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56화 (56/200)
  • #55

    “계속 말해 보거라.”

    “교칙에 의하면, 문창과에서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소양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교敎와 육育이지요.”

    교는 가르치는 것, 그리고 육은 제자를 키워내는 것이다. 형우가 천병옥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런 말이 있지요, 팬보다 가수에 대해 잘 아는 건 안티팬이라고. 천병옥 교수님은 20년 넘는 시간 동안 장르문학과 대치해 왔던 분이십니다.”

    형우는 이곳에 오기 전에 천병옥이 썼던 논문과 에세이를 모두 읽었다. 대부분은 장르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꺼내기조차 힘든 화두들이었다. 한다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두 번째는? 병옥 선배가 훌륭한 장르소설가를 키워낼 수 있을까?”

    “키워낼 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교수님.”

    형우가 한다은의 말을 정정했다.

    “천병옥 선생님은 이미 훌륭한 장르소설가를 키워냈으니까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한국 대학교의 강사로 추천받을 정도로 대단한 장르소설가, 천우희 작가님을 말이죠.”

    그때까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허둥대던 천우희는 갑자기 자기 이름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나, 나?”

    “천우희 작가님이야말로, 천병옥 교수님의 제자 육성 능력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형우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한다은이 시선이 방에 들어선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천병옥을 향했다.

    “…그렇다는데요, 병옥 선배? <장르문학기초>의 강의를 맡아 주시겠어요?”

    한국대학교의 강의는 총 세 개의 등급으로 나뉘어진다. ‘기초’, ‘이해’, ‘심화’의 3단계가 그것이다.

    보통 베테랑 교수들이 ‘심화’ 단계를 맡고, 신입생들이 듣는 ‘기초’ 강의는 초임 교수나 외부강사들이 맡는다.

    그러므로 문단 경력이 빠삭한 천병옥에게 ‘기초’등급 강의를 맡으라는 건, 군대로 치자면 대대장보고 연병장의 잡초를 뽑으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다른 교수들이었다면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열심히 해 보지.”

    하지만 천병옥은, 그 말을 기회로 받아들였다.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아니라, 딸과 화해할 기회 말이다.

    “쉽지 않을 거예요. 선배는 순식간에 배신자로 낙인찍히겠죠. 어쩌면, 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세상은 변절자에게 가혹하니까.”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도 없다.”

    한다은의 교수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미 결정했다. 어린 딸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나섰는데, 그깟 자존심 때문에 기회를 저버린다면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

    그 결의에 찬 대답을 들은 천우희가 조심스럽게 천병옥의 손을 꼭 잡았다.

    ‘결정됐군.’

    한다은은 다시금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형우를 바라봤다.

    “여기부터는 이제 교수끼리 이야기할 차례야. 형우야, 이제 슬슬 나가 있으렴. 아니면, 커피라도 먹고 갈래?”

    “에엑, 커피요?”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저은 형우가 그대로 교수살 바깥으로 슬금슬금 도망쳤다. 그런 형우를 바라보며 천병옥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고맙다.”

    “뭘요, 다음 학기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형우는 그대로 교수실의 문을 닫았다.

    * * *

    “…이건 또 무슨 렉이야?”

    한국 대학교의 수강신청 날. 형우는 자기도 모르게 노트북에 대고 욕설을 내뱉었다.

    “등록금은 등록금대로 먹어놓고 왜 서버는 이 모양이지?”

    아무래도 서버비를 횡령한 게 분명한 것 같았다.

    하지만 형우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4학년. 이 정도 고난은 이미 예측했다.

    아침 일찍 피씨방에 와서 좌석을 다섯 개나 잡아 둔 것이다. 노트북은 터졌지만, 다행히 두 번째 컴퓨터와 세 번째 컴퓨터는 서버에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일단 교양부터….”

    전공 과목과 달리, 교양과목은 모든 과의 학생들이 동시에 신청하므로 매진도 그만큼 빠르다.

    두 번째 컴퓨터로는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전쟁과 역사’라는 교양과목을 신청했고, 세 번째 컴퓨터로는 ‘실생활에 도움 되는 금융론金融論’과목을 신청했다.

    그리고 새로고침을 누르자마자, 두 과목이 마감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역시 교양부터 신청한 게 정답이었어!’

    그다음은 전공 필수 과목을 신청하고 전공 선택 과목으로 들어갔다. 그중 한 과목이 눈에 띄었다.

    1학년 강의 : <장르문학기초>

    강사 : 천병옥

    진짜로 강사가 됐다, 그것도 1학년 강의.

    ‘…많이 내려놨구나.’

    문단에서 버림받은 일로 뒷목을 잡고 쓰러질 정도로 자존감이 강하던 사람이, 자신의 딸을 위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표정은 나쁘지 않았지.’

    형우가 마지막으로 본 천병옥의 모습은, 지위가 떨어진 것보다 딸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게 더 기뻐 보이는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 자체였다.

    ‘이 정도면, 잘 끝난 거겠지?’

    예전에 천병옥과 싸웠던 이후, 형우는 내심 불안했었다.

    비록 한다은에 비하면 좀 꿀리기는 하지만, 천병옥 또한 20년 넘게 한국 문학을 이끌어 온 문단의 큰 어르신이다. 밉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언젠가 감정의 골을 한 번 풀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오긴 했다.

    ‘그런데 이건 감정의 골을 풀어낸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입힌 수준이다.

    한다은이 형우에게 가진 것이 단순한 호감이라면, 천병옥은 형우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어떤 집단에서든, 집단의 권력자와 손을 잡으면 앞길이 꽤 편해지는 법이었으니까.

    비록 형우가 종사하는 것이 문단이 아닌 장르문학계라고 한들, 문단 종사자와 인연을 쌓는 것이 나쁜 일일 리 없었다.

    게다가 순문학 우월주의의 지도자 격이었던 천병옥이 장르문학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문단 내에서 장르문학 입지를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말이다.

    ‘몇 바퀴만 돌면, 결국 다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거지.’

    문단의 권력자와 커넥션을 만든 것만 해도 수고비로는 과분했지만, 좋은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망국의 테라피스트 무단 휴재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경황이 없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더 좋은 소설로 보답하겠습니다.

    천우희의 사과문이 올라왔다.

    현주면주 : 아버지 아픈건 어쩔 수 없지….

    용개짱 :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ㄴ천우희 : 네! 다행히 괜찮아지셨어요!

    혜음 : 무단으로 휴재하고 구라치는 것 같은데?

    멍애츼 : 아버님이 쾌차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작가님도 아무쪼록 맘 상하지 말고 좋은 글만 써 주세요.

    가끔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논란도 곧 잠잠해졌다.

    간호학개론 : 저 경기도 병원 근무하는 간호사인데요, 천우희 작가님 아버지 1주일간 입원하셨던 거 맞아요! 천우희 작가님이 저희 드시라고 사과도 주셨던걸요!

    ㄴ현주면주 : 이분 블로그 보니까 진짜 간호사 맞는 듯.

    ㄴ멍애츼 : 헉 찐이다!

    새롭게 올라온 화에는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물론, 무단 휴재에 실망하고 떨어져 나간 독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아주 많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잘 된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던 차에, 휴대폰이 위이잉 울렸다.

    우희 : 야 이번에 보내준 거 읽어봤다.

    우희 : 다 좋은데, 하이라이트 장면 있잖아? 캐서린이 헤럴드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장면.

    우희 : 캐서린이 그냥 쿨하게 돌아서는 게 아니라, 살짝 애잔한 느낌을 주는 건 어때?

    천우희가 보낸 <전설의 보안관>최신화의 로맨스 감평이었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형우 : 엥

    형우 : 캐서린은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요? 쿨하고 약삭빠른 캐릭터인데.

    우희 : 그러니까, 평소에 쿨하고 약삭빠른 캐릭터가 헤럴드와의 실연 이후에 약간 성격이 바뀌는 거지.

    우희 : 그게 훨씬 더 느낌이 살지 않아? 임펙트도 있고.

    형우 : 오.

    천우희의 말대로 소설을 고치니 훨씬 그럴듯해졌다. 캐릭터에 생기가 돌고, 감정구도가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변했다.

    그 변화를 보며, 형우가 뿌듯하게 미소지었다.

    ‘역시, 막기를 잘했지.’

    문창과의 강의실에는 오십 명이 넘는 학생이 들어온다. 만약 천우희가 강사가 됐다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바빠서 개인적인 소설 감평 같은 건 해 주지도 않았을 거다.

    만약 해 주더라도, 지금에 비하면 퀄리티가 많이 떨어졌겠지.

    ‘…그건 절대로 안 되지.’

    형우는 악인은 아니었지만, 성인도 아니었다.

    나한테 충분한 물건이라면 모를까, 나한테도 꼭 필요한 물건을 남한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옹졸한 소시민이라고 할까.’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내린 형우는 내친 김에 다음 편도 천우희에게 보냈다.

    답장은 즉시 왔다.

    우희 : 야 미친놈아.

    우희 : 대체 어떤 여자가 남자한테 고백할 때 ‘오늘은 달이 참 밝네요?’라고 해?

    형우 : 안 그래요?

    우희 : 뭔 조선시대 아낙네냐?

    우희 : 아무도 저런 식으로 말 안 해.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저건 꼭 고쳐.

    우희 : 차라리 요즘 스타일대로 ‘오빠, 오늘 저랑 놀래요?’ 라고 하는 게 백만 배 낫겠다.

    우희 : 하지만 그것 빼고는 뭐, 괜찮았어. 내가 썼으면 더 잘 썼겠지만!

    으흠.

    평가가 좀 매웠다.

    마지막엔 쓸모없는 사족도 좀 있었다.

    형우 :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래서 말인데, 저도 <망국의 테라피스트>이번 화 읽었거든요.

    우희 : 어때? 짱 재밌지?

    형우 :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우희 : 그치?

    형우 : 오타도 있고.

    우희 : 엥?

    형우 : 48%부분 확인해 보세요!

    우희 :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약간의 통쾌함을 느끼면서, 형우는 재빨리 천우희가 지적한 부분을 고쳤다.

    * * *

    8월의 개강일開講日.

    수많은 대학생들이 한국대학교의 교문을 지나쳐 걸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고, 달콤한 방학이 끝난 걸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 전날 소설을 마무리하느라 밤을 새운 탓에 표정이 그대로 죽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오.”

    형우는 머리를 끌어안고 천천히 캠퍼스를 향해 발을 뻗었다. 새로운 기분이라던지, 복학의 마음가짐 같은 건 피곤함이 전부 다 덮어버렸다.

    “짜식. 어제 얼마나 놀았냐?”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툭 치는 건 친구인 의재였다. 형우가 피곤함에 찌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놀았다. 어제 하루 종일 소설 썼어. 너야말로 얼굴에 다크서클이 가득한데, 얼마나 마신 거야?”

    “마시긴 무슨, 일했어 인마.”

    “대체 무슨 일을 개강 전날까지 하냐?”

    “개강 후에도 한다. 시간표도 맞춰 놨어.”

    “…뭐 하는지 정말 안 알려 줄 거야?”

    “나중에. 지금 말하긴 좀 그래서.”

    원체 비밀이 없는 놈이 갑자기 비밀스럽게 굴어대니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지만, 말하기 싫다는데 또 억지로 입을 열 생각까지는 없었다.

    “나쁜 일 하는 건 아니지?”

    “형우야. 나는 네 생각보다 질풍노도의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단다. 물론 상상도 못 할 나쁜 짓도 많이 했지.”

    으쓱거리는 의재를, 형우가 한심하게 바라봤다.

    “…가끔 널 보면 대학에 어떻게 왔나 싶어. 사실은 엄청 천재인 거 아니냐?”

    “그걸 이제 알았어?”

    “어휴, 말을 말자.”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교내를 걸어가는데, 멀리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보였다.

    “아 씨발. 왜 하필 처음 본 게 저 새끼야.”

    의재가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팍 구겼다. 멀리서, 자신의 패거리들을 모아 두고 큰 소리로 떠드는 공태준의 모습이 보였다.

    “어여, 후배님. 복학하셨네?”

    공태준 패거리는 형우를 보자마자 시비조로 이야기했다. 의재가 재빨리 형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선배님도 오랜만이십니다.”

    “그래, 의재. 너도 오랜만이다. 그런데 말야, 나는 네 뒤에 있는 형우 후배랑도 인사를 해야겠거든?”

    “…됐어. 비켜 줘.”

    의재가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형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입니다. 태준 선배님.”

    “그래. 후배님. 요즘 잘 나가신다면서?”

    “덕분에요.”

    “그래. 그 장르문학 써서 성공했다고. 이야기 잘 들었어.”

    예전에는 공태준이 그렇게 말하면 엄청 무섭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런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 이유까지도 알았다.

    학교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보아서 그렇다.

    능구렁이 백 마리는 삼키고 있는 듯한 C&N의 편집장 공판석이나, 온갖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담당 편집자 지원. 혀에 독을 잔뜩 품고 있던 평론가 천병옥까지.

    그런 무서운 사람들에 비하면, 공태준은 고작해야 대학이라는 좁은 장소 안에서 콧대 세우고 있는 멍청이에 불과했다.

    ‘…저런 새끼가 어떻게 한국 대학교를 들어왔지? 고도의 재수학원 바이럴 마케팅인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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