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뵙네요.”
자신을 정승록이라고 밝힌 기자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한다은 교수님께 몇 번이나 부탁했거든요.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물론 교수님도 감사하고요.”
“뭘요. 커피 내올 테니, 이야기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며, 한다은 교수님은 그대로 안쪽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드르륵, 드르륵.
수제 핸드밀로 커피콩을 가는 소리가 교수실을 가득 채웠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승록이었다.
“혹시 저희 <요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당연하죠. 국내 최고의 패션 잡지잖아요. 패션이 너희를 삼키리라, 맞죠?”
정승록이 기분 좋다는 듯 허허 웃었다.
“사실 패션보다는 라이프 스타일 잡지에 가깝죠. 패션은 그 일부일 뿐이고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소설가의 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정승록의 설명에 의하면, <요그>는 패션 외에도 인테리어, 힐링, 인플루언서 등을 다루는 종합 라이프 스타일 잡지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소설가들의 밤>은 잡지를 즐겨 보지 않는 형우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로, 요즘 <요그>에서 가장 핫한 지면이었다.
“흐흐, 정기 구독은 안 하지만, 가끔 좋아하는 소설가가 나오면 찾아 읽었습니다.”
“좋아하는 소설가라시면…?”
“그, TV 자주 나오시는 문학타운 출판사 소속인 김형아 작가님이나, 이번에 영국에서 멘부커상 받으신 한강은 작가님 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역시. 문창과 다니시는 분이라 그런지 순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는 듯, 정승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트렌드가 바로 창작과 열정 아니겠습니까? 미술가나 영화감독도 좋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늘 소설가란 말이죠.”
영화나 미술은 일반 대중들이 꿈꾸기에는 너무 어려운 전문 분야다. 그에 비해 소설은 펜과 종이만 있으면 누구든 도전할 수 있다는 이미지가 있으니, 그런 달콤한 공상을 하는 사람이 좀 많은 모양이었다.
“저희 잡지를 읽은 적이 있으시다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김형우 작가님. <소설가들의 밤>에 출연할 생각 없으십니까?”
1초도 고민할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있어요. 할게요.”
놓친 줄알았던 교내 혜택들을 모조리 챙길 기회인데, 거절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제안이었다.
“…네?”
“한다고요. 꼭 하고 싶어요.”
형우의 적극적인 대답에, 오히려 정승록 쪽이 당황했다.
“…다른 작가님이랑은 다르시네요.’
“다른 작가님은 어떻게 하시는데요?”
“그… 왜 하필 자기냐고 물어보는 분도 계시고, 자기보다 더 좋은 작가가 많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예 자기가 하면 독자들이 관심이 없을 거라고 역으로 걱정해 주시는 분도….”
그 말을 들은 형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말을 하는 건 뭐랄까, 로또 1등 당첨된 사람이 로또 회사에 찾아가서 나는 이 돈을 받기 과분합니다!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게 아닌가.
그러다가 기자가 ‘그런가요? 그러면 더 좋은 작가를 찾아뵙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하고 진짜로 가 버리면?
그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더라도, 애초에 기자도 생각이 있으니 자신을 섭외한다고 한 것이다. 그 사람의 역량이라고 할까. 거기에 따져 묻는 건 말 그대로 ‘하필 저를 고르시다니, 당신 코 위에 달린 건 눈이 아니라 옹이구멍인 모양이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굴러온 복을 차다 못해, 복을 들고 온 사람의 면전에 싸커킥을 갈기는 꼴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지. 왜 나인지는 모르겠는데, 준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고, 예전에 천우희가 자기 자랑을 잔뜩 섞어 말한 적이 있었다.
‘망하면 걔네가 망하고, 흥하면 내가 흥하는데, 뭐하러 안 받냐? 멍청이 아니면 넙죽 받아야지.’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이야기는 끝났니?”
어느새 다가온 한다은 교수님의 트레이드 마크인 뿔테 안경에는 김이 뿌옇게 서려 있었다. 양손으로 들고 있는 머그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때문이었다.
“방금 뽑은 거니까 맛있을 거예요. 식기 전에 드세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어라?”
커피를 받아든 정승록이 코를 벌름거렸다.
“이 커피 혹시… 블랙 아이보리 아닙니까?”
“냄새만으로? 커피를 잘 아는 기자님이시군요.”
“와, 이 구하기 힘든 걸… 잘 마시겠습니다.”
오랜만에 커피 덕후를 만난 한다은 교수님이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정승록은 아예 음미하듯 눈을 감은 채, 감평을 늘어놓았다.
“…풀 내음이 나고, 과일 향도 나네요. 맥아랑 초콜릿 느낌도 있고요.”
묘사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요그>에 들어가기 전에는 <미슐랭 가이드> 같은 음식 잡지사에서 일했나 보다.
‘이게 그렇게 맛있는 건가?’
형우도 그 맛을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풀 내음이랑 과일 향은 잘 모르겠고, 초콜릿 느낌은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귓가로 정승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합이나 산도 자체가 아주 훌륭합니다. 코끼리가 아주 건강하고 많이 먹는 놈이었나 봅니다.”
“푸흡-!”
형우의 입에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커피, 블랙 아이보리가 확, 분수처럼 뿜어졌다.
“콜록콜록!”
“형우 작가님? 괜찮으세요?”
정승록이 놀란 듯 형우의 등을 두드렸다. 형우는 제발 아니길 기도하며 물었다.
“이거, 혹시 이것도 똥으로 만든 커피에요?”
“똥으로 만든 건 아니고 코끼리 똥에서 추출한….”
“그게 그거잖아요!” 왜 자꾸 똥으로 커피를 만들어요?“
아무래도 커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다.
* * *
형우는 카페에 앉아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잠시 후, 기다렸던 사람이 도착했다.
“무슨 일이야? 나를 다 보자고 하고.”
“아, 천우희 작가님.”
형우가 천우희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천우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음료부터 주문했다.
“으흠, 나는 차가운 아메리카노.”
“어라? 그 이것저것 막 집어넣은 풀옵션 라떼는 이제 안 드세요?”
“…그거 끊었어.”
괜한 허세에 찌들어 있던 과거를 떠올린 천우희의 표정이 부끄러움에 약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형우는 카운터에 가서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시고요. 커피 안 들어간 것 중에서 잘나가는 거 뭐 있죠?”
“저희 카페 홍차가 호평이 많습니다.”
“뭐, 똥이랑은 관련 없죠? 고양이라던지, 코끼리라던지….”
“…예?”
직원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아, 아닙니다. 따뜻한 홍차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빨대도요.”
천우희는 턱을 괸 채로, 형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주문이 그렇게 오래 걸려?”
“…조금 확인할 게 있어서요.”
잠시 후, 형우와 천우희는 음료를 두고 마주앉았다.
“여기 빨대요.”
“오, 센스 좀 있는데.”
천우희는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아메리카노를 쭈욱 빨아올렸다.
“흐응, 일단은 축하한다는 말부터 할게. 이번에 <전설의 보안관> 1등 찍었더라?”
“보셨어요?”
“메인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못 봐?”
이번에 형우가 한국대학교 학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전설의 보안관>의 순위는 갑자기 확 뛰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마침내 형우는 처음으로 달피아 실시간 1위를 찍는 기염을 터트렸다.
“…너무 우쭐해하지는 마. 그래도 커피콩페이지랑 네이빈시리즈에서는 내가 아직 순위 더 높아.”
“알죠. <망국의 테라피스트> 엄청 잘 나가던데요. 지원 편집자님도 그러더라고요. 하락세 들어간 작품이 갑자기 스무 계단이나 역주행하는 건 살다 살다 처음 본다고.”
소설계가 아니라 음악계에서도 드문 현상이었다. 형우도 지금까지 살면서 딱 두 번밖에 못 봤다. 엑시드랑 용감한소녀들, 딱 두 그룹.
“뭐어, 쉬운 일은 아니지. 나 정도 되니까 가능한 거야.”
“어련하시겠어요.”
사실, <망국의 테라피스트>의 역주행에는 알게 모르게 형우의 공로가 좀 컸다.
저번에 형우에게 일침을 들은 이후, 천우희 또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거다. 쇼핑을 끊은 게 그 시작이었다.
화려한 코트와 명품을 찾아다닐 시간에 다른 좋은 작품들을 찾았고, 피부에 돋아난 트러블을 신경 쓰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소설 속 고구마 하나를 찾아 없애는 데 시간을 들였다.
그 탓에 피부는 조금 안 좋아졌고, 머리는 좀 떡졌고, 옷은 어느 순간부터는 위아래가 죄다 시퍼런 추리닝만 입게 됐다. 드라마 속에서 흔히 묘사되는 소설가의 모습 그 자체랄까.
“많이 변했네요. 예전에 입던 옷들은 다 어디 있어요?”
“옷장에 처박아뒀어. 예전에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매일 입고 다녔는지 몰라. 불편하게.”
예전의 천우희가 명품을 둘둘 두르고 다니면서 히스테리를 부려대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악덕 편집자 메릴 스트립 같았다면, 지금의 천우희는 같은 작품에 나오는 꿈을 좇는 사회 초년생인 앤 헤서웨이를 더 닮았다.
“지금 모습이 훨씬 더 좋아요.”
“나는 원래 뭘 입든지… 응? 바, 방금 뭐라고…?”
갑작스러운 형우의 돌직구에 천우희는 좀 당황했다. 하지만 곧, 형우의 얼굴을 본 후에는 그 말이 노리고 한 여우짓 따위가 아니라 그냥 별 의미 없이 한 칭찬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오해할라.”
“무슨 오해요?”
“…에휴.”
천우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온 거야? 자랑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아, 제가 이번에 인터뷰를 할 일이 생겨서요.”
“인터뷰? 어디서?”
“혹시 <소설가의 밤>이라고 아세요?”
잡지의 제목을 듣자마자 천우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설가의 밤>이라고? <요그>에서 하는 그거 말하는 거 맞아? 정승록 칼럼니스트가 하는 거?”
“네, 그거요.”
“이런 미….”
“미?”
자신도 모르게 이런 미친, 이라고 외칠 뻔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까스로 말을 바꿨다.
“미… 미숙한 너라도, 슬슬 그럴 때가 됐긴 해! 뭐, 나는 몇 번이나 해 본 거지만, 몇 번이나.”
사실 이 말은 절반만 맞았다. 여기저기서 많은 인터뷰를 해 본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작게는 크리에이터들의 인터뷰부터 크게는 드라마에 관련한 방송국 인터뷰까지 해 봤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요그>같은 커다란 잡지사의 인터뷰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왜 내가 아니라 쟤야! 나는 5질 작가고, 쟤는 기껏해야 아직 하나도 완결 못 친 앤데!’
사실은 부러워 미칠 것 같았지만, 그걸 들키는 순간 왠지 형우가 ‘혹시 부러우신가요?’ 같은 말을 할 것만 같았다.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해!’
자신의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해, 천우희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별일이네. <소설가의 밤>에서 장르 쪽 작가 나오는 건 흔하지 않은데. 그것도 거의 유명한 중견 분들만 나오잖아. <문의 아이들> 쓰신 전영희 작가님이나, <시그널보내>랑 <왕국> 드라마 각본 쓰신 김운희 작가님 같은 분.”
천우희가 의아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지금의 형우는 세 개의 플랫폼에서 절찬리에 연재 중인 잘나가는 작가다. 하지만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아직 1질조차 제대로 완결짓지 못한 풋내기인 것도 맞았다.
전영희 작가나 김운희 작가와는 비교도 안 되고, 천우희와 비교해도 객관적으로는 밀리는 상황이랄까. 최고의 작가를 구한다는 거라면, 형우보다 나은 작가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운이 좀 좋았죠. 이번 테마랑 제가 잘 맞았거든요.”
“이번 호 테마가 뭔데?”
“새로운 시작.”
[신년에 뭔가를 시작하는 것은 너무 진부하다. 말년에 뭔가를 시작하는 것은 너무 피곤하다. 그러니, 뭔가를 시작하려면 1년의 중간인 지금이 제일 좋다!]
이번 <요그> 잡지의 테마였다. 애초에 정승록부터가 그 테마에 맞는 풋풋한 인재를 찾아보기 위해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에 참관했다고 들었다.
그러던 도중, 형우가 나이 든 중견 문인과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게 됐고, 거기에 꽤 많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천우희 작가님, 혹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내가? 뭘?”
“작가님은 인터뷰 엄청 많이 해 보셨다면서요? 저는 처음이라서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어엉?”
그 말을 듣는 순간, 방금까지 부러운 마음에 축 처져 있던 천우희의 입꼬리가 그대로 광대까지 올라갔다.
“너 진짜 잘 찾아온 거야! 이제 걱정하지 마. 걱정할 걱정도 하지 마! 나, 그 분야에서는 완전 전문가니까!”
천우희는 전문가라는 단어를 거듭 강조하며, 자기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