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64화 (64/200)

#63

“어디 보자, 번지수가….”

창동의 좁은 벽돌주택가. 형우와 의재는 지원에게 받은 집 주소를 들고 근처를 훑었다. 이윽고, 둘은 한 집의 문 앞에서 멈췄다.

“여기… 맞나?”

집 문에 전단지가 얼마나 많이 붙어 있었는지, 번지수가 적힌 푯말이 잘 보이지 않아 한참을 살펴야만 했다. 다행히 맞게 온 듯했다. 의재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딩동.

몇 번 초인종을 누르자, 집 문이 살짝 열렸다.

“뉘쇼?”

란닝구의 반바지 바람인, 머리가 살짝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열린 문 사이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저 혹시, 송의진 선생님 되시나요?”

“송의진? 또 어디서 술값이라도 외상했소? 그런 거면 직접 받으쇼. 괜한 사람 찾아오지 말고.”

말하는 걸 보니 송의진 만화가 본인은 아닌 것 같았다. 형우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는 소설가인 김형우라고 합니다. 그, 송의진 선생님이 이번에 제 소설 웹툰을 담당하게 되셔서….”

“웹툰? 우리 아버지가 일을 한단 말요?”

“아버지… 요?”

아마 저 사내는 송의진 만화가의 아들인 듯했다. 아들도 40대는 넘어 보이는데, 송의진 작가는 대체 나이가 얼마나 된다는 거지?

웹툰을 보고 어느 정도 나이가 있겠거니 생각하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더 나이가 많은 모양이었다.

“거, 아버지는 지금 집에 없소. 노인정에 있겠지. 그나저나, 우리 아버지가 그림 그린 거 맞소?”

“…맞아요. 송의진 만화가님.”

“거 며칠 전부터 뭐 그린다고 뿌시럭대기는 하더만, 뭔가 그리긴 그린 모양이군. 돈은 꼭 주시오. 떼먹지 말고. 뭐, 외상값 다 내면 얼마나 남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있다면야 노인정이 아니라 술집에 있을 거요. 저 아래쪽이요.”

“지금 세 신데요?”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형우를 바라봤다.

“그쪽은 소설가 아뇨?”

“맞죠.”

“…젠장, 노인네가 또 거짓말을 했군. 예술가들은 죄다 아침부터 술을 마신다고 하더니만. 아무튼 알아서 잘 찾아보시오. 나는 밀린 야구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쾅, 하고 문을 닫았다. 문 뒤로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까지 나왔어? 임산부가, 몸조심해야지.’

‘방금 손님 온 거 아니었어요? 저 말 다 들었어요.’

‘아냐, 우리 손님 아냐. 아버지 찾아온 거야. 빨리 들어가서 같이 야구 마저 보자. 야구 좋아하잖아.’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 형우와 의재는 송의진을 찾아 그 아들이 알려준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큰 데에서 방향만 가지고 술집을 어떻게 찾냐? 아무래도 이거 완전히 헛방….”

우당탕탕!

술집 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들리는 소란에, 둘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쪽으로 향했다.

“아니, 할아버지! 술값이 없으시면 오질 말라니까요?”

“거 주인장. 인색하게 그러지 맙시다. 내 그림 준다니까? 내가 한때는 잘 나갔던 만화가요.”

“그깟 그림 필요 없어요! 자기가 무슨 빈센트 반 고흐인 줄 알아?”

아주머니 한 명이 할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은 걸까?”

“으음, 아마도.”

형우와 의재는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 소란이 난 술집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갔다.

“…저, 사장님?”

형우가 사장님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어이구, 손님이신가? 두 분이신가요?”

“손님은 아니고, 송의진 만화가님 찾으러 온 사람입니다.”

“이 할아버지를?”

미심쩍다는 듯 형우를 위아래로 살피던 술집 사장은 알았다는 듯 흐음, 소리를 냈다.

“알겠네. 저 아래 새로 지은 술집 사장들이에요? 거기서도 돈 떼먹었구만!”

“난 그런 적 없어!”

송의진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형우는 그 소리를 잠시 무시하고, 사장에게 물었다.

“이분 외상값이 얼마인가요?”

“다 합치면 삼십 가까이 돼요. 늘 오실 때마다 외상하고 가는 걸 지금까지는 참았는데, 더는 안 되겠어. 우리도 지금 적자라구요.”

“카드 되죠?”

형우는 그렇게 말하며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쓱 내밀었다. 그 카드와 형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사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아는 사이에요?”

“…같은 일 하는 사람입니다.”

“뭐, 돈만 낸다면 상관없어요. 총 273,000원이에요.”

“깔끔하게 30만원 긁어 주시고, 차액으로 안주랑 술 몇 개만 세팅해 주세요. 테이블 써도 되지요?”

“물론이죠!”

방금까지만 해도 억셌던 사장님의 말투가 돈을 보자마자 180도로 바뀌었다. 곧 테이블 위에 골뱅이 소면과 감자튀김, 그리고 소주가 놓였다.

“크으, 좋구만!”

송의진은 가타부타 질문도 없이 소주부터 꺼내 목을 축였다.

술을 좀 마실 때까지 기다린 후에, 천천히 말을 붙였다.

“…송의진 만화가님 맞으시죠?”

“맞네만, 자네는 누군데 이 촌부를 찾는가?”

여기는 서울이니 촌부村夫라는 말은 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저는 김형우라고 합니다. 최근에, 선생님이 그리신 만화의 원작자기도 하고요.”

“아, 그거. <전설의 보안관>이던가?”

“네. 오늘 온 건 다름이 아니라, 그 그림 때문에….”

“일없소.”

말도 꺼내기 전에 송의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 전에 연락이 왔더군. 돈도 준다기에 어떻게 그리기는 했는데… 솔직히 별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 날 보시오, 이미 다 늙었잖소.”

“이런.”

형우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이곳에 오면서 의재가 했던 말이 맞았다.

‘이 만화가, 그림 기본기는 확실하게 있어. 그런데….’

‘뭐가 이상해?’

‘이 웹툰, 대충 그린 거야. 펜터치부터 채색까지, 의욕이 하나도 없어.’

그런 의재의 걱정은 맞았다. 송의진은 애초에 그림에 대한 의욕 같은 걸 거의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만화를 그린 게 10년 전이지. 그동안은 그림에 손도 안 대다가 얼마 전에 자네 걸 그린 거야.”

“…뭔가 느껴지시진 않았어요?”

“오랜만에 솟아오르는 열정, 뭐 그런 걸 말하는 거라면 관두게. 내 나이쯤 되면 오랜만에 열정이 솟아오르는 경험도 벌써 열 번은 해 보게 되니까.”

번아웃(Burn Out).

누군가는 열정이 마음만 먹으면 펑펑 쏟아지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열정에는 언제나 총량이 있다. 그리고, 그 총량을 모두 태워버린 사람을 번아웃이 왔다고 말한다.

뮤즈가 완전히 떠나버린 사람. 송의진이 딱 그랬다.

“선생님, 이 웹툰을 한 번 보세요.”

형우는 자신이 들고 온 웹툰을 송의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런 걸 실을 수는 없다고요! 딱 봐도 뭔가 이상하잖아요? 이건 진짜 쓰레기라고요!”

이런 완고한 상대의 경우, 자존심을 건드리면 의외로 일이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었다.

“나도 알아. 저건 쓰레기지.”

하지만 송의진은 모두가 아는 걸 왜 굳이 귀찮게 한 번 더 이야기하느냐는 투로 응수했다.

“하지만 돈이 되는 쓰레기야. 출판사에서 나한테 뭘 요구했는지 들었소?”

“뭔데요?”

“딱 10화만. 퀄리티는 안 본다고 하더군.”

젠장. 형우가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C&N에서는 <전설의 보안관> 웹툰을 길게 연재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대충 10회 정도만 그리게 한 뒤에, 낮은 퀄리티를 이유로 연재를 중단해 버렸을 거다. 물론, 그 모든 책임은 장르문학부서의 담당자인 지원이 지게 될 테고.

“그러니 제발, 어떻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형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송의진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흐음….”

민감한 내용이다 보니 사내 정치나 그런 내용은 빼고 이야기했지만, 그럭저럭 알아듣기는 한 모양이었다. 송의진이 턱에 붙은 소주 방울을 턱, 하고 털어냈다.

“당신 사정은 좀 가슴이 아프지만, 내가 해 줄 말은 만화가를 처음부터 잘 구했어야지, 라는 말밖에 없구려.”

측은지심마저도 안 통했다.

형우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는 계약조건대로는 했어.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단 말이요.”

“만화가시잖아요! 자부심도 없어요?”

송의진이 소주 한 잔을 목에 털어 넣었다.

“…만화가 송의진은 20년도 전에 죽었어. 지금은 그림 파는 샐러리맨이나 다름없지. 그리고, 어떤 샐러리맨도 받은 이상으로 일하진 않아요.”

“돈이라면… 제가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분수에 안 맞는 계약을 하지도 않지.”

그의 관심사는 오직 눈앞에 놓인 소주잔밖에 없는 것 같았다.

‘완전 폐인이나 다름없잖아.’

형우와 의재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만요. 여기 계세요.”

“술과 안주가 있는데 내가 어딜 가겠나?”

노인은 그것이 마치 엄청나게 웃긴 농담이라는 듯 허허 하고 웃었지만, 형우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 * *

“…의재야, 어떡하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

의재가 이를 악물었다.

“송의진 만화가가 저런 사람이라니… 세상에.”

“아는 사람이야?”

“몰라. 하지만 작품은 대충 알지.”

존경하는 인물이 사실 개차반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은 꽤 찜찜한 일이다. 형우도 예전의 천우희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한때는 한국 만화의 대부로 불렸던 분이셔. 80년대 한국 만화의 부흥을 이끈 분이지.”

“그랬던 분이 왜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지. 40년이 흘렀으니 이미 할아버지잖아.”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이를 든다고 꼭 번아웃이 오는 건 아니다. <왕좌의 게임> 작가인 J.R.R마틴은 70이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1년에 한 권씩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까지 가지 않더라도 <식객>시리즈로 유명한 한국의 허영만 만화가도 고령의 나이에도 계속해서 작품을 이어나가고 있다.

“생각해 보자, 번아웃이 왜 올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번아웃이니 뭐니 하는 것을 떠들기에는, 형우나 의재나 열정이 바닥나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까?”

의재의 말에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없어.”

플랫폼 연재까지 기껏해야 한 달도 안 남았다. 그사이에 새로운 만화가를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구한다고 해도 계약의 문제가 남는다.

“세 번째 가능성을 살려야 해.”

지원이 형우에게 말한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지원이 희생하여 자신의 상관을 배신하고 사내 파벌을 옮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형우가 희생하여 송의진이 그린 수준 미달의 웹툰을 그대로 기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한 가지 경우의 수가 더 있었다.

‘송의진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

어제 의재와 대화하면서 발견해 낸 세 번째 가능성. 이대로만 된다면 누구도 희생할 필요 없이 웹툰화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정작 그 대상인 송의진의 의욕이 하나도 없었다. 형우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관문이었다.

번아웃이라니.

지금까지 형우는 의욕이 넘치는 사람만 만났다. 지원이나 천우희, 민준 삼촌은 말할 것도 없었고, 공판석조차도 방향이 틀렸을 뿐 그 열정만큼은 확실했다. 주변의 모두가 치열하게 살았다.

그 탓에 치열함 후에 필연적으로 오는, 식어버린 삶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던 것이다.

“쩌어, 쩌기요?”

그렇게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저어, 호옥시. 아가 요기, 술집에서 아버님이랑 말하던 사람들 마자요?”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은 만삭의 여인이었다. 한국어가 어째 어눌하다 싶어 보니,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 아마도 동남아 쪽 사람인 듯했다.

“아버님이라 하면, 송의진 만화가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자요, 의진, 송의진.”

송의진을 아버님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까 본 그 40대 아저씨의 부인인 듯했다.

‘그러기엔 너무 젊은데?’

아무리 많게 봐야 3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부인. 동남아에서 젊은 나이에 한국으로 국제결혼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런 케이스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김형우입니다.”

“저는 서의재요.”

“형우 씨, 의재 씨, 저는 진미에요.”

“아하, 진미 씨구나….”

그렇게 말하는 형우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부푼 배로 향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진미 씨가 수줍게 웃었다.

“윤철이.”

“윤철이요? 아….”

아무래도 배 속에 있는 아이 이름인 모양이다. 하기야, 저렇게 만삭이니 이름을 정해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8개월. 두 달 후 나와요.”

“아…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의재 씨…. 그런데 제가 할 말이 좀 있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앞으로 하는 말….”

진미 씨가 말끝을 좀 얼버무렸다.

“아버님한테는 비밀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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