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65화 (65/200)

#64

진미 씨와 헤어진 후, 형우와 의재는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다. 둘이 없는 사이 송의진은 혼자서 술을 두 병이나 더 시켜 마시고 있었다.

“거, 젊은 애들이 뭘 그리 속닥거리다 왔나?”

“진미 씨 만나고 왔어요.”

“진미? 걔는 왜?”

“…아버님께 술 많이 드리지 말라고 하던데요. 몸에 당이 많으시다고.”

“나 참, 걔는 내가 술만 먹으면 아주 눈을 치켜뜬단 말야. 무섭게.”

송의진이 투덜거렸다. 사람이 늙으면 다시 애처럼 변한다더니, 마치 어린애가 투정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죠. 이야기도 들었으니까.”

“벌써? 이제 시작인데?”

“더 마시면 술값 안 내드릴 겁니다.”

“…쳇.”

툴툴거리면서도 송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우와 의재는 그런 노인을 따라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나 왔다!”

초인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송의진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버지 오셨소?”

안에서 예의 중년 남자의 얼굴이 쓱 나왔다. 송의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냐, 비켜라, 들어가게.”

하지만 아들은 비켜주지 않았다.

“…그 전에. 아버지 최근에 일 받아서 돈 좀 벌었다면서요? 그거 어디 있어요?”

“그걸 네가 왜 찾냐?”

“…또 술 먹는 데 다 썼죠?”

“아니야, 이 자식아! 날 뭘로 보고!”

송의진이 방방 뛰었다. 하지만 아들은 이런 일을 당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 눈을 샐쭉하게 찢었다.

“그러면 어디 있는데요? 나 좀 보여 주쇼.”

“…이미 다 썼다!”

“술 먹는데 쓴 것 맞군. 조금이라되 기대를 한 내가 바보지.”

“헛소리 말고 비키기나 해!”

“싫어요.”

아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송의진이 당황해서 딸꾹, 숨을 내뱉었다.

“싫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진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소! 방금 전 누가 왔다 갔는지 알아요? 옆마을 술집 사장이 와서 외상값 내놓으라고 하덥니다.”

“거참, 그 양반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대?”

“이젠 진짜 나도 모르겠소. 매일 술만 먹고, 일은 안 하고 드러누워서 잔소리만 하는 거, 더 이상 못 봐주겠단 말이요. 집에 진미도 있는데!”

“이 자식이, 아버지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 아버지지! 해준 게 뭐 있소? 지금까지는 진미 보고 참았는데, 이제는 아니오. 썩 나가!”

그렇게 외치며, 남자는 문을 꽝 닫았다.

“아들아! 아들아! 아무리 그래도 이리 나를 내치면 어쩌냐? 군사부일체도 모르냐, 이놈아!”

“난 못 배운 놈이라 선생도 없고, 대통령 선거날도 일하러 가서 왕도 없는 몸이야!”

“아들아, 나보고 어딜 가라고!”

송의진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꽥꽥 질렀지만,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10분 후.

“거참… 진짜 안 열어주네.”

송의진이 손을 탁탁 털었다. 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세상 무너질 듯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의 표정은 조금 아쉽다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 연기였다는 거다.

“이봐, 자네 김형우라고 했지? <전설의 보안관> 작가?”

갑자기 홱, 하고 송의진이 형우에게로 눈을 돌렸다. 형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 초면에 미안한 말인데….”

그렇게 말은 하지만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자네 집에 방 좀 남나? 내 며칠만 묵음세.”

“…뭐라고요?”

“괜찮아, 괜찮아. 뜨거운 물 안 나와도 이불 하나만 있으면 잠은 잘 잔다네. 그러면 가 볼까?”

하면서, 앞장서서 걷기까지 했다.

“뭐야 이게.”

세상에 이렇게 뻔뻔할 데가.

* * *

“딱 일주일이에요.”

“그래 뭐, 그 정도 지나면 그 도깨비 같은 놈도 화가 좀 풀리겠지. 그나저나 작가 양반, 방이 꽤 좋으시구려.”

결국 형우는 방이 없냐고 물어보는 송의진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형우가 엄청 착해서가 아니라, 송의진이 지금 형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그랬다.

“집 빌려 드리면 만화 그려 주시는 거죠?”

“그린다고는 안 했는데,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그나저나 배가 좀 고픈데. 근처 맛있는 짜장면집 없나?”

“짜장면 시켜 드리면 만화 그려 주나요?”

“생각해 보지.”

송의진도 그걸 알고 있는지, 조금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약간 짜증 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일단 참을 인자 하나를 새기는 것으로 멈췄다.

‘참자, 참아.’

어떻게든 웹툰을 그리게 만들 수만 있다면, 방을 빌려 주는 거나 짜장면 한 그릇 사주는 것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1주일 안에 송의진의 번아웃을 무찌르고, 작업 욕구를 살려내야 해.’

그것이 형우의 목표였다.

* * *

“작가 양반, 작업 끝났소?”

“…아직이요.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무슨, 그렇게 말해도 만화는 안 그릴 거야. 그냥 할아버지라고 해.”

첫 번째 전략은 의재가 고안했던 ‘먹방을 보다 보면 배고파진다.’ 작전이었다.

‘옆에 사람이 열심히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잃었던 작업의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라, 지난 삼일 내내 형우는 항상 송의진이 보는 곳에서 노트북을 켜고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송의진은 형우를 향해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하암.”

질리지도 않는지, 방에서 매일 빈둥거리며 하품이나 찍찍했다.

“…술은 안 되냐?”

“절대로 안 돼요.”

집에 오기 전, 형우와 송의진은 일주일 동안 결코 술을 입에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송의진이 나이에 맞지 않게 입술을 빼쭉, 내밀었지만 쫓겨나면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알긴 아는지 약속은 그럭저럭 지켜졌다.

문제는, 그 약속만 지켰다는 거였다. 그 외의 것들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안 했다. 방에 드러누워서 멍하니 생각하다가,

“훠이.”

“뺘아아악!”

“옳지, 잘한다. 어어어, 내 손가락은 먹지 말고.”

간식을 갖고 가끔 참치랑 놀아 주고, 그러다가 산책을 한다며 나가서 세 시간쯤 하느작거리다 오는 게 전부였다.

“…안 지루하세요? 좀 즐거운 일을 하시는 건 어때요?”

“내 사전에선 둘이 같은 거야.”

“…더 좋은 사전을 사시는 건 어때요?”

“흐흐, 낡은 사전에 뭘 더 바라는 건 사치지.”

물론, 그 시간 동안 형우도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근처 만화방에서 요즘 만화책을 잔뜩 빌려오기도 했다. 두 번째 전략인 ‘명작을 보면 작업욕구가 되살아난다.’전략이었다.

주변 서점을 죄다 뒤져 <아연의 연금술사>나, <드라군 볼>같은 명작 일본 만화부터, <상일동 클래스> 같은 요즘 웹툰 원작 만화까지 전부 다 집안에 그득그득 쌓아 놨다.

송의진은 그 중 몇 개에 손을 뻗었다.

“흐음, 역시 한국 만화가 좋구만.”

송의진이 그 말을 했을 때, 형우는 기뻐하기보다는 울기 직전의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만화책은 쬐끄만해서 영 불편하단 말이지.”

그러니까, 저건 만화의 내용이 좋다는 게 아니라 베고 자기에 좋다는 거였다. 기껏 빌려온 만화들은 명작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죄다 겹겹이 쌓여서 송의진의 머리 아래에 놓였다.

그다음엔, 유치하지만 말을 번복하고 협박을 했다.

“당장 웹툰 안 그려 주면, 쫓아낼 거예요!”

형우의 협박을 들은 송의진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한번 찼다.

“…쩝. 그러면 어딜 가야 하지?”

반응은 그걸로 끝이었다. 쫓겨나는 게 싫어서라도 만화를 그리는 시늉이라도 해 줄 줄 알았는데, 그냥 주섬주섬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혹시 말로만 그러는 줄 착각하는 건가 싶어서 진짜 쫓아내기도 했다. 쫓겨난 송의진은 그냥 밤늦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문 앞에 앉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눴다.

“거, 내가 이 집에 좀 묵으려 했는데 쫓아내더구먼. 그래도 너무 집주인 욕하지는 말게. 내가 다 잘못한 거니까….”

다 맞는 말이었지만, 70살 넘은 노인이 문 앞에서 처량하게 앉아 이야기하니 그게 퍽 주변 사람들의 동정심과 상상력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어쩜, 할아버지한테 그럴 수가.”

“너무해요, 할아버지. 신고해 드릴까요?”

“허허, 신고는 무슨. 잘은 모르지만 내가 잘못한 게지. 이 늙은이가 얼마나 답답했을꼬.”

“세상에, 이렇게 착한 할아버지를.”

잠깐 사이 형우가 상종도 못 할 인간 말종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빨리 들어오세요.”

결국 형우는 대문을 다시 열어주고 노인을 집에 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사온 지 며칠도 안 돼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금수만도 못한 인간으로 찍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해 볼게.”

그다음에 나선 것은 의재였다. 의재는 잠깐 고민하더니, 밖에서 맥주와 소주를 가득 사서 왔다.

“저런 사람은 자존심이 세니까, 술을 잔뜩 마신 다음에 자존심을 박박 긁으면 술김에라도 하겠다고 할 거야. 그거 녹음해서 써먹는 거지.”

“내일은 수업 있는 날이잖아?”

“…노인이 마셔 봐야 얼마나 마시겠어.”

그리고 그다음 날, 형우는 꽤나 사적인 이유로 ‘선취업 후학점’ 제도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의재는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등교했다가, 교수님에게 수업 도중에 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보고 송강 정철이라 그랬어.”

“면목이 없다.”

“수업 시간에 시도 읊더라. 북두칠성을 국자 삼아 술을 진득하게 퍼서 만백성을 취하게….”

“그거 시 아니야. 가사야.”

“…너까지 화나게 할래?”

노인네가 술이 얼마나 세던지, 형우와 의재 둘이 동시에 덤벼도 상대도 안 됐다. 꾀, 협박, 회유, 그 모든 게 안 먹히니 마지막 방법으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 송의진 선생님. 이러시면 저 죽습니다.”

“싫다니까.”

“…그림 그리기 싫으시면 저한테 가르쳐라도 주세요! 제가 그릴게요!”

“이 나이에 제자 받을 생각 없네. 내 나이면 콩나물도 안 심어. 왜인지 아나? 그걸 내가 먹을 수 있을지 말지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

“요즘 100세 시대거든요!”

그 소 힘줄보다 더 질긴 고집에 결국 의재는 필라테스의 할로우 자세를 취했다.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는 뜻이다.

“…뭔 할아버지가 고집이 저렇게 세?”

“변명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노벨 변명상 있었으면 우리나라 노벨상은 두 개였을 걸.”

후우, 하고 의재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난 포기. 저 할아버지 설득하느니, 차라리 주식을 다시 할래.”

“…그 정도야?”

예전에 의재가 한탕을 친다며 알바비를 모아 주식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1주일 만에 수익률 –88.7%를 달성하며 세 달간 일한 돈을 몽땅 날렸었다.

손대는 종목마다 망하는 게 얼마나 절묘하던지, 옆 경제학과 교수가 찾아와서는 대한민국 코스피를 올리려면 저 자식의 증권 계좌를 몰수해야 한다고 비웃고 갈 정도였다.

“주식은 적어도 12%라도 살렸잖아, 근데 이건 내가 보기에 하나도 못 건져.”

“내 생각도 그래. 저 노인을 설득하려면 뭐랄까, 기적이 있어야 해. 아니면 절대 설득 못 해.”

“처음에 그 아들분이 그래도 아버진데 쫓아내는 거 보고 좀 그랬거든? 근데 겪어 보니 알겠어. 이건 진짜 상상 이상이야.”

“하느님 맙소사. 그 가련한 가족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의재가 어설픈 손짓으로 머리, 배꼽, 그리고 양어깨를 찍었다. 자세히 보니 십자가 모양, 그러니까 성호聖號였던 것 같다.

평생 교회라고는 군대에서 데리버거 준다기에 간 것 빼고는 없는 의재를 순식간에 경건한 신앙인으로 바꿔 놓다니. 형우는 슬슬 송의진이라는 노인이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포기할 거야?”

“뭐래.”

하지만 형우와 의재도 질기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한민국의 청년들이다.

“지금 포기하면 해온 게 아깝잖아.”

그렇게 둘은 마치 옛날 무성영화에 나오는 노란 옷과 빨간 옷을 입은 대머리 머저리들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계획을 짜냈다.

“의재야. 이번 건 확실하게 먹히겠지?”

“그래, 자식아. 뚫어뻥이랑 맥도날드에서 산 빅맥 라지 세트랑 태양광 전지까지 준비했잖아. 이건 완벽한 계획이야.”

“…거기에 수르수트레밍이랑 벼락 맞은 복숭아나무 가지, 고백에 실패한 남학생의 러브레터까지.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대체 그 러브레터는 어디서 구해온 거냐?”

“…내가 고등학교 때 썼던 거야.”

“첫 줄이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고양이에게’ 던데.”

“그걸 왜 읽억-”

형우는 그만 넘어질 뻔했다.

“야, 조심해! 변기에서 떨어지면 말짱 헛수고야!”

“대답이나 해! 그걸 왜 읽었냐고!”

“궁금해서 읽었어! 남이 쓴 러브레터잖아. 궁금한 게 당연한 거 아냐?”

“아무튼 읽지 마! 그나저나, 오늘 계획 한 번만 더 설명해 줄래? 4번부터 잘 기억이 안 나서.”

“좋아, 송의진 설득하기. 작전명은 발키리고…. 첫 번째로 화장실 변기 위에 세상에서 제일 지독한 음식인 수르수트뤠밍을 설치한 후… 잠깐.”

거창한 계획을 설명하던 의재의 말이 갑자기 뚝 멈췄다.

“…너희 뭐 하냐?”

어느새 화장실에 들어온 송의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기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형우와 의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부터. 그나저나, 전화 받아라.”

송의진이 형우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히죽 웃었다.

“아까부터 계속 전화 오더라. 거의 다섯 통째?”

“그걸 왜 이제 말해 줘요?”

“바빠 보이길래. 그리고 이거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 뭐냐.”

그가 손에 들고 흔드는 건 형우의 흑역사, 러브레터였다.

“나의 작은 아기고양이라, 감수성 넘치던데. 젊음이 역시 좋아.”

“이익…!”

형우는 죽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편집자님?”

전화를 건 사람은 지원이었다.

“네, 김형우 작가님! 혹시 지금 송의진 작가님과 함께 계세요?”

“…그런데요?”

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울려 퍼졌다.

“애가 나온대요!”

“…뭐가 나와요?”

“애요, 애!”

“무슨 애요?”

“송의진 만화가님 손자요! 방금 출판사로 연락 왔어요. 출산이라고요!”

“…출산이요?”

의재와 형우는 동시에 송의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노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빠져나갔다.

“애가 나온다고? 아냐, 그러면 안 돼.”

혀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송의진이 한 자 한 자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너무, 빨라. 이건 너무 빠르다고….”

출산예정일까지는, 아직 두 달이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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