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45화 (45/200)

#44

정승록의 프로페셔널한 진행 덕분에, 촬영은 빠른 속도로 정상적으로 재개될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딱히 외적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안쪽에서 문제가 터졌다는 뜻이다. 촬영이 재개된 뒤 세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흐음… 이게 아닌데…….”

정승록이 화면을 바라보며 긴 턱수염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 말 한마디에 방금까지 밝았던 촬영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고민을 할 때 그게 입으로 다 튀어나오는 타입인 것 같았다.

‘…아이고.’

그런 상황이니, 형우마저도 소설 집필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던 정승록은 결국 안 되겠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회의 좀 합시다!”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형우네 집 거실에 둘러앉았다.

평소에는 시골에 지어진 집답게 좁다는 느낌은 별로 없는 거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장비에 둘러싸이니 처음으로 좁은 느낌이 났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 푸짐한 수박 화채까지 잔뜩 놓여 있으니, 누가 언뜻 본다면 축제라도 벌이고 있나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는,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이었다.

아이디어의 장례식.

“시골이니 쌀알은 어떨까요? 쌀은 갈색이고, 동그랗기도 하잖아요. 약간 귀농 작가 컨셉으로.”

“귀농을 컨셉으로 하기에는, 형우 작가님 이미지랑 너무 잘 안 어울려요. 뭣보다 귀농하신 분도 아니잖아요.”

몇 가지 의견이 나오긴 했지만, 그대로 모두 땅에 묻혔다. 정승록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뭔가… 확! 하고 와 닿는 게 없네.”

회의는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사람들이 점점 지쳐가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낌새를 눈치챈 정승록이 입을 열었다.

“…좀 쉴까요. 천년만년 회의해서 될 것도 아니고, 쉬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날 수도 있으니까.”

“휴우!”

정승록의 말에 거실에 모였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회의 내내 부엌에 앉아서 이쪽을 힐끔거리던 어머니가 살그머니 다가왔다.

“형우야, 회의 끝난 거야?”

“네. 조금 쉬기로 했어요.”

“어휴, 무슨 회의가 그렇게 살벌해.”

“다들 좋은 거 만들고 싶으니 그런 거죠. 그런데 갑자기 왜요?”

“그게 말이다.”

어머니가 문 바깥쪽을 힐끔 쳐다봤다.

“아까 쩌어기에서 왠 여자 한 명이 널 찾더구나. 회의 끝나면 알려달라고 하기에, 그러겠다고 했지.”

“여자요? 어디에 있는데요?”

“정자라고 말하면 알 거라던데.”

“아.”

누군지 감이 왔다.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30분 정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저희도 마침 쉬려던 차니까요. 너무 늦게만 안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정승록에게 양해를 구한 뒤, 형우는 그대로 문밖으로 나갔다.

* * *

형우는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기에요, 여기! 작가님!”

멀리서 누군가가 형우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역시.’

이 시골까지 형우를 찾아올 여자라고 하면, 한 명밖에 없었다. 형우의 편집자인 지원이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 전에… 일단 이것부터 받아요!”

지원은 커다란 박스 두 개를 형우에게 내밀었다.

“이게 다 뭐예요?”

“이번에 <전설의 보안관> 1등 했잖아요. 출판사 쪽에서 주는 선물이랄까요? 하나는 오가피고 하나는 녹용인데, 녹용은 형우 작가님 드시고 오가피는 어머니 드리세요. 형우 작가님은 차가운 체질이고, 어머니는 따뜻한 체질, 맞죠?”

얼마 전에 지원이 전화해서 형우의 체질을 물어보기에 조만간 뭐가 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어머니 선물까지는 짐작도 못 했다.

“어머니 선물까지… 고맙습니다.”

“작가님 어머님 나이대가 딱 호르몬 걱정할 때잖아요. 오가피가 호르몬에 좋은 건 아시죠?”

“처음 알았는데, 새겨 둘게요.”

“후훗, 그런 거 하나하나가 센스라니까요. 완전 마음에 들죠?”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하면서 수십 명의 작가에게 수백 개의 선물을 보내 본 경험 덕분에, 지원은 선물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선물에는 감동이 필요하고, 감동은 디테일과 서프라이즈에서 오는 법!’

그것이 지원의 오랜 선물론膳物論이었다. 그 감동을 위해서, 지원은 작가의 체질부터 가족 약력까지 몽땅 다 꿰고 다녔다.

“이거 전달해주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아뇨. 원래는 오늘 민준 작가님이랑 차기작 때문에 미팅 있었거든요.”

<리턴 투 디재스터>의 완결 이후 민준은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조언을 구하기 위해 지원을 부른 모양이었다.

“대체역사물이랑, 탐정물이랑, 로맨스 구상하셨더라고요.”

“로맨스요?”

“아, 혹시 이야기 들으셨어요? 중년 남녀 간의 로맨스라던데.”

그 말을 말을 듣는 순간 형우는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딱 봐도 우리 엄마 이야기잖아.’

삼촌도 참 주책이다 싶었다.

“그나저나, 작가님. 잡지 촬영은 좀 어때요? 잘 돼가고 있어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잘 안 되네요. 작업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는 하는데, 사실 작업도 어려워요. 누가 쳐다본다고 하니까 집중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저런… 소설이었으면 제가 뭐라도 도움을 드릴 텐데, 잡지는 잘 안 읽어서.”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후우, 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30분 쉬고 나서, 다시 들어가서 회의해야 해요. 좋은 게 나오면 좋을 텐데.”

“아, 그러면 가시기 전에 말 하나만 더 할게요. 형우 작가님, 저번에 저한테 개인적으로 부탁하셨던 거 있잖아요. 자취방 구해 달라는 거.”

“맞다, 그랬었죠.”

경황이 없는 탓에 잊고 있었다. 며칠 전, 지원과 이야기하던 도중 우연히 자취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슬슬 복학도 해야 하니 방을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편집자님 아시는 분께서 중개업을 하신다고 하셨죠?”

“네.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왔거든요. 쓸만한 매물 몇 개 추려 놨다고요. 언제쯤 시간이 되실까요?”

“흐음… 지금은 좀 바빠서요.”

“그분 말로는 너무 좋은 집이라 금방 나갈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오늘도 한 팀이 보고 갔대요. 새로 결혼하는 부부라던데,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면서 새로운 집을 구한다나….”

“잠, 잠시만요.”

형우가 다급하게 지원의 말을 끊었다.

“방금 뭐라고 했죠?”

“방금이요? 그, 매물이 곧 나갈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다음에요.”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부부가 왔다 갔다는 거요?”

형우의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시작, 라이프스타일 잡지, 공간.’

누군가가 보기에는 연관 없어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이겠지만, 형우가 보기에 이것들은 장작과 부싯돌과 유황이었다.

그 단어들이 형우의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부딪히며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형우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그래… 답은 집이었어!”

형우는 별자리를 만드는 고대인들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하나의 심상으로 엮어냈다.

‘새로운 시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뭘까? 마음가짐? 꿈? 아니야, 제일 중요한 건 환경이야. 집중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공간, 새로운 집!’

형우는 그대로 냅다, 지원의 손을 붙잡았다.

“편집자님! 혹시 오늘 바쁘세요?”

“바, 바쁘진 않은데요, 왜 그러세요?”

“아까 물어보셨죠? 집 언제쯤 보러 갈 거냐고.”

뭔가에 홀린 듯, 형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오늘 바로 갑니다.”

* * *

“새로운 시작, 새로운 공간… 그거 괜찮은데요?”

형우의 이야기를 들은 정승록의 표정이 확 펴졌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혹시 생각한 게 더 있으신가요? 들어 보고 싶습니다.”

“물론이지요.”

이번 호의 테마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에 어울리는 컬러 테마는 싱그러움을 상징하는 구릿빛이었고 이미지 테마는 땀방울을 본뜬 동그라미와 투명한 느낌이라고 했다.

“일단, 갈색부터.”

형우는 자신의 목제 책상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작가의 방은 뭐가 될 수 있을까요? 일단은 작업실이죠. 글을 써야 작가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정승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우는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또한, 건강한 공간이기도 해야 합니다. 방에 오래 있는 직업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형우는 요즘 푹 빠져 있는 동그란 아령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방이니만큼 포근하고 안락한 공간이기도 해야 합니다. 동물은 그걸 표현하기 좋죠.”

그렇게 말하며 형우가 들고 온 것은 참치가 든 새장이었다.

“이 정도면, ‘투명하다’라고 할 수 있겠죠?”

“일과 휴식, 그리고 취미… 아!”

그제야 형우의 의도를 알아차린 정승록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야말로 ‘라이프스타일’이로군요! <요그>의 취지에도 잘 맞아요!”

형우의 설명을 다 들은 정승록은 거의 반쯤 감탄하는 표정으로 박수까지 짝짝 쳤다.

“형우 작가님, 진짜 최곱니다. 만약 잘나가는 작가가 아니었다면, 당장 잡지사로 섭외하고 싶을 정도예요.”

“뭐… 운이 좋았죠.”

“아닙니다. 로또 당첨되려면 일단 로또를 사야 하는 거예요. 운은 아무한테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작가님이 왜 그렇게 잘나가는지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예상치 못한 극찬에 얼떨떨해하는 형우를 뒤로한 채, 정승록이 소리를 빽빽 질렀다.

“다들, 담배 그만 피우고 이리로 와!”

창밖에서 도너츠를 누가 더 크게 만드나 내기하던 팀원들이 투덜거렸다.

“에이 씨, 반밖에 못 피웠는데.”

“저놈의 아이디어는 꼭 우리가 담배 피우러 나갈 때만 떠오르더라.”

“내가 보기에 정 팀장님 일부러 저러는 거야. 그나저나 내 도너츠가 제일 컸어. 다들 나한테 오천 원씩 입금해.”

“무슨 개소리야. 이따 한 판 더 붙어.”

재떨이 위로 장초長草들이 수북이 쌓였다.

* * *

“바로 이 건물입니다.”

서초에서 자그마한 복덕방을 운영하는 지원의 지인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집은 형우의 학교 근처에 위치한 투룸이었다.

“외관은 일단 합격이네요.”

최근 지어진 건물은 아닌 것 같았지만, 관리는 아주 잘 된 것처럼 보였다. 건물을 요리조리 살펴보는 형우에게 정승록이 따라붙었다.

“작가님, 혼자 사시는 걸로 아는데 원룸이 아니라 투룸을 구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서재를 두고 싶어서요.”

형우가 매일 책을 빌리러 가던 민준 삼촌네에는 거대한 서재가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가득 채워둔, 오직 책뿐인 방.

“예전부터 로망이었거든요.”

“역시, 작가님답네요.”

정승록이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제 수첩에 형우의 말을 받아 적었다.

‘내 말이 저런 데 적힐 정도인가…?’

약간 부담스럽다고 느끼면서, 형우는 그대로 방문을 열었다.

“와아.”

방을 보자마자 형우가 탄성을 질렀다. 방은 남향인 데다가, 근처에 커다란 건물도 없이 햇빛이 잘 들어왔다. 학교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30분이면 갈 수 있었고, 근처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했다.

“…가격이 얼마라고요?”

“천에 사십이요.”

“어라, 엄청 싼 거 아니에요?”

“게다가 빈 집이라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올 수 있죠.”

이 방에 오기 전에도 투룸 몇 개를 더 봤었다. 보증금은 다 달랐지만, 월세는 보통 70에서 80 사이를 오갔다. 그런데 40만 원이라니?

그 돈이면 고향에 내려가기 전 형우가 묵었던 반지하 방보다 조금 비싼 수준이었다. 그 방과 비교해보자면, 이곳은 베란다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부엌도 있었다.

뭔가 하자가 있나 싶어 한참이나 방을 뒤져봤지만, 딱히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 이리 싸죠?”

“……그게 말입니다.”

복덕방 아저씨가 고개를 숙여 형우에게 속삭였다.

“원래는 말 안 해주는 건데, 아는 분이 데려온 손님이니 특별히 말해 주는 거요. 사실 여기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좀 있어요.”

“귀신이요?”

“그래서 예전 사람이 꺼림직하다고 헐값에 내놓은 거예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디 가도 서울에서 이 돈으로 이 정도 집 못 구합니다.”

복덕방 아저씨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신이라니. 형우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좀 굴렸다.

집은 학교랑 가깝다.

하지만 귀신은 무섭다.

집도 엄청 좋다.

귀신은 안 좋다.

집이 엄청 싸다.

….

그다음으로 나오는 건 없었다. 장점은 세 개, 단점은 두 개.

돈 VS 귀신?

결과는 뻔했다.

“계약…… 할게요.”

분명 다른 사람이었어도, 안 사고는 못 배겼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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