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57화 (57/200)

#56

‘하기야, 부자라고 했으니까.’

한국대학교 문창과에는 두 명의 부자가 있다. 첫 번째는 누가 뭐래도 조현수다. 아버지가 규모 있는 로펌의 수장이고, 애초에 타고 다니는 차부터가 벤츠 아닌가.

그리고 두 번째는, 공태준이다. 평소에도 눈 돌아갈 정도로 비싼 명품을 둘둘 두르고 다니고, 돈을 물 쓰듯이 막 썼다. 부모님이 출판업계 큰손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기부입학이 아니냐는 말도 종종 돌았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놈이 한국대학교 문창과에 합격했다는 게 설명이 안 되기는 해.’

하지만 그렇다고, 공태준이 과 내에서 소외된 이웃이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의외로 개 같은 데가 있어서, 아무리 인성이 개차반이여도 돈과 빽만 있으면 나름의 무리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형우에 앞에 있는 패거리가 바로 그놈들이었다.

‘…얘네는 진짜 어떻게 여기 왔냐.’

성실한 학생이 꼭 공부 잘하라는 법 없고, 배배 꼬인 놈이라고 공부 못 하라는 법 없다지만, 실제로 그런 놈들을 보면 자꾸 무신론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나저나 우리 형우 후배님. 돈이 좀 급하셨나 봐? 그런 데에도 손을 뻗는 걸 보면.”

“그런 데라뇨?”

“장르소설 말야. 하기야, 가난한 집 자제분이시니까.”

패거리가 형우를 보며 낄낄거렸다. 의재가 그 옆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선배님. 첫날부터 이러지 마시죠.”

“내가 뭘? 작가님한테 인사 좀 한 건데, 이러기야? 팬 서비스가 엉망이네.”

“…더 하실 말씀 남았나요?”

듣다 못 한 형우가 공태준의 말을 끊었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의재가 놈들을 팰 것 같아서였다.

“선배한테 말이 좀 거칠다?”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공태준이 표정을 구겼다. 감히 너 따위가 내 말을 끊어? 그런 느낌이었다.

“요즘 잘 나간다고 선배도 안 보이냐?”

“존댓말 했잖습니까. 저는 더 할 말이 없네요.”

형우가 대충 고개를 숙였다.

“저는 수업이 얼마 안 남아서 이만.”

그렇게 이야기하고, 형우는 공태준을 반 뼘 길이로 스쳐 지나갔다.

“허어,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야! 일로 와 봐!”

공태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무시했다.

저놈은 똥이다. 그것도 썩은 똥.

괜히 붙으면 저번처럼 역겨운 일이 생길 게 뻔했다.

* * *

306호 강의실의 앞.

“형우 선배!”

멀리서부터 걸어오던 연수가 형우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학교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렇지. 오랜만에 학교 와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여기가 <소설창작론> 수업 강의실 맞지?”

“맞아요. 그런데, 의재 선배는요?”

“의재는 다른 수업 듣는다던데.”

연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그랬었지. 아무튼 학교 돌아온 거 축하해요. 기분은 어때요?”

“피곤해.”

형우의 성의 없는 대답을 들은 연수가 입술을 배쭉 내밀었다.

“또 밤새워서 글 썼죠? 그러다가 병 걸린다니까요? 몸 좀 아껴야지.”

“오자마자 잔소리야?”

“다 선배 걱정해서 하는 말이거든요. 아, 수업 늦겠다. 들어가요!”

그렇게, 형우와 연수는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렇다는데?”

“정말? 완전 어이없는 거 아냐?”

“…그만, 왔다.”

형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하고 멎었다.

‘…뭐지?’

형우와 의재는 동시에 이상한 분위기를 직감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의 정체는 곧 풀렸다.

“형우 형! 복학 진짜로 했네요?”

“어, 응 영훈아. 반가워.”

형우의 1년 후배인 주영훈이 반갑게 인사했다. 평소에도 조금 눈치가 없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 눈치없음이 조금 도움이 됐다.

“선배, 그 소문 진짜예요?”

“무슨 소문?”

“그, 선배가 천병옥 평론가님한테 개쪽을 줬다는 이야기요.”

“…뭐라고?”

그제야 그 이상한 분위기의 정체가 파악됐다. 어디서 헛소문이 잔뜩 돈 모양이었다.

“완전 소문 쫙 났어요. 이러다가 한국 대학교 문창과 학생들 완전 찍히는 거 아니냐고. 아니죠? 선배?”

눈치 없는 주영훈 후배님.

군대에서도 대대장 뒷담을 까다가 걸려서 영창을 다녀왔다는 전설의 이등병은, 오늘도 비슷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재밌는 소문이군.”

“누구… 허억, 교, 교수님?”

천병옥이었다.

오늘 공지가 있어서, 잠깐 들른 것이다.

“참 이상한 소문이야. 형우 학생은 그런 적이 없는데. 그렇지 않나?”

“물론이지요.”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영훈 학생도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아니라고 하도록. 괜한 헛소문에 휘말려서야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는 법이지.”

나지막하게 말한 뒤, 천병옥은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 교탁 앞에 자리했다.

그 완고한 카리스마에, 강의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반갑습니다, 학생들. 저는 천병옥이라고 합니다. 올해부터 여러분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천병옥은 보드마카를 들어 칠판에 뭔가를 썼다.

<현대평론의 이해>

<장르문학의 이해>

<근대철학론>

“…이상의 세 가지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다은 교수님을 대신하여 몇 가지 공지 사항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슥슥-

또다시 화이트보드 위로 정갈한 글씨체가 자리했다.

<한국대학교 단편 문학상>

“방학 중에 진행되던 문학상입니다. 외부 초청 강사를 통해 감평을 시행할 것입니다. 등단을 꿈꾸거나, 혹은 꿈꾸지 않는 모든 학생들의 참가를 환영하며,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일주일이 남았으니, 숨겨둔 소설이 있다면 제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탁, 하고 보드마카를 내려놓는 소리가 강의실 안을 둔중하게 울렸다.

“이상.”

천병옥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서는, 그대로 강의실을 나섰다.

“오.”

그 모습을 본 형우가 감탄을 터트렸다. 전에 봤을 때는 그냥 꼰대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교단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포스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

‘…그나저나 헛소문을 퍼트리다니.’

그 근원지가 어딘지는 안 봐도 뻔했다.

“씨발….”

강의실의 구석,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공태준의 얼굴이 보였다.

* * *

첫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

“선배! 한국 대학교 리더 행사 진짜 감동적으로 들었어요!”

“저는 <요그>도 봤어요! 대박!”

형우의 주변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아까까지는 천병옥과 관련된 헛소문 탓에 다가오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저 혹시, 나중에 제 글 좀 봐주실 수 있어요?”

“제 것도요! 저도 장르소설 한번 써 볼까 생각 중이거든요.”

“돈은 얼마나 벌었어요?”

“그, 그게….”

끊임없이 들어오는 질문들에 형우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잡지 나온다는 게 좋기는 하구나.’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생각이 바뀌었다.

“선배. 장르문학은 어쩌다가 시작하신 거예요?”

“그게, 리더 행사에서 말했다시피….”

“요즘은 뭐 하세요? <전설의 보안관>곧 완결이잖아요?”

“…차기작 구상 중이야.”

하지만 좋은 것도 적당히 해야 좋은 거지, 쉬는시간 내내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쩔쩔매고 있는데,

“야, 형우야! 뭐 하냐. 밥 안 먹으러 가고?”

어느새 다가온 의재가 형우의 어깨를 툭 쳤다. 형우 주변에 몰려 있던 애들이 불평을 터트렸다.

“의재 선배! 말하고 있잖아요!”

“조금 나중에 해. 애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주영훈이 눈치가 없는 걸로 유명했다면, 의재는 눈치를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 * *

한국대학교의 학생을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능 성적이나 학과 따위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정문 쪽에 있는 돈가스집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다.

“이 집 모르면 간첩이라니까?”

한국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먹어봤다는 명물인 대왕 돈가스는 그 이름답게 성인 남자 손바닥 두 개를 모아둔 것보다 더 컸다.

그렇게 큰 주제에 가격은 육천 원밖에 안 했고, 사이드로는 미소된장국에 샐러드까지 나왔다.

주머니는 얇지만 칼로리는 부족한 대학생들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랜드마크 맛집인 것이다.

“이건 진짜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니까! 이 돈가스 소스가 우스터 소스라는 건데, 옛날 영국에서….”

의재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전투적으로 돈까스를 썰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쉴새 없이 말을 했다. 딱히 쓸모있는 말은 아니고, 이런저런 잡지식들이었다.

‘짜식.’

이유는 뻔했다. 뒤에서 삼삼오오 모여 형우의 뒷담을 까고 있는 공태준 패거리의 말이 들리지 않도록 형우를 배려하는 것이다.

그 배려는 별 소용이 없었다. 형우는 귀가 좋았다.

“…교수님도 미친 거지. 한국 대학교에 장르소설과라니.”

“천병옥 선생님도 나이가 들더니 변한 거야.”

“애들도 미쳤지. 그깟 허접 같은 글 쓰는 놈이 뭐가 좋다고 꺅꺅거리기나 하고.”

“진품을 못 알아보는 거죠.”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리는 자식들이 얼마나 꼴불견이던지. 저 녀석들은 자기들이 인싸고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형우가 알기로 교내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놈들은 저 놈들 뿐이다.

학생부터 교수진까지 공태준 패거리를 고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단 말씀.

‘나 말고도 화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식당 구석을 바라봤다.

대왕돈가스의 주 타겟층이 학생이긴 했지만, 꼭 학교에 학생만 다니라는 법은 없다.

“거참, 더럽게 시끄럽네.”

혼자서 밥을 먹던 중년의 여교수가 딱, 소리가 나도록 식기를 내려놨다. 그 모습을 본 공태준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일어났다.

“교,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태준아. 있었니? 그런데 말이다, 이 식당 환풍기 소리가 좀 시끄럽지 않아? 어디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구나.”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식당 구석에서 밥을 먹고 있던 것은,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문창과의 정교수, 한다은이었다. 멀리서도 공태준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게 보였다.

방금까지 교수가 미쳤니 어쩌니 하던 게 귀에 들어갔으면 어쩌지, 하고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히 들어갔지. 등신.’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기분 좋게 눈앞에 있는 초거대 돈까스를 썰어 입에 베어 물었다.

“진짜 맛있네. 엄청 고소한데?”

“그치? 이게 완전 육즙도 예술이고, 층도 거의 다섯 층 가까이 되는 게….”

의재는 여전히 쉴새 없이 떠들었다.

방금까지는 떠드는 게 배려 차원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진짜로 그냥 돈까스가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차,

“형우야, 의재야.”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한다은 교수님이 둘을 불렀다. 형우와 의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 의재야. 하는 일은 잘 되고 있니?”

“아. 그게….”

의재가 형우의 눈치를 살짝 봤다. 그 모습을 본 한다은 교수님이 씩 웃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언제라도 좋으니 교수실에 한번 찾아오렴.”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대체 의재가 뭘 하고 다니는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의재와 짧은 대화를 나눈 교수님은, 그대로 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우야. 잡지 잘 봤다.”

“흐흐, 감사합니다.”

“내 이야기는 없더구나.”

“…네?”

“널 어떻게 가르쳤는데. 내 이야기를 했어야지.”

“아, 그게….”

“농담이다.”

안절부절못하는 형우를 보며, 한다은 교수님이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수고했다는 건 진짜야. 덕분에 장르소설 과목을 신설할 수 있었으니까.”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에서 형우를 내세운 것, <요그>에 형우를 출연시킨 것. 그리고 천병옥 교수의 마음을 돌린 것.

그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한다은은 완고한 윗선에게 장르소설 과목을 신설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천병옥 교수님이 큰 도움이 됐지.”

지난 문단 생활 동안 한사코 장르문학을 반대하던 사람이 장르문학 교수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그 파급력이 작을 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문단지에 글도 실었더구나.”

“아, 저도 읽어 봤어요.”

<새로운 문학의 미래>라는 제목의 논평이었는데, 처음 읽었을 땐 꽤 놀랐다. 일단 문단 복귀 속도가 생각보다 빠른 점에 놀랐고, 그다음은 그 내용에 놀랐다.

천병옥은 지분의 99.9% 정도를 할애해서 순문학의 미래 전망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논리 전개가 깔끔하고 내용이 미려한 것이, 관록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부분은 그 99.9%가 아니라, 마지막에 적힌 두 줄의 글귀였다.

[다만, 문학에 순문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저변에서, 장르라는 식물이 천천히 태동하고 있다. 이 식물이 어떻게 자라날지는 아직 모르는 바이나, 나는 좋은 작가가 쓰는 작품은 모두 좋은 작품일 거라는 희망을 갖고 싶다.]

비록 두 줄에 불과했지만, 어떻게 봐도 장르문학에 대한 힘 있는 옹호가 아닌가.

“이렇게 발전해나가는 거지.”

“뭔가 서로 감정이 격할 줄 알았는데… 잘 돼서 다행이에요.”

“후후. 자기 감정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면 그거야말로 실수지. ‘쓰다’라는 단어를 보면, 글을 쓴다는 말도 되고, 도구를 사용한다는 말도 되잖니. 작가란 응당 그래야 해.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 하는 거지.”

연륜이 묻어나는 말에, 형우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감명받았다.

“그래서 말인데, 형우야. 이번에 학교에서 하는 공모전 이야기 들었니?”

“네. 오늘 천병옥 교수님한테 들었습니다.”

“응.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이번에 소설을 좀 내줬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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