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40화 (40/200)
  • #39.

    “14만 6천 원입니다.”

    “…흐음, 캔콜라 하나에 2천 원이죠? 그거 두 개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15만 원입니다!”

    한다은 교수님의 말대로 정확히 15만원을 꽉꽉 채운 후에, 형우와 연수는 콜라를 홀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오십시오!”

    종업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들어올 때는 ‘이랏샤이마세’인데, 왜 나갈 때는 ‘다음에 또 오세요’야?”

    “저야 모르죠. 그런데 다음에 또 오세요는 일본어로 뭐예요?”

    “흠… 나도 몰라.”

    “교양 들었다면서요?”

    “졸았나 보지.”

    “학점은요?”

    “A+.”

    “와, 재수없어.”

    그렇게 투닥거리면서 여름의 밤을 걸었다. 그러던 중, 멀리서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어? 혹시 저 사람?”

    그중 한 명이 형우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그 사람 아냐? 오늘 강의했던 사람.”

    “참새치 작가? 맞는 것 같은데?”

    “대박, 대박, 가서 말 걸어 볼까?”

    그러더니 형우에게 다가와서 불쑥 물었다.

    “저기요… 혹시, 참새치 작가님 맞으세요?”

    “어, 예? 맞는데요.”

    “맞대! 애들아, 이리 와봐!”

    그 말과 동시에, 모여 있던 다른 두 학생도 쭈뼛거리며 형우에게로 다가왔다.

    단발머리 학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희도 한국 대학교 학생들인데… 작가님 말고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맘대로 하세요들….”

    “저 <전설의 보안관> 달피아 시절부터 계속 읽었어요! 오늘 연설도 감동적이었고, 마지막에 질문한 사람한테 일침 날리는 것도….”

    “완전 멋있었어!”

    반쯤은 자신에게 말하는 거고, 반쯤은 저들끼리 떠드는 자칭 후배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형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생각해 보니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싶었다.

    “저, 혹시 참새도 지금 있어요?”

    “미사역 드루이드가 선배님 맞아요?”

    “사진 찍어도 돼요?”

    질문이 한 번에 여러 개가 들어왔다.

    “참새는 과방에 맡겨두고 왔고요…. 미사역 드루이드는 저 맞아요. 사진은….”

    잠시 망설이던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찍으셔도 돼요.”

    “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학생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세 여학생이 형우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저것들이?’

    그 모습을 본 연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야, 쫌만 더 옆으로 가 봐. 다 안 나오잖아.”

    “어어, 내 얼굴 잘리잖아!”

    “누구 셀카봉 안 가지고 왔어?”

    여학생들은 형우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는, 저들끼리 밀치고 아주 난리가 났다.

    ‘어어? 저거 봐라?’

    특히 맨 처음에 형우한테 말을 걸었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제일 눈에 띄었다. 연약한 척하면서 은근슬쩍 형우의 어깨를 터치하고는 눈을 마주치려고 애를 쓰고 있지를 않나.

    “어머, 죄송해요. 작가님. 제가 몸이 좀 약해서….”

    “아닙니다. 괜찮아요. 하하.”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좀 약해서.”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귀밑머리를 넘기는 게,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하하?

    연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대놓고 여우짓인데, 왜 못 알아보는 거지?’

    남자든 여자든, 꼭 저런 애들이 있었다. 잘난 숙맥 옆에 달라붙는 인간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술기운이 돌아서 그런지 왠지 저런 눈꼴신 장면을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상했다.

    ‘하, 나도 많이 죽었나 봐.’

    그렇게 생각하며, 연수는 형우의 가슴팍에 닿기 직전인 여학생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사진 제가 찍어드릴까요?”

    “어머.”

    단발머리 여학생의 눈동자가 연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다 훑는 데에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머, 언니. 그러면 너무 고맙죠.”

    너 나이 들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연수의 손목에 힘줄이 빡, 하고 돋았다.

    * * *

    무협소설을 보면, 무공에 대한 조예가 없는 일반인들은 무림고수들의 절기를 눈으로 좇을 수도, 이해할 수조차 없다는 묘사가 자주 나온다.

    지금 형우의 상황이 딱 그랬다.

    “하하하, 저 생각보다 어려요.”

    연수의 말에, 단발머리 여학생이 짐짓 놀란 체를 했다.

    “어머, 언니인 줄 알았는데. 엄청 어른스럽게 생기셨나 보다. 저도 좀 어른스럽다는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은데. 다들 어리다고만 해서….”

    “저도 예전에 살쪘을 땐 좀 어린애 같아 보인다는 말 들었는데, 살 빼고 나니까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좀 없어져서 가끔 아쉽기는 해요.”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수없이 오고 간 치명적인 살초殺草들을 쑥맥인 형우는 하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래?’

    분명 웃으면서 서로 칭찬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형우로서는 느껴본 일 없는 굉장히 미스테리한 상황이었다. 당황한 여학생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 아직 젖살이 덜 빠져서….”

    “어머, 농담도 너무 재밌게 잘하신다. 아 맞다, 아까 사진 찍어달라고 하셨죠? 휴대폰 빨리 주세요. 예쁘게 찍어 드릴게요. 으음, 학생분 얼굴 예쁘게 나오려면 좀 멀리서 찍어야겠다.”

    “이, 이익!”

    여학생의 얼굴 근육이 쓰러진 권투선수의 근육처럼 꿈틀꿈틀 요동쳤다.

    그야말로 완벽한 넉다운!

    글로 먹고사는 문창과 학생에게 말싸움을 신청한 대가는 혹독했다.

    “어휴, 표정 좀 펴세요. 사진 예쁘게 안 나와요.” 자, 하나 둘….”

    찰칵! 휴대폰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방금 둘이 뭐 한 거야?”

    잠시 후, 둘만 남은 상태로 형우가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연수의 살벌한 표정을 보니 왠지 더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제일 무서운 여자는 엄마인 줄 알았는데.’

    방금의 연수의 기세는 거의 화난 어머니에 비빌 만했다.

    뭐랄까, 화내는 어머니가 뜨거운 불 같은 느낌이라면, 연수는 약간 혹한의 추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괜히 건드리면 화를 입을 것 같았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건 됐고! 연수 너는 뭐 해?”

    형우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으음, 집에 가기 전에 학교 도서관이나 한번 들르려고요. 선배는요?”

    “나? 나는 내려가서 작업해야지.”

    끝은 좀 이상하게 났지만, 방금 있었던 일은 자그마한 즉석 팬미팅이라고 봐도 무방한 거였다.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독자들을, 그것도 셋이나 목격한 형우의 가슴은 이미 작업에 대한 열의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네 덕분에 괜찮은 묘사가 떠올랐어.”

    “…괜찮은 묘사요? 그게 뭔데요?”

    “어, 응. 그게…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직접 봐.”

    형우가 말을 얼버무렸다.

    * * *

    캐서린.

    얼마 전부터 <전설의 보안관>에 새롭게 등장한 여자 캐릭터다. 이 캐릭터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건 천우희였다.

    “로맨스의 기본은 말야, 삼각형이야.”

    “…삼각형이요?”

    “삼각관계라는 거지. 꼭 여자일 필요는 없어. 사람이 아니라 일 같은 거여도 되고, 친구여도 상관은 없지. 뭐든지 대립쌍이면 돼.”

    “…흐음.”

    한참을 고민하다가, 형우는 결국 새로운 캐릭터인 캐서린 존스를 등장시켰다. 하지만, 만들고 나니 약간 문제가 있었다.

    “…전혀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아.”

    형우는 사실 캐릭터 조형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전설의 보안관>의 주인공인 헤럴드와 베아트리체는 부모님을 모티브로 한 것이고, 인기 캐릭터인 악당 에이전트 제로는 현실 개새끼 공태준을 모티브로 한 거였으니까.

    “…뭔가 모티브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좀 괜찮은 사람이 없나, 찾아보던 도중 형우는 꽤 괜찮은 모티브를 찾았다.

    “…불같은 성격의 베아트리체와 비교되는 캐릭터로 만드는 거야. 독설가인데다가, 차가운 얼음같이 분노하고, 상대를 잘 비꼬는….”

    고향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형우는 계속해서 캐릭터 조형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개성 없던 캐릭터인 캐서린을 재조형해내는데 성공했다.

    [베아트리체. 내가 예전에 너한테는 총살이 어울린다고 말했잖아. 몇몇 사람들은 내가 아주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더라고. 그런데 그 말은 그냥… 네가 죽기를 바란 건 아냐. 그건 너무하잖아? 난 그냥 심각하게 불구가 되는 정도만 원했어. 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깨진다거나. 무슨 말인지 알지?]

    라는 대사를 내뱉으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나서 뛰어난 격투술로 용병들을 제압하는 캐서린은 베아트리체와는 다른 매력으로 순식간에 많은 팬들을 확보했다.

    다메다메다메요 : 캐서린 눈나! 나 죽어!!!!

    박수무당 : 오늘부터 베아트리체 코인 대신 캐서린 코인 탑니다.

    하꼬인생 : 캐서린코인 타는 흑우 없제? 베아트리체 일편단심 간다.

    막시무스 : 원래 캐서린 이렇게 매력 터지는 캐였음? 처음에는 밋밋했던 것 같은데.

    ㄴ조영운 : ㅋㅋ218화 이전 캐서린이랑 그 이후 캐서린은 동명이인이라는게 학계의 정설임!

    ㄴ현주면주 : 이 정도면 작가가 꿈에서 캐서린 한번 만나고 온게 분명함.

    천우희 : 에이전트 제로 코인은 아무도 안 타요?

    역시 모티브로 캐릭터를 만드는 게 정답이었다. 탄력을 받은 김에, 형우는 캐릭터를 하나 더 만들어냈다.

    ‘어리고, 당찬 척하면서도 은근히 속이 여린 꼬마 소녀. 양 갈래 머리가 잘 어울리는 느낌으로….’

    모티브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예전에 보육원에서 만났던 꼬마, 나복희였다.

    ‘…완벽해!’

    형우는 흡족함을 느끼며 소설을 업로드했다. 소설이 등록되었다는 띠링, 하는 휴대폰 알람이 경쾌하게 울렸다.

    * * *

    “띠링!”

    같은 시간, 연수도 <전설의 보안관>의 이번 화를 읽고 있었다.

    ‘분명, 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고 했지?’

    두근거리며 소설을 읽는 연수.

    소설은 용병들의 마을에 캐서린 존스가 등장하면서 시작했다.

    [너희 얼마씩 받아? 얼마를 받든, 너무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날카로운 독설을 내뱉으며 베아트리체의 뒤통수를 치고, 베아트리체가 힘겹게 얻어 낸 현상금을 강탈해 간다.

    ‘앤 뭔데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캐서린을 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장면에서, 캐서린은 마을의 한 소녀를 만났다.

    타이미라는 캐릭터였다.

    [저는 타이미에요. 그리고 지금은 순무를 뽑으러 가야 하는데, 좀 도와줄래요?]

    연약하지만 솔직하고 당찼다. 작아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기가 센 척하지만, 헤럴드가 건네준 사탕을 보며 눈을 힐긋거리는 애다운 면모도 있었다.

    ‘…귀여워, 사랑스러워! 껴안아 주고 싶어!’

    여러모로 캐서린의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랄까. 그 캐릭터의 묘사를 보는 순간, 연수는 확신했다.

    “애가 바로 나를 모티브로 한 그 캐릭터구나. 어머, 어머, 선배는 나를 이런 느낌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푹신한 이불 속에서, 연수가 연신 두 발을 쿵쿵쿵쿵, 찧었다.

    * * *

    “뺘악, 뺘아악!”

    참치가 우는 소리에 형우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아침 8시. 어제 10시에 잤으니 내리 10시간을 연달아 잔 셈이었다.

    “…많이 잤네.”

    밤을 자주 새우는 형우에게 10시간의 수면은 결코 많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형우에게는 그런 세간의 상식이 별로 통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하루 잠을 4시간만 잤다지.’

    나폴레옹만큼은 아니더라도, 잠은 무조건 여덟 시간 이하로 자는 것이 형우의 철칙이었다.

    푸드덕, 푸드덕덕!

    형우의 자책을 끊은 것은 옆에서 맹렬하게 날갯짓하는 참새, 참치였다.

    “아, 맞다. 밥.”

    형우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쌀과자 몇 개를 꺼내 참치의 입에 물려 줬다. 녀석은 자신의 몸만 한 쌀과자를 매트리스처럼 깔고 앉더니, 뇸뇸거리며 잘도 삼켰다.

    ‘…왜 이리 정겨운 느낌이냐.’

    분명 서울에도 참치와 함께 왔고, 계속 함께 지냈는데 왠지 모르게 오랜만에 겪어보는 일상 같았다.

    아무 일 없이 글을 쓰고, 잠드는 평화롭고도, 평화로운 일상.

    ‘괜히 위화감이 드네.’

    뭔가 큰일을 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혹시나 싶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무슨 메시지가 이렇게나.”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그중 하나는 편집자인 지원에게서 온 거였고, 남은 두 통은….

    “우와아악! 맞다, 이게 있었지!”

    왠지 똥을 싸고 안 닦은 듯, 실수로 가스를 켜고 나온 듯 애매모호하고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들더니만!

    메시지의 제목은 오늘 10시 알지? 였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한다은 교수님이었다.

    형우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고향에서 가져온 가벼운 추리링 복장을 재빨리 가방에 구겨 넣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양복을 가지런하게 차려입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형우야! 오늘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 결과 발표날이니, 늦으면 안 된다!’

    소설 쓰는 데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있었다.

    “이번 화는 12시 15분에 올려야 하는데… 퇴고는 어떻게 하지?”

    형우의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어쩔 수 없지. 기차에 앉아서 퇴고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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