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47화 (47/200)
  • #46.

    그렇게 한참을 투닥거리는 사이, 주문했던 음료가 먼저 나왔다.

    “허브티부터 드리겠습니다.”

    허브티에는 마그네슘과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사람의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투닥거리는 게 멈췄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보며 피식거렸다.

    “…이상하게 너랑만 있으면 나까지 유치해 지는 느낌이란 말야.”

    “제가 할 말이거든요.”

    “그나저나, 뭐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어제저녁, 형우는 천우희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으니 내일 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게 들려서, 천우희는 일단 오케이를 했다.

    “전화로는 힘들고 꼭 만나서 해야 할 말이라는 게 뭐야?”

    “그게 말이죠, 천우희 작가님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물어보고 싶은 거? 뭔데?”

    형우가 잠깐 우물쭈물했다.

    “저 혹시… 사랑이 뭔지 좀 아세요?”

    “에, 푸흡!”

    천우희의 입에서 무지개가 생겼다.

    “뭐, 뭐라고?”

    허브티로 진정시키기에는 너무 빡센 발언이었다.

    * * *

    최근 바쁘긴 했지만, 형우가 그렇다고 본업인 소설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늘 짬짬이 시골의 작업실 안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흔들리지 않고 작업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흔들렸다.

    “…오늘따라 기차가 좀 많이 흔들리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형우는 휴대폰을 들어 최신화의 댓글을 확인했다.

    파파푸페 : 와 진짜 헤럴드 미쵸… 완전 설렌다.

    가면라이더 : 베아트리체코인 떡상이다!

    플러리 : 제발 캐서린 제발!

    멍애(외교관) : 캐서린이 갑이지.

    하꼬인생 : 진짜 캐알못들인가; 베아트리체 미만 잡인데.

    천우희의 조언을 받아 소설 속에 새로운 서브 히로인인 캐서린을 추가한 이후부터, 댓글창에서는 심심치 않게 독자들이 두 히로인으로 갑론을박을 벌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현주면주 : 캐서린은 헤럴드한테 칼 휘둘렀는데 왜 히로인이냐?

    박수무당 : 베아트리체는 헤럴드한테 총 쐈는데?

    목마망 : 이 정도면 헤럴드가 스톡홀롬 신드롬인 듯;

    댓글이 늘어난다는 건, 곧 작품에 대한 관심도가 늘어난 것과 같은 뜻이었다. 성적도 따라 올랐다. 달피아도 독자들이 붙었지만, 그보다 더 도드라지는 건 네이비 시리즈와 커피콩 페이지의 순위였다.

    ‘네이비 시리즈 9위… 드디어 한 자릿수에 들어왔어!’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전설의 보안관>은 두 플랫폼 모두에서 20위 언저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엄청 나쁘지는 않지만, 엄청 좋다고도 할 수 없는 성적이었는데.

    로맨스 요소를 도입한 후에 순위가 갑자기 두 배 정도로 훌쩍 뛰었다. 심지어 커피콩 페이지에서는 그보다도 더 높은 8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역시, 답은 로맨스였어!”

    지표를 천천히 살펴보던 형우가 쾌재를 불렀다. 로맨스를 추가하기 전까지 <전설의 보안관>의 독자 비율은 9대 1 정도였다. 1이 여성 독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성 독자가 늘어 비율이 거의 7대 3까지 올라왔다. 순위 상승은 여기서 비롯된 것 같았다.

    시장이 바뀌면 상품도 바뀌어야 한다는 맥도날드의 오랜 명언은 오늘도 또 1승을 거뒀다.

    달피아에서 1위.

    커피콩페이지에서 8위.

    네이비시리즈에서 9위.

    <전설의 보안관>의 최근 성적이었다.

    ‘…왜 9위에서 멈췄지?’

    처음에는 10위 안에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10위안에 들게 되니까 ‘10위 안에 들었어, 오예!’가 아니라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형우를 아는 사람들은 형우가 욕심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다. 형우도 사람인 만큼 욕심은 있다. 다만 그 방향성이 남들과는 좀 다를 뿐이었다.

    남들이 10의 욕심을 연애 욕심 1, 돈 욕심 1, 꾸미는 데 1, 노는데 1…. 이런 식으로 분배한다면, 형우는 그 10의 욕심을 몽땅 글에 때려 박은 것뿐이다.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형우는 댓글 창을 살폈다.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었지만, 형우가 목적은 90개의 칭찬이 아니라, 숨어 있는 10개의 비판이었다.

    그리고 그 비판들 중에서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는 비난을 빼고 나니, 딱 댓글 세 개가 남았다.

    도깨비3 : 이 작품 로맨스 좋다는 사람들 이해가 안 되네. 진짜 밋밋한데.

    시크릿가든 : 가끔 여캐가 여캐라는 느낌이 안 듬. 갈등도 뭔가 밍숭맹숭하고.

    미스터션샤인 : 작가님 로맨스 공부 좀 더 하셔야 할 듯^^!

    ‘…역시.’

    로맨스 덕에 9위까지 올라왔지만, 아직은 어정쩡한 겉핥기 수준이라는 게 문제였다.

    ‘결국 이걸 어떻게든 뚫어야 하는데….’

    그 순간 형우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바로 천우희였다. 로맨스의 여왕인 그녀라면, 분명 적당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아니라 편집자인 지원 언니한테 물어보는 게 맞는 거 아냐?”

    천우희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본래 작가의 소설에 대한 상담은 편집자에게 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은 해 봤는데… 결과가 별로 안 좋더라고요.”

    “언니가 뭐라고 했는데?”

    “굳이 로맨스를 넣어야 하냐고….”

    굳이 로맨스 없어도 잘 가고 있는 작품에 굳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서 로맨스를 넣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게 편집자인 지원의 의견이었다.

    편집자의 의견이자, 동시에 정론正論이랄까.

    “으음, 내 생각에도 지원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천우희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소설이라는 게 RPG 게임처럼 장비 많이 낀다고 능력치 올라가는 게 아니잖아? 로맨스 넣는다고 더 올라갈 거라는 보장은 없어. 안 올라가기만 하면 다행이지, 그러다 실패해서 작품 말아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안 무서워?”

    “무섭죠.”

    형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우희 작가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지금 그대로 쓴다고 해도 <전설의 보안관>은 성공할 거예요. 어쩌면 다음 작품도 성공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다다음 작품도 성공할까요?”

    문창과에서 4년을 수학하며, 형우는 몰락한 작가들을 너무나도 많이 봤다.

    “처음에는 괴물 신인이다, 대형 작가다 하면서 문단의 각광을 받던 사람이, 어느 순간 모두에게 잊혀 버려요. 그런 작가도 있었나? 하면서.”

    첫 작품으로 대박을 친다.

    새로운 도전을 했다가, 실패한다.

    그래서 다시 첫 작품을 흉내 내 중박 정도를 친다.

    그리고 또다시 첫 작품을 흉내 낸 두 번째 작품을 흉내 내는….

    “자기복제의 딜레마.”

    천우희가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형우를 만나서 쓴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도 똑같이 자기복제의 딜레마에 빠져 도전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점점 잊혀 가는 작가가 되고 말았을 테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네. 작품이 실패하는 것도 무섭지만, 저는 아무래도, 독자들에게 잊혀지는 게 더 무서운 것 같아요.”

    만족하는 순간 발전은 끝이다. 그런 뜻이었다.

    ‘발전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

    예전에 들었던 고등어와 상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등어는 성질이 급해서, 수조에 넣어 이송하면 그중 절반 정도는 죽어 나자빠진다고 한다. 그 탓에, 예전에는 바닷가가 아니라면 고등어를 회로 먹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고.

    그 문제를 안타까워하던 한 수산업자는 고민 끝에 아이디어를 하나 내놓았다. 고등어 수조에 상어 한 마리를 넣어 놓는다는 게 그 내용이었다.

    수조에 포식자가 들어오자, 고등어들은 위협을 느끼고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쳤고, 살아남았다. 그중 몇 마리는 상어에게 잡아먹혔지만 그렇게 잡아먹힌 고등어보다 살아남은 고등어의 수가 더 많았다는 이야기다.

    어릴 적 자기계발서에서 수십 번이나 읽었던 이야기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어가 없는 안온한 삶을 꿈꾼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형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신 또한 위협 없는 세계에서 천천히 잊히기를 기다리는 신세였을 것이다. 천우희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너, 목표가 뭐라고?”

    “이왕이면 네이비 시리즈랑 커피콩 페이지에서도 1등을 하는 거?”

    “그 1위가 나인 건 알고 하는 소리겠지? 선전포고 잘 들었어.”

    “헉.”

    당황하는 형우의 앞에서, 천우희가 능숙한 손짓으로 볼펜을 휘리릭 돌렸다.

    “걱정 마. 라이벌이라고 대충 가르치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천우희도 이제는 상어의 소중함을 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눈앞에 있는 이 소설밖에 모르는 멍청이야말로 소설이라는 세계 속에서는 최고의 상어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뭐든지 해 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쉽지는 않을 거지만, 내가 좀 도와주지.”

    “고마워요, 천우희 작가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형우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 * *

    “로맨스의 구도는 알지?”

    “당연하죠.”

    로맨스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불안과 확인의 서사다.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행동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을 극대화하는 식으로 극이 진행된다. 마음에 들었다는 듯, 천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름은 비슷하지만 로맨스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드라마와는 확실하게 다르지.”

    로맨틱 코미디가 갈등과 화해의 서사라면. 로맨스는 불안과 확인의 서사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면 로맨스인 것이고, 가치관이 정반대인 한 커플이 서로 신랄한 비판을 내뱉으며 대판 싸워댄다면 그건 로맨스 코미디라는 거지. 그리고 멜로는 이것보다 더 복잡해.”

    로맨스와 로맨틱 코미디가 개인과 개인의 갈등이라면, 멜로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다룬다. 주로 사회적인 여건에 의해 맺어지지 못하는 커플이 등장하며, 캐릭터 자체보다는 그 억압적인 사회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멜로, <한여름 밤의 꿈>은 로맨스, <사랑의 블랙홀>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거죠.”

    천우희가 만족한다는 듯이 웃었다.

    “…장르라는 게 그렇게 딱딱 나눠지는 건 아니지만, 대충 맞기는 해.”

    미리 예습이라도 해 온 것인지, 형우는 천우희의 말을 마치 스펀지처럼 쏙쏙 빨아들였다.

    “이론은 이 정도면 됐고, 이제 직접 써 보는 걸로 할까?”

    “넵.”

    형우는 그대로 노트북을 열어서, 어제 쓰다가 막힌 부분을 화면에 띄웠다.

    <전설의 보안관 226화>

    베아트리체가 헤럴드와 여행하는 이유는, 과거에 자신의 부모를 죽인 강도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베아트리체의 부모를 죽인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떡밥은, <전설의 보안관>이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커다란 의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마침내,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자가 살고 있다는 마을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그 범인의 존재를 은폐하고 있었던 것. 고민하던 베아트리체는 결국 그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범인을 숨겨주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겠어? 공범이야. 그리고 개척지의 법은 공범도 함께 교수대에 매달지. 교수대로 가느냐, 내 총알에 죽느냐, 그 차이일 뿐이야.]

    그렇게, 복수심에 사로잡힌 베아트리체를 헤럴드가 막아서는 장면까지가 저번 화의 주된 내용이었다.

    “여기를 기점으로 해서, 헤럴드와 베아트리체의 썸 관계가 끝나고 확실한 로맨스 노선으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으음… 스토리는 괜찮네.”

    지금까지 깔아놓은 감정적인 사건들도 충분했고, 갈등의 활용도 또한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이윽고, 형우의 열 손가락은 상어에게 쫓기는 고등어 떼처럼 자판 위를 누볐다.

    [베아트리체, 아무리 그래도 네 행동은 용납할 수가 없어. 죽일 사람은 하나인데, 죽을 사람은 너무나 많잖아.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널 너무 좋아해. 네가 망가지는 걸 볼 수가 없어.]

    …기세에 비해 결과물은 형편없었다.

    “으악!”

    촌스러운 대사를 보다 못한 천우희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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