0대 2. 투아웃 2사 만루. 마치 스포츠 영화에나 나올법한 긴박한 순간, 진미 씨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마지막 타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서고, 반대편의 투수가 더 긴장한 표정으로 공을 쏘아내는 그 순간, 진미 씨는 아랫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 어, 어…?”
그대로 푹,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진미야? 진미야!”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재빨리 달려와 아내의 머리를 받쳤다. 그 모습을 끝으로, 진미씨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 남편의 외침과 어렴풋이 들리는 엠뷸런스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했다.
‘아직 안 돼, 너무 빨라. 너무 빨라.’
기나긴 산통의 기억은 나지도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진미 씨는 남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이 두 개였다.
하나는 지금 남편이고, 하나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편이었다. 그러니까….
“애미야, 정신이 드냐? 어? 정신이 들어?”
며칠 전에 남편이 매몰차게 쫓아냈던 그녀의 시아버지, 송의진이었다.
“…아기는요?”
눈을 뜨자마자, 진미 씨가 물었다. 남편은 고개를 푹 숙였고, 송의진의 눈은 덜덜 떨렸다. 진미 씨는 왠지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말해 주세요. 혹시 아이가 잘 안 됐어요?”
“아니다. 아기는 잘 나왔어. 지금 인큐베이터 안에 있다.”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게 외치며, 진미 씨는 다시 한번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형우와 의재는 산부외과의 바깥에서,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그러게.”
지원에게 진미 씨의 산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형우는 바로 택시를 잡아 송의진을 산부인과로 데려왔다.
“깜짝 놀랐지 뭐야. 그 거북이처럼 느릿하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택시 기사 멱살을 잡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으니.”
“그러게.”
“…너, 아까부터 ‘그러게’밖에 안 한다?”
“그러게.”
형우는 조금 멍한 상태였다. 안에서 산모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두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잃었던 형우에게, 그 광경은 마치 꿈에 그린 것처럼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다 어쩌냐.”
급하게 뛰쳐나온 의재는 자기도 모르게 계획에 필요했던 뚫어뻥이나 그 외 기타 등등을 몽땅 들고 왔다. 그 모습은 병실 관계자라기보단 차라리 광대처럼 보여서, 주변 의사와 간호사들이 지나가면서 계속해서 쿡쿡거렸다.
“…난 말야, 의사랑 간호사는 병원에서 안 웃는 줄 알았어. 매일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곳이잖아.”
“엄청 잘 웃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안에서 문이 열리며 기진맥진한 표정의 송의진이 나왔다.
“…애 아빠는요?”
“애 아빠? 아, 병구 말이냐. 걔는 조금 더 있겠다고 해서.”
“같이 있지 그래요?”
“내가 뭘 잘했다고 거기 있냐. 둘만 있게 놔 둬야지.”
송의진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착잡한 표정으로 병실의 반대쪽을 바라봤다. 방금 태어난 어린 아이 한 명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송의진의 손자인 송윤철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형우가 일단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되신 거 축하해요.”
“괜한 말은. 나는 옛날부터 할아버지였어.”
“…아기는요?”
형우의 질문에, 송의진이 천장에 달린 스탠드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건강하단다…. 미숙아 치고는.”
“아.”
본래 10개월이 되어 나와야 할 아이가 8개월만에 나와 버렸다.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대신 인큐베이터 속에서 몸 여기저기 링거를 꽂고 있는 이유였다.
“의사 말로는 앞으로 병원 생활을 조금 더 해야 할 거란다. 아기도 그렇고, 애 엄마도 그렇고.”
“아….”
형우와 의재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문창과에서 오랜 시간동안 글을 배웠지만,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오히려 당사자인 송의진이 훨씬 담담해 보였다.
“그나저나, 배가 좀 고픈데. 너희들은 뭘 좀 먹었나?”
“저희는 괜찮아요.”
“굶은 건 나 뿐이군.”
“혹시 이거라도 드실래요?”
의재가 가방을 뒤져 오늘 아침에 산 빅맥 라지세트를 꺼냈다.
“햄버거라. 영양 넘치는 식사지.”
“감자튀김도 있어요.”
노인이 형우의 눈앞에서 와구와구, 다 식어빠진 햄버거와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집어먹었다.
계획을 위해 산 건데, 결국 그 모든 계획은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것이 됐다.
“잘 먹었다.”
햄버거 하나를 남김없이 다 비운 노인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인큐베이터를 바라봤다.
“너무 일찍 나왔어. 뭔가 문제가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송의진이 형우의 손목을 꽉 쥐었다. 그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세상 고집스러워 보이던 노인도, 자그마한 생명 앞에서는 이토록 약해지는 건가.
“…아무 문제 없을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그럴 리가 없지.”
그 말을 들은 송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안심시키려 들지 마라. 지금은 현실적이여야 해.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있다.”
“부탁이요?”
“전에 네가 말했잖아. 웹툰 똑바로 그려주면 돈 준다고. 그거, 얼마나 줄 수 있냐?”
“지금 당장은 많이는 못 드려요.”
“그게 얼만데?”
닦달하는 송의진에게, 형우는 품을 뒤져 손때 탄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일단은 이 정도요.”
봉투를 받아든 송의진이 안쪽을 확인했다.
“이건…?”
그 안에 든 것은 꼬깃꼬깃 접힌 27만 8천원이었다.
“진미 씨한테 받았던 거예요.”
며칠 전, 창동의 뒷골목에서 만난 진미 씨는, 형우를 향해 저 봉투를 내밀었다.
“진미 씨가 그러더군요. 선생님의 술집 외상값을 이걸로 갚아달라고요.”
“대체 왜 그런 짓을….”
“자신이 갚아 주면 분명 선생님의 자존심이 다칠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
형우가 돈을 하나하나 꺼내들었다. 돈들은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돈은 더러웠고, 어떤 돈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어딘가에서 인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푼 두푼 직접 번 돈이라는 뜻이었다.
“…선생님이 기껏 번 돈을 죄다 술값으로 쓰고 계실 때, 진미 씨는 선생님을 위해 몰래 돈을 벌고 있었던 거예요. 선생님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뿐이죠.”
형우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든 송의진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술값으로 탕진하지 않았어. 내가 술이나 마시려고 10년 만에 만화를 그린 줄 알아?”
그렇게 말하는 송의진은, 억울하기보다는 조금 씁쓸한 듯한 표정이었다.
“진미가 나랑 아들놈 몰래 일을 하고 있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송의진은 만삭의 며느리가 일을 하는 이유가 곧 태어날 자식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난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척했어. 괜히 말해봐야 뭐 하겠나?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텐데. 그 대신 난 만화를 그렸다. 그걸로 아이 옷을 샀지. 애들 옷이 크기는 작아도 더럽게 비싸더군. 그래도 손자가 입을 거라고 생각하고 좋은 걸로 사려고 했는데….”
이것이 송의진이 10년 만에 펜대를 다시 잡은 이유였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게 사기일 줄이야.”
비싼 명품 아이 옷이라고 산 것이 알고 보니 중국산 짝퉁이라고 했다.
“TV에서 그러더구나. 아이 옷을 잘못 고르면 피부 질환이나 호흡기 질환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말야. 그걸 알자마자 모두 태워 버렸어. 그냥 버리면 혹시 다른 가난한 집 애들이 주워 입을까 봐. 아들 부부에게는 사실대로 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냥, 술 먹는 데에 썼다고 한 거야.”
“그냥 사실대로 말하지 그러셨어요?”
“짐이 되고 싶지가 않았다. 술이나 먹고 다니는 노인네라면 그냥 골칫덩이일 뿐이지만, 뻔한 사기에 당할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라면 분명 걱정하고 말 테니까.”
힘들게 일하는 며느리를 위해서라는 좋은 의도로 출발했으나 끝이 좋지 않았으니, 상심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몰래 일을 했던 이유가, 아이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니.”
시아버지는 아들 부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몰래 만화를 그렸고, 진미 씨는 시아버지를 위해서 몰래 돈을 모았다. 하지만 서로를 너무나도 배려했던 탓에, 그 마음이 엇갈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엇갈림도 딱 오늘까지인 듯하다.
“27만 8천 원이라….”
송의진은 손 위에 놓인 봉투를 멍하니 바라봤다.
뭔가를 다시 시작하는 대가로서는, 차고 넘치는 금액이었다.
* * *
병원에서 나온 형우 일행이 도착한 곳은 창동에 위치한 송의진의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은 오랜만이군.”
노인이 말하는 ‘오랜만’은 과연 젊은이들의 것과는 단어 자체의 깊이가 달랐다. 형우의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단위는 cm인가?’
얼마나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1cm도 넘게 쌓여 있었다. 죄다 뭉쳐 있는 탓에 오히려 폴폴 날리지 않아 기침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지난 웹툰은 노인정에서 그렸다고 했죠?”
“작업실을 치울 엄두가 안 났거든.”
“노인정에도 펜 같은 게 있어요?”
“당연히 없다. 모나미 볼펜으로 그렸지.”
“채색은요?”
“피씨방에서 했다. 꼬마야, 네 표정을 보니 이 사람을 믿어도 되나? 싶은 표정이로구나.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봐라.”
당당한 표정으로, 송의진이 자신의 작업실 책상에 앉은 먼지를 덜어냈다.
“고작 볼펜으로 그렸을 때에도, 나는 만화라고 불릴 만 한걸 완성했다.”
먼지를 닦아낸 작업실에서 형우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두 가지였다.
온갖 종류의 만화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
그리고 세상의 온갖 펜들을 몽땅 모아둔 것처럼 보이는 필통이었다.
“그런 내가, 제대로 된 펜을 잡고 진심으로 만화를 그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걸어간 송의진은 호기로운 표정으로, 펜 한 자루를 쓱 집었다.
“이 묵직하고 서늘한 감각… 오랜만이군. 기나긴 휴업의 시간은 끝났다. 다시 만신漫神 송의진으로 돌아갈 때다.”
“만신….”
그제까지 조용히 있던 의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완전 멋있어.”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가족을 위해 과거를 떨쳐내고 일어난 노익장이라. 낭만적이지 않니, 형우야?”
“농담이지?”
농담이 아니었다.
의재는 정말 엄청 감동적인 것을 본 듯이 두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이가 없어진 형우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만신은 좀 아니지 않아?”
“네가 낭만을 모르는 거다. 낭만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목표와 신념에 이름을 붙이는 것부터가 시작이야.”
형우에게 있어서, 의재가 하는 저런 말들은 사실상 생물학적인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듣고 있자니 손발이 사라질 것 같았다는 뜻이다.
“그런 게 낭만이면 난 그냥 평생 낭만 모를래.”
저명한 철학자였던 니체는 ‘독존의 쾌락’이라는 개념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외로움과 즐거움은 공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후, 형우는 내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그리고 오늘, 형우는 드디어 그 오랜 철학적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었다. 송의진과 의재 덕분이었다.
“…스승님, 펜은 어떻게 고릅니까?”
“펜이 너를 고르는 것이다.”
“아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대화에 동참하지 않고 외롭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즐겁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