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53화 (53/200)
  • #52

    “김형우 환자, 오늘 아침에 퇴원하셨는데요?”

    “네에?”

    얼마나 허탈했는지. 천우희는 그만 가지고 온 과일 바구니를 그대로 툭 떨어트릴 뻔했다.

    ‘…너무 늦게 왔나?’

    생각 같아서는 입원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오고 싶었지만, 마감 일정이 겹친 탓에 좀 미루게 됐다.

    약간 서프라이즈 느낌도 내고 싶어서 일부러 말도 안 하고 왔는데, 벌써 퇴원했을 줄이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래도 뭐, 건강하게 퇴원했다면 된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천우희는 간호사님들을 향해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 방금 산 건데 나눠 드세요.”

    “정말요? 환자분 선물 아니었어요?”

    “흐흐, 타이밍을 잘못 맞췄나 봐요.”

    “아… 안타깝네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간호사가 조금 미안하다는 듯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그러던 중에,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가 데굴, 굴러떨어졌다.

    “앗.”

    사과를 주우러 가려는데,

    갑자기 멀리서 촤르르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자를 실은 스트레쳐카(환자 이송용 침대)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였다.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응급 환자입니다!”

    “비켜주세요!”

    그 바퀴에 깔려, 사과가 파삭 부서졌다.

    과즙이 바닥 여기저기 튀어 올랐다.

    하지만, 천우희는 그 사과의 모습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빠?”

    방금 지나갔던 환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한 탓이었다.

    * * *

    아삭!

    형우의 입에서 토끼 모양으로 잘린 사과가 부서졌다.

    “보통 토끼 모양으로 깎아 놓으면 꼬리부터 먹지 않아요? 머리부터 먹다니, 토끼 불쌍해.”

    “…연수야. 이건 토끼가 아니라 사과야.”

    “사과 토끼죠. 아니면 토끼 사과? 뭐, 어느 쪽도 말은 되네.”

    자기가 문창과라는걸 증명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연수가 몹쓸 말장난을 쳤다.

    “영어로 하면 쏘리 래빗이야?”

    “와.”

    “토끼가 왜 미안한 줄 알아? 토껴서 그래.”

    “미쳤다.”

    형우는 더 말도 안 되는 말장난으로 응수했다. 연수가 피식 웃었다.

    “우리 아빠도 그런 개그 안 하는데. 완전 재미없어요, 선배.”

    “웃었잖아?”

    “재밌어서 웃은 게 아니라….”

    “그러면 넌 슬프면 웃냐? 너랑 장례식장은 절대 가면 안 되겠다.”

    연수가 장난스럽게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계속 그렇게 놀릴 거예요? 퇴원 축하해주러 온 사람한테?”

    “누가 들으면 나 죽을병 걸린 줄 알겠다.”

    고작해야 과로랑 치질이었을 뿐인데.

    오버가 심했다.

    “…그나저나, 나 입원한 건 어떻게 안 거야?”

    “당연히 의재 선배가 알려줬죠.”

    “그 자식이.”

    괜히 여기저기 퍼트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놨더니, 녀석의 가벼운 입을 깜빡했다.

    “…그 자식은 말하지 말라는 거 조잘대놓고 왜 본인은 얼굴도 안 보인대?”

    “요즘 뭐 하나 보던데. 오늘도 일 있어서 바쁘다고,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 아! 근데 이 과일 바구니는 의재 선배가 산 거예요.”

    “뭐 하는지는 모르고?”

    “완전 입 꾹 닫고 말도 안 해 주던데요.”

    “남이 말하지 말라는 건 잘도 말하고 다니면서, 제 비밀은 꼭 지킨다고?”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목 날아가기 딱 좋은 성격이다 싶었다.

    “그나저나, 연수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냈어? 방학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저야 뭐 늘 똑같죠. BTS.”

    “BTS?”

    그 말을 들은 형우가 피식, 하고 웃었다.

    BTS는 문창과 학생들이 즐겨 쓰는 은어로, 당연하지만 한류 열풍을 주도하는 남자 아이돌 그룹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B. 밥 먹고

    T. 똥 싸고

    S. 소설만 썼다는 뜻이다.

    “그 말도 오랜만에 듣네. 문창과 용어.”

    “이제 곧 많이 들을 건데요 뭐. 복학하잖아요?

    “맞아. 으으으, 오랜만에 학교 가게 생겼네. 평소처럼 조용히 학교생활 하다가 졸업해야지 뭐.”

    “조용하기는 무슨.”

    연수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번 행사 때 천병옥 선생님이랑 싸우는 거 보면 완전 쌈닭이던데요?”

    “…그 이야기는 하지 마. 머리 아프니까.”

    “천병옥 선생님 하니까 생각난 건데, 천병옥 선생님 딸도 소설가인 거 알아요?”

    “응?”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누군데?”

    “누군지는 모르는데, 소설가라고는 하더라고요. 조교님이 천병옥 선생님이랑 한다은 교수님 말하는 거 엿들었다던데.”

    “에이, 설마. 그게 여태 소문이 안 났다고?”

    평론가의 딸이 소설가가 되었다니. 고의로 숨겼다면 모를까, 모두가 좋아할 만한 그런 가십이 비좁은 순문학판에 퍼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 소설 하니까 생각난 건데, 요즘 선배가 쓴 소설 엄청 대박이던데요? 저 진짜 감동했다니까요! 이번에 추천글도 하나 달렸던데, 봤어요?”

    “뭐였더라, ‘너무너무 재밌는 웨스턴 소설!’이었나?”

    “맞아요, 그거. 엄청 성심성의껏 썼던데요?”

    “맞아. 진짜 좋더라.”

    형우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연수가 몰래 씩 웃었다. 형우가 말하는 추천 글은, 사실 <전설의 보안관>을 읽고 감명받은 연수가 어젯밤 몰래 쓴 거였다.

    SNS의 친구들에게도 재밌다며 소문을 쫙 돌렸다. 문창과 입시학원에서 만났던 친구들 중에서는 지금도 글을 쓰는 애들이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썼어요, 잘했죠?’하고 말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형우가 한 소리 할 게 뻔했다.

    지인 추천은 도리에 어긋난다거나, 편법은 안된다거나 하는 그런 말들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라는 걸 숨기고 몰래 썼다.

    ‘부탁받은 것도 아니고, 자의로 쓴 거니까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연수가 형우에게 보내는 퇴원 축하 쪽지였다.

    * * *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오늘 새롭게 올라온 <전설의 보안관>의 추천글을 보며, 형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전설의 보안관> 읽은 후기!

    친구한테 추천받은 후 매일매일 기다리면서 백원 백원 쓰면서 읽었던 전설의 보안관! 처음에 주인공이랑 여주랑 서로 총쏘고 막 황야에서 뒹굴고 하는 것도 재밌었는데!!

    요즘은 진짜 미쳤습니다. 후후후. 무려 베아트리체와 헤럴드의 로맨스가 시작됐거든요. 처음에는 엥??이작가??로맨스??되나??싶었는데!!

    작가님 죄송합니다!! 제가 의심했어요!!

    로맨스 됩니다! 달달해요! 완전 이빨 다썩어요!!

    원래 리뷰 안적으려다가!! 나도모르게 손톱 막막 씹으면서 당장 리뷰 쓰러 달려올 정도로!!

    곧 이제 웹툰도 나온다던데!! 진짜 무조건 정주행 추천합니당^^^^^^^^안봤으면 강추!!

    지금까지 꽤 많은 추천글을 봤지만,

    최근에 봤던 추천글 중에서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노력 끝에 약점을 극복한 기분은 확실하게, 평소에도 잘하던 걸 잘한다고 칭찬받을 때와는 달랐다.

    뭔가, 나는 도망치지 않았어! 라는, 조금 고양되고 뿌듯하고, 벅차 오르면서도 날아갈 것 같은 새로운 기분이 든다. 앞자리가 바뀐 독자 수는 덤이다.

    표로 보면 앞자리가 변하고, 그래프로 보면 끊임없는 우상향이다. 이게 주식이었으면 워렌 버핏도 콜라를 끊었을 거고, 코인이었으면 일론 머스크보다 먼저 화성에 도달했을 거다.

    게다가, 트위터 같은 데서도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 들었다.

    ‘조금만 더 연구했으면, 정말로 3대 플랫폼 1위를 했을 수도 있겠네.’

    웹소설이 대세가 된 지는 꽤 됐지만, 형우가 알기로도 이 3대 플랫폼의 1위를 그랜드슬램한 작품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어려운 걸 내가 성공한다면…!’

    생각만 해도 전율이 일었다.

    테니스로 치자면 윔블던과 US, 롤랑 가로스, 호주컵을 동시에 들어 올린 페더러고.

    요즘 유행하는 게임 <전설들의 리그>로 치자면 LCK와 월드 챔피언십, MSI를 동시에 제패한 전설의 프로게이머 고전파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될 테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힘들다는 뜻이다.

    뭣보다, <전설의 보안관>이 완결까지 30화도 안 남았기에, 여기서 더 성적이 늘어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인상적인 막판 스퍼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애초에, 이 정도 성적으로 1위를 한 것 자체가 엄청 운이 좋았던 거지.’

    가끔 장르소설계에는 괴물들이 등장한다.

    13개국에 출판됨과 동시에 판타지 소설 최초로 교과서에까지 그 이름을 올린 <드래곤 피자>라던지,

    대여점을 휩쓸며 절찬리에 58권까지 연재되었던 희대의 게임판타지 <별빛 조각사>는 물론,

    혜성처럼 등장해서 선작 15만을 찍고서, 3대 플랫폼에서 1위를 독차지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숑숑’ 작가의 <독자가 다 앎> 같은 것.

    아니, 솔직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지난 며칠간 형우에게 로맨스를 알려 줬던 천우희만 해도 형우보다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에 있는 작가였다.

    ‘천우희 작가님은 레벨 4, 나는 기껏해야 2나 3, 딱 그 정도인가.’

    작가 레벨.

    자기객관화의 일환으로 형우가 만들어 낸 가상의 지표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0레벨 작가 : 망생이, 습작생 등등, 글에 대한 꿈이 있지만 아직 연습 중인 예비 작가들.

    1레벨 작가 : 글로 돈을 벌어 본 작가.

    2레벨 작가 :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퀄리티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

    3레벨 작가 : 작품이 아니라 작가로서 인정받는 작가. 한두 편을 요행으로 성공시킨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연재를 하며 자신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작가.

    4레벨 작가 :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작가.

    위에서 말했던 작가들은 물론이고, 형우는 천우희까지도 이 4레벨 작가의 틀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인 5레벨은 셰익스피어나 헤밍웨이처럼 역사에 남은 작가들인데, 이것은 사실상 꿈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살아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 궁금해지기는 했다. 찰스 디킨스나 셰익스피어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이 수백 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자신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쓸데없는 생각이지. 너무 감상적이기도 하고.’

    이제 갓 2레벨에 돌입한 지금 상황에서 떠올리기에는 너무 거창한 주제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운이 따라준 결과라고 생각했다.

    참치를 만난 거나, 경쟁자 운, 소재 운도 물론 있겠지만.

    ‘제일 좋은 건 사람 운이지.’

    사람 운. 흔히 인연因緣이라고 하는 것.

    처음에 웹소설을 시작할 때는 민준 삼촌의 도움을 받았다.

    그다음에는 최고의 편집자인 지원을 만났다.

    그리고 뭣보다, 최근에 천우희를 만나 로맨스를 배운 덕분에 지금의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미국의 10대 부자 중 한 명은 누군가가 성공 비결에 대해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독학에 대한 이상한 환상을 갖고 있는데, 사실 독학은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어도 나는 부자가 되었을 테지만, 결코 지금처럼 엄청난 부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독학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맞는 선생을 찾는다면 더 빠르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런 뜻이었다.

    ‘언젠가 꼭 보답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시리즈에 접속했다. 자신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망국의 테라피스트> - 천우희.

    최신화를 확인하는 순간, 형우의 눈이 커졌다.

    ‘…응?’

    최신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건, 3일 전의 일이었다.

    ‘…뭐지? 내가 착각했나?’

    혹시 몰라 날짜를 확인해봤지만, 천우희의 작품은 주 5회 연재가 맞았다.

    ‘그렇다면 펑크를 냈다는 건데.’

    소설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천우희가 펑크를 냈다고? 형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웹소설 작가들이 자주 하는 논쟁 중에서는, 이런 것이 있다.

    미완성된 작품을 올리는 것과, 펑크를 내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안 좋은 행위인가?

    10명 중 9명 정도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펑크를 내느니, 차라리 개발새발로 쓴 작품을 올리는 게 낫다고.

    ‘그리고 남은 한 명은,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느냐고 역정을 낼 테지.’

    작품을 개판으로 쓰면 작품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질 뿐이지만, 펑크를 내면 작가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중론이다.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줬던 것이 다름 아닌 천우희였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소설이 안 올라왔던데. 휴재인가요?

    뭔가 이상함을 느낀 형우는 그대로 천우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 분 후에 답장이 도착했다.

    일이 조금 생겨서. 앞으로 네 소설 감평해 주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다. 미안.

    ‘…감평이 없다고?’

    형우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혼자만 사기 아이템을 쓰면서 레벨업을 쭉쭉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템을 회수해 가겠다는 운영진의 선언을 들은 느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