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43화 (43/200)
  • #42.

    “애들아, 저녁 먹고 하자!”

    “넵!”

    작업실의 한 가운데서, 팀장의 목소리가 높게 울러퍼졌다. 의재는 그제야 한창 작업 중이던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서 재빨리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하고, 음식의 뚜껑을 열었다.

    오늘의 저녁은 돈까스였다.

    “히야, 이래서 배운 사람을 써야 돼. 봐봐, 깔끔한 거.”

    화실의 팀장이 그 모습을 보고 입에 발린 칭찬을 했다.

    “그나저나 의재 씨. 작업 어디까지 했어?”

    “그… 중간 부분까지는 했습니다.”

    “그래그래. 잘 했네.”

    팀장이 돈까스를 우물거렸다.

    “오늘까지는 스토리한테 넘겨 줘야 돼. 그나저나 스토리, 쟤는 뭐 하냐? 야, 스토리!”

    “예! 팀장님! 스토리 여기 있습니다!”

    “밥 안 먹냐? 우리가 다 먹는다?”

    “지금 가겠습니다!”

    이윽고, 스토리라 불린 남자가 후다닥 달려왔다.

    “스토리, 대체 뭘 하느라 밥도 안 먹어?”

    “아… 다른 작품 참고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는 무슨, 웹툰 보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그래,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팀장님, 그게… 웹툰이 아니라 웹소설 보고 있었습니다. <전설의 보안관>이라고.”

    “네?”

    의재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냈다. 스토리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뭐야, 의재 씨도 <전설의 보안관> 알아?”

    “네, 이름 정도는….”

    “뭔데, 뭔데, 재밌는 거야?”

    “팀장님도 시간 나면 꼭 읽어보세요. 진짜 끝내줍니다. 달피아에서 1등 하는 작품이에요.”

    “그렇게 재밌어?”

    “팀장님, 전에 제가 해 보라고 한 게임도 엄청 재밌게 하셨잖아요.”

    “…그 이야기는 그만해. 그 게임 하느라 빵꾸 내서 편집자한테 그날 뒤질 뻔했어. 그뿐이냐? 몰래 현질하다가 가계부에도 빵꾸 내서 집에서 쫓겨날 뻔했다.”

    “그만큼 재밌으시다는거죠. 아무튼, 제 말 믿어보시라니까요? 작가도 한국대 문창과라던데… 진짜 끝내줍니다.”

    “한국대 문창과?”

    돈까스를 꿀꺽 삼킨 팀장이 의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재 씨도 한국대 문창과 아냐?”

    “맞습니다.”

    “그러면 혹시 저 소설 쓴 작가랑 아는 사인가?”

    “에이, 팀장님! 설마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스토리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참새치같은 대단한 작가가 뭐 아무하고나 친하겠어요? 같은 대학이라고 다 친구면, 세상 빙글빙글 돌아 모두가 지구촌이게? 어때, 의재 씨. 내 말 맞지?”

    “그게 말입니다….”

    입 안에서 약간 쓴맛이 느껴졌지만, 의재는 내색하지 않고 대신 바보처럼 하하 웃었다.

    “선배님 말이 맞습니다. 멀리서 이름만 들었지, 그렇게 친하거나 한 사이는 아닙니다.”

    “역시! 사람은 원래 끼리끼리 노는 게 맞다니까요, 팀장니임!”

    스토리가 그대로 팀장한테 아양을 떨었다. 잘나가는 놈 재끼고, 못 나가는 놈 떨구고. 참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씁쓸하구만.’

    저런 말이 나올 줄 알아서 일부러 형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는데. 의재의 표정을 본 스토리가 한 마디 더 보탰다.

    “뭐야, 의재 씨 삐졌어?”

    이게 통쾌한 웹소설이라면 분명 스토리에게 한 방 먹여줬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의재는 재빨리 입꼬리를 움직여 바보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삐지긴요. 스토리 작가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래도 뭐, 저도 언젠가 성공하지 않겠습니까?”

    “거, 우리 의재 씨 그런 모습 너무 보기 좋아. 그나저나, 밥도 다 먹었는데 팀장님. 담배 한 대 어떻습니까?”

    “좋지, 의재 씨. 화실 좀 보고 있어.”

    “넵,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팀장과 스토리는 서로 낄낄거리며 방을 나가 버렸다. 텅 빈 화실에는 돈까스를 먹고 남은 쓰레기들이 그대로 남았다.

    ‘…후우.’

    의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서, 그 쓰레기들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정리하는데, 위에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토리, 너는 왜 말을 꼭 그렇게 하냐?”

    “…팀장님, 솔직히 말해서 어차피 끝까지 데리고 있을 거 아니잖아요? 지금부터 슬슬 정 떼야 한다니까요. 나가는 쪽한테도 그게 더 좋아요. 애초에, 이 좁은 화실에 네 명이나 있을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에휴. 모르겠다. 일은 또 열심히 한단 말야.”

    “…우리 팀장님은 늘 그게 문제라니까. 사람이 너무 좋아요.”

    “쉿, 의재 씨 들을라.”

    쉿, 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담배는 좀 멀리서 피우지. 냄새 들어오게….’

    그대로 쓰레기 옆에 주저앉은 의재는 휴대폰을 들어 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우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형우냐? 너 이번에 달피아 1등 했다며?”

    “뭐야, 소식 들었어?”

    “짜식, 그런 일 있으면 전화를 해야지. 축하한다.”

    “고마워, 나중에 밥 한번 살게.”

    “밥 말고 술로 해 줘.”

    “그러지 뭐. 그나저나 무슨 일 있어? 뭔가 목소리가 어두운 것 같은데?”

    쓸데없이 눈치 빠른 녀석이었다.

    “안 좋기는 무슨, 감기 걸려서 그래. 그나저나 너는 뭐 하고 있었어? 평소에는 작업 중이라고 전화 더럽게 안 받더니.”

    “아, 지금 백화점이야. 옷 좀 샀는데… 더럽게 무겁다, 아얏! 왜 쳐요?”

    “기껏 도와줬더니 옆에서 뒷담이나 까는 게 괘씸해서 그런다.”

    수화기 너머로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형우. 너 지금 여자랑 있어?”

    “어, 응. 맞아.”

    “뭐야? 여자친구라도 생긴 거야?”

    “여자친구는 무슨, 절대 아니야. 그냥 친한 작가님이야, 의재야. 미안한데 나 슬슬 끊을게. 지금 좀 바빠서.”

    “그래. 나도 슬슬 전화 끊어야 돼. 술 사겠다는 약속 잊지 말고. 수고해.”

    “그래, 너도.”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그 타이밍에 적절하게, 팀장과 스토리가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왔다.

    “흐음, 깨끗하니 좋네. 이래야 분위기가 살지.”

    팀장은 마음에 든다는 듯, 분리수거까지 끝낸 쓰레기통의 모습을 바라봤다.

    “슬슬 작업할까, 의재 씨도 충분히 쉬었지?”

    “…넵!”

    의재는 아까보다 훨씬 더 긴긴 노력 끝에, 겨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사실은 하나도 못 쉬었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 * *

    “뭔 일 있나….”

    의재의 전화를 끊은 후, 형우는 조금 고민했다. 본인은 감기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뭐 해? 안 따라오고?”

    그런 형우의 상념을 끊은 것은 천우희였다. 형우는 오늘 하루 종일 천우희와 함께 백화점을 누볐다. 인터뷰에 어울리는 의상을 세팅하기 위해서였다.

    “진짜로 옷이 이렇게 많이 필요해요? 전에 편집자님이랑 산 옷들도 있는데.”

    “그게 인터뷰하려고 산 옷은 아닐 거 아냐?”

    “그렇긴 해요.”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사진을 찍기 위해 입는 옷이랑 평상복은 완전히 다른 거야. 평상복은 깔끔해 보이며 그만이지만, 사진은 임팩트가 있어야 하거든. 연예인들 옷 입는 것만 봐도 알잖아. 이거 좋다, 한번 써 볼래?”

    천우희가 내민 것은 18세기 프랑스 문인들이나 썼을 것처럼 생긴 체크무늬 빵모자였다.

    “이런 걸 어떻게 써요? 너무 과한데?”

    “이 정도면 수수한 편이거든? 연예인들 옷 입는 거 못 봤어?”

    “제가 연예인은 아니잖아요.”

    “혹시 알아? 네가 기안74같은 사람처럼 이 기회에 TV에 나올지? 오늘은 투덜거리지만, 인터뷰 날에는 날 찬양하게 될 걸.”

    형우는 긴가민가한 느낌을 받으며, 천우희에게 받은 모자를 뒤집어 가격표를 확인했다.

    “으에엑, 0이 여섯 갠데요?”

    “한번 입고 중고장터 올리던가. 아, 저기 아령도 있다. 아령도 사자.”

    “아령은 대체 왜요?”

    천우희가 형우를 위아래로 쭉 훑었다.

    “너, 어깨가 너무 좁아. 작가라고 매일 앉아만 있으면 골병 난다. 요즘 어깨 결리지?”

    “…어떻게 알았어요?”

    “목이 쏠렸잖아. 너 그거 가만 놔두면 거북목 된다. 집에서 아령도 좀 하고, 스트레칭도 좀 해. 아니면 아예 나처럼 필라테스 끊던가. 그러다 몸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렇게 한바탕 백화점을 뛰어다니니, 어느새 여섯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역까지 바래다줄까?”

    “아니에요. 뭐, 택시 타고 갈게요. 지금 퇴근길이라 차도 막히잖아. 오늘 수고하셨어요.”

    형우는 천우희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천우희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뭘 이런 걸 갖고. 조심히 들어가. 옷 비싼 거니까 꼭 끌어안고 가고.”

    “네, 고마웠어요.”

    “고맙긴 무슨, 친구라며?”

    “…네?”

    “아까 전화할 때 그러더만. 친한 작가님이라고. 에헹,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친하다고 해줄 순 있지.”

    “아니 그건….”

    “아니 뭐? 그러면 나랑 안 친해? 안 친한 작가님인데 친구한테 친하다고 거짓말한 거야? 왜?”

    천후의가 장난스럽게 콕콕 쏘아붙였다. 형우가 쩔쩔매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택시가 끼익, 하고 멈췄다.

    “…택시 왔다! 들어가 볼게요.”

    “너 아직 대답 안 했거든! 친해, 안 친해!”

    “친해요, 됐어요?”

    “응. 됐어.”

    천우희가 짓궂게 씨익 웃었다.

    “잡지 촬영 잘하고, 인터뷰 때는 내 이름도 꼭 말해야 된다? 천우희 작가님이 인생의 은인이라고, 그분이 나보다 글 백만 배 정도 잘 쓴다고 꼭 말하도록 해. 그리고 또….”

    “출발 안 할 겁니까? 신호 바뀌는데요?”

    택시 기사가 신호등을 보며 한소리를 했다. 헤어지기 전, 형우는 친해진 기념으로 천우희에게 선물을 하나 했다.

    “지금까지 말해야 말까 엄청 망설였는데요, 천우희 작가님.”

    “응?”

    “이빨에 고춧가루 끼었어요. 되게 큰 거.”

    “뭐,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줘?”

    “흐흐, 안녕히 계세요!”

    그 말을 끝으로, 택시는 출발했다.

    백미러를 통해, 호들갑스럽게 입속을 확인하는 천우희의 모습이 보였다.

    * * *

    “형우는, 뜬뜬, 오늘도, 뜬뜬, 열심히, 글을, 쓰네에…!”

    형우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작업에 열중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소설이 쭉쭉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또 언제 막힐지 몰라! 써질 때 쓰자!’

    보통 TV에서 등장하는 작가들은 늘 뭔가를 쓰고 있는 모습이지만, 실제로 작업을 해 보면 뭔가를 쓸 때보다는 오히려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로, 소설에도 기세라는 게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잘하면 한 달 내로 완결이 나겠는데.”

    형우는 <전설의 보안관>을 300화 정도로 완결지을 생각이었다. 이미 250화까지는 완성을 해서 보내 놨고, 이제 남은 건 50화 정도였다.

    지원은 작품이 잘 나가니 400화, 길게는 500화까지 늘여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지만, 형우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불가능해서였다. 애초에 300화도 초반 구상에 비하면 꽤 길어진 편이었다.

    ‘여기서 더 늘렸다가는, 이야기가 망가질 거야.’

    형우는 내심 400, 500화씩 연재를 하는 작가들의 구상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얼마나 부족한지도.

    ‘…지금은 300화로 만족하자. 괜히 용두사미로 끝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으끄그극…!”

    최근 형우의 글쓰기에는 루틴 두 가지가 추가되었다. 하나는 두 시간에 한 번씩 10분간 스트레칭을 하는 거였고, 두 번째는 하루 1시간씩 운동을 하는 거였다.

    ‘거북목이라고 했지….’

    이제 막 작가가 됐는데, 벌써부터 몸이 상하면 나중에는 정말로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운동이지만, 지금은 꽤 재미를 붙였다.

    “어제는 턱걸이로 등을 했으니까… 오늘은 덤벨로 어깨랑 팔 하면 되겠네. 일단 다섯 세트만 해 볼까….”

    형우는 자리에 앉아서, 그대로 덤벨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며칠 사이 조금 넓어진 어깨 위로, 땀 한 방울이 주륵,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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