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야, 일단 써 봐. 다 쓰면 말해 줄게.”
약간 미심쩍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형우는 계속해서 글을 써 내려갔다.
‘헤럴드의 말에 감동받은 베아트리체는 결국 복수를 포기하게 되고… 헤럴드와 끌어안고 진한 키스를 하면서….’
소설은 구상한 대로 쭉쭉 나왔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5500자를 가득 채운 <전설의 보안관> 226화가 완성됐다. 천우희가 조언했다.
“이제 작가 모드는 끄고, 독자 모드 켜. 그리고 다시 읽어 봐.”
“네.”
형우가 눈을 감고 두뇌를 환기시켰다.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덜어내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루틴이었다. 잠시 후, 눈을 뜬 형우가 자신이 쓴 로맨스로 시선을 돌렸다.
‘…응?’
읽자마자 감탄사 대신 의문사가 먼저 튀어나왔다.
‘뭐야, 헤럴드가 왜 이렇게 말하지? 헤럴드는 베아트리체의 복수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할 리가 없어.’
‘게다가, 마지막의 뜬금없는 고백은 뭐지? 이런 건 B급 감성이라고도 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고민하는 형우의 귓가로 천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안 됐지?”
“그러네요. 왜 그러죠?”
“캐릭터의 감정선이 빈약해서 그래. 앞부분을 봐.”
천우희는 베아트리체와 헤럴드가 서로 총을 겨누는 부분을 가리켰다.
“이 부분은 아주 격정적이잖아? 그런데 마지막 부분을 봐. 베아트리체가 갑자기 총을 늘어트리고 눈물을 터트리잖아? 이 감정의 폭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렇네요.”
“액션에서 중요한 게 스토리의 개연성이라면, 로맨스에서 중요한 건 감정의 개연성이야.”
전문 용어로는 핍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끔은 핍진성이 개연성을 이겨. 카뮈가 쓴 <이방인>알지?”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라는 도입부로 유명한 카뮈의 <이방인>은 살인자 뫼르소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뫼르소는 아랍인 한 명을 총으로 쏴 죽여 기소된 후, 법정에서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아랍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어떻게 보자면, <이방인>의 스토리적 개연성은 빵점이지. 하지만 말야,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개연성을 별로 생각하지 않아. 왜일까?”
“핍진성이 충만하기 때문이군요.”
핍진성, 그 단어를 뇌리에 각인시킨 형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느낌인지 알았어요. 다시 한번 해 볼게요.”
형우는 지난 시간 동안 열심히 쓴 5,500자를 미련 없이 지웠다. 손가락이 다시금 자판 위를 누볐다.
‘이번에는 집중하자.’
다시, 베아트리체와 헤럴드가 마주하는 장면에서 고민했다.
‘헤럴드는 베아트리체의 복수심을 알아. 그렇다면….’
잠깐의 고민이 끝난 후, 형우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베아트리체. 네 맘대로 해. 나 또한 복수가 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고백 부분을 지우고 그렇게 고쳤다. 감정선과 핍진성. 그 두 가지의 키워드를 끊임없이 떠올리면서, 문장 뒤에 문장을 이었다.
‘게다가, 헤럴드의 감정만 중요한 게 아냐. 베아트리체의 감정도 중요해. 감정이란 건 일방적인 게 아니니까.’
그렇게, 베아트리체에 대한 묘사를 추가했다. 너무 과하지는 않게, 300자 정도로 문장을 압축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은근하게 얼굴을 붉히며 고백하는 거야.’
대놓고 ‘사랑해’ 라던가, ‘좋아해’라는 단어를 넣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은근하게.
[…나중에 네 고향에도 한번 가 볼까. 둘이서 말야.]
이 정도 느낌이 딱 좋았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소설에 몰두하기를 어연 두 시간. 또다시 5,500자의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엔 표정이 좋은데?”
“한번 읽어 보실래요?”
“그러지 뭐.”
형우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새로 쓴 소설을 천우희에게 내밀었다.
별로 기대는 안 했다. 방금 개판을 쳤는데, 뭔가 깨달았다고 해도 순식간에 변하지는 않을 테다. 아마 앞으로 몇 달간은 더 숙련돼야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응?’
소설을 읽는 천우희의 마우스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액션의 재미가 긴박한 속도감이라면, 로맨스의 즐거움은 은근하게 느껴지는 포근한 감각이다.
‘…엄청나게 노련하지는 않아. 하지만, 촌스럽지도 않아. 그러니까….’
풋풋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촌스러움과 풋풋함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단어지만, 그 뉘앙스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확실하게 좋아졌어.”
천우희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갈등에 비해 지나치게 쉽게 끝난 느낌이 좀 들기는 하네. 갈등을 좀 심화시켜 보면 어떨까?”
“다음에는 그렇게 해 볼게요.”
“바로 지원 언니한테 보낼 거야?”
“아니요.”
형우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감 잡았으니까,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천우희 작가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좀 보여주고 싶고요.”
그렇게 말하며, 형우는 새롭게 쓴 전설의 보안관 226화를 몽땅 다 지웠다. 천우희가 아깝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충분히 잘 쓴 것 같은데, 또 고치려고?”
“에이. 제가 아깝다고 독자들한테 덜 좋은 걸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너는 진짜….”
천우희가 뭐라고 하려다가 멈췄다. 어떻게 보면, 형우의 태도는 작가로서 당연한 거였으니까.
1등이 목표라는 것은 말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형우는 진짜로 굶주린 것처럼 소설에 달려들었다.
‘…이러다 진짜 1등 뺏기겠는데?’
그런 경각심을 느끼며, 천우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우가 물었다.
“어라? 어디 가세요?”
“너만 소설가니? 나도 글 쓰러 갈 거야.”
“어어, 받기만 하고 보내기는 좀 그런데.”
“됐어. 나중에 내가 부탁하면 그때 나 좀 도와주던가.”
쿨하게 대답하는 천우희를 향해, 형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알겠습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 * *
C&N의 장르소설 편집부.
“으윽.”
지원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빈 캔커피를 홀짝거렸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마신 커피가 다섯 개가 넘었다.
“…일이 너무 많아.”
수석 편집자인 지원은 기본적으로도 관리하는 작가들이 많은 편이었다. 거기에 요즘에 공모전이니, 웹툰 제작 프로젝트니 하는 것들까지 겹쳐버리니, 과장 조금 더해 자판기에 커피 뽑으러 갈 시간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서 수석님. 아직도 일 안 끝나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발랄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것은 편집부의 막내인 정윤진이다. 손에는 따뜻한 캔커피가 두 개 들려 있었다. 윤진은 그중 하나를 퐁, 하고 따서 지원에게 내밀었다. 지원이 씩 웃으면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윤진 님도 좀 바쁘죠?”
“헤헤. 이번에 담당 작가 세 명 새로 배정받았잖아요.”
윤진도 꽤 경력이 쌓여서, 최근에는 작가들을 케어하는 임무를 받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힘들죠?”
“힘들긴 한데, 즐겁기도 해요.”
“후우. 저도 좀 즐거웠으면 좋을 텐데.”
“에엥? 수석님 요즘 엄청 잘 나가시지 않아요?”
윤진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이번에 참새치 작가님 런칭도 10위권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리턴 투 디재스터>도 증쇄 들어갔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맞는데, 뭐랄까… 작가님이 욕심이 너무 많다고 할까요.”
지원이 말하는 작가님은 당연히 형우였다.
“방금 천우희 작가님이랑 통화했는데… 오늘도 천우희 작가님을 만나서 로맨스를 배우고 갔다네요.”
“와, 진짜 열심이시네. 대부분 작가님들은 그날 원고 쓰기도 바쁘실 텐데….”
“열정적인 거야 좋은데… 괜히 작품 망가지지나 않을까 걱정이에요.”
한숨을 쉬는 지원을, 윤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뭐야, 행복한 고민 중이셨네. 적어도 참새치 작가님은 펑크내고 도망가시지는 않잖아요?”
윤진의 말이 맞기는 했다. 펑크내고 도망치는 작가나, 아예 대충 휘갈기는 작가들도 종종 있었다. 그에 반하면 지원의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법도 했다.
“그래도 좀, 편집자로서는 걱정이 된다는 거죠. 괜히 독자 떨어져서 실망하지는 않을까.”
그런 마음에, 오늘 아침 형우에게 잠깐 쓴소리를 했다.
갑작스러운 장르 변경은 위험부담이 크다느니, 지금도 잘 되고 있는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어떻겠냐느니- 하는 원론적인 말들이었다.
꼭 필요한 말들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작가에게 쓴소리를 하게 되다니.’
그게 얼마나 속이 쓰리던지.
오늘 지원이 퇴근도 안 하고 하루종일 일에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원은 고민이 생겼을 때, 그걸 잊어버릴 정도로 뭔가에 몰두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이 건은 끝냈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음 업무로 넘어가려던 순간,
위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편집장인 공판석이었다.
“네. 서지원입니다.”
“서 수석, 지금 회사야?”
“네. 밀린 작업 좀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거 지금 당장 그만두고, 병원부터 가.”
지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원은 왜요?”
“뭐야, 아직도 이야기 못 들은 거야?”
답답해 죽겠다는 듯, 판석이 소리쳤다.
“지금 김형우 작가 쓰러져서 입원했다고!”
“네?”
지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갑자기 입원이라니? 당황한 지원의 귀에 판석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방금 작가님 어머니한테 연락 왔어. 담당 편집자가 되어서 그런 것도 모르면 어떡해? 그러다가 우리 편집부에 정떨어지면 자네가 책임질 거야? 당장 뭐라도 들고 찾아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뚝 하고 끊겼다. 옆에서 대화를 다 들은 윤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원을 바라봤다.
“김형우 작가님, 입원하셨대요?”
“네. 그렇다네요.”
“지금 바로 가세요. 서 수석님 일은 제가 대신 하고 있을게요.”
“…부탁드려요.”
재빨리 윤진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후, 지원은 채비를 마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괜찮으셔야 할 텐데….”
떠나는 지원의 모습을 보며 윤진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서 수석님 작업 완료해야지!”
그대로 윤진은 자리에 앉아 지원의 노트북을 켰다. 편집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작품은 총 세 개였다.
<너무 양심적인 보험 설계사 270화>
<영웅은 너무 어려워! 18화>
<전설의 보안관 226화>
본래는 순서대로 처리하는 게 원칙이지만, 방금의 소동 탓에 윤진은 자신도 모르게 전설의 보안관을 먼저 클릭했다.
“…로맨스라고 했지?”
지원의 말에 의하면, 아직 배운지 얼마 안 돼서 미숙하다고 했었다. 윤진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은 채로, 전설의 보안관을 확인했다.
“…뭐야, 이거?”
윤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사건 사이에서 고민하는 헤럴드와 베아트리체.
그 위기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두 사람의 풋풋한 분위기에서는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봤을 때는 뒤통수에 망치라도 맞은 듯한 커다란 카타르시스가 주르륵, 흘러넘쳤다.
딸칵, 딸칵, 딸칵.
정신없이 장면을 넘기던 윤진은, 더이상 넘길 페이지가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내 생각에는 완벽한데, 이게 미숙하다고?’
몇 번이나 봤지만, 구상이나 내용의 문제는커녕 그 흔한 오탈자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숙하지 않았으니까.
‘…서 수석님이 틀렸을 리가 없는데? 혹시 내가 미숙해서 못 찾아내는 건가?’
하지만, 그걸 모르는 윤진은 가련하게도 흠이 없는 소설에서 흠을 찾기 위해 팔자에도 없던 초과근무를 여덟 시간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