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38화 (38/200)

#37.

한국대학교 문창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좋든 싫든 선배 몇 명의 이름을 듣게 된다. 천병옥, 한다은, 그리고 윤정식.

현시점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은 한다은이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한다은이 아니라 천병옥이다.

10년 전, 문단의 대사건인 ‘장르 논쟁’을 일으킨 주역이자, 스스로를 ‘순문학 우월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문단의 거인巨人.

“…이런.”

한다은의 입에서 그런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의 표정이 당혹에 물들어가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역시. 저 인간을 데려오는 게 맞았어!”

천병옥에 뒤에 앉아 있던 공태준이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그를 데려온 것은 공태준의 아이디어였다.

장르문학을 쓰는 김형우가 연설하는 자리에 장르문학이라면 학을 떼는 천병옥을 데려온다.

마치 콜라에 멘토스를 넣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공태준의 계획대로, 10년 전 장르논쟁을 일으킨 여파로 펜을 꺾어야 했던 문단의 거인은 한국대학교 문창과가 장르문학으로 오염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학생은 장르문학을 쓴다고 들었소.”

천병옥이 형우를 노려봤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분명 죽었을 거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없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형우였지만, 그럼에도 대답은 1초도 안 걸려서 나왔다.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서 그랬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글이, 덕분에 어머니와 화해하고 꿈도 이룰 수 있었던 글이.”

형우는 한자한자 똑바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잘못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도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천병옥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순문학으로서 꿈을 이룰 수 없으니, 보다 쉬운 장르문학의 길을 택한 거야. 타락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대의 아버지라고 했나.”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형우는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천병옥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군의 춘부장을 탓할 생각은 없으나… 솔직히 말해 춘부장께서는 소위 말하는 고급 독자가 아니지 않은가? 나라면 차라리, 그분께 제대로 된 문학을 소개해 줬을 거라네.”

그 직설적인 말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한다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 태도는 아직도 안 변했군.’

10년 전, 천병옥은 <장르 논쟁>이라는 칼럼을 학회에 기재했다. 그 기막힌 내용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현실 도피에 맞춤인 웹소설은 사회가 합리적이 될 때까지만 기능할 것. 결론적으론 순문학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수준 낮은 작품들을 끊어주는, 고급 독자들의 결단력이 필요하다.]

…순문학을 숭상하며, 장르문학 독자를 ‘저급’으로 매도해버리는 그 태도는 당시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하물며, 10년이나 지났다. 그 사이 장르문학의 위상은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병옥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거세졌다. 적어도 10년 전에는 ‘비판’의 탈을 쓰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연단에 있는 형우를 쏘아붙이는 태도는 비판이라기보단 비난이었고, 불평이라기보단 불만에 가까웠다.

“…아까 자네가 장르소설 작가임을 밝혔을 때, 장내의 반응이 퍽 우습더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점이 말야.”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리더들이 모인 한국대학교다. 그런 데에서 형우는 장르소설을 운운했다. 천병옥은 당연히 질타가 나올 줄 알았다.

질타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의를 차려 무시하거나 혹은 무관심으로 일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응은 그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전설의 보안관>? 그거 나 읽었어!”

“이번에 커피콩페이지랑 네이비시리즈에도 올라온 것 같던데? 재밌냐?”

“완전 재밌음. 강추다.”

저 하찮은 대화의 주체가 미래를 이끌어나갈 주역들이라니. 얼마나 통탄스럽던지.

“…하지만 그것을 귀하들의 잘못이라고 여기지는 않네. 뭘 모르는 아이라면 응당 피망과 시금치보다는 단 과자와 사탕에 눈이 가기 마련이지. 나는 오히려 이곳의 교수진들에게 말하고 싶어. 아이가 편식을 한다면 옳은 식습관을 잡아 줘야 하는 것이 부모와 교사의 덕일진데.”

너희들은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애새끼들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졸지에 무시당한 형우가 반박했다.

“시류가 바뀌었다는 생각은 못 하십니까? 진리의 탐구만큼이나 중한 것이 즐거움일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장르 소설은 결코 순문학의 하위호환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기껏해야 과장된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런 이야기가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건가?”

칼날만치 날카로운 말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 흥분해 있는 것은 형우도 마찬가지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아버지께선 몸이 좋지 않아 종일 누워 계셨습니다. 그분께 즐거움을 안겨 준 글이 왜 가치가 없습니까?”

“개인의 행복 하나로 세상을 파악하는 건 논리 오류야. 장르 소설이 인간의 정신을 좀먹고 있다는 걸 정말로 모른단 말인가? 만약 장르문학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시간에….”

“TV 드라마를 보겠죠.”

형우가 천병옥의 말을 끊었다.

“아니면 게임을 할 겁니다. 어쩌면, 영화를 볼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 파이가 순문학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차분하면서도 강렬하게, 형우의 목소리는 좌중을 사로잡았다.

“당신처럼, 우월주의에 빠져 발전과 배움을 마다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처음으로 천병옥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형우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만약 선생님께서 순문학의 발전을 진정 바라신다면, 지금 당장 노트북을 들고 카페라도 가서 사람들이 장르문학과의 연을 끊고 순문학을 읽도록 좋은 소설을 쓰십시오.”

“말했다시피 장르문학이 그 걸림돌이다.”

그 말을 들은 형우는, 조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옹졸한 사람은 위대한 것을 끌어내리는 식으로 자신이 위대해지려고 하지요.”

그렇게 해서 다른 것보다 나아질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그래서 남는 건 분야의 쇠퇴와 몰락일 뿐이다.

“저는 한국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위대한 작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배울 것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드는 사람들 말이죠. 그 사람들은 스스로 위대해집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네요.”

당신은 문단의 이름을 빼면 어떤 위대함도 남지 않는 쭉정이다. 그런 뜻이었다.

천병옥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아무리 뭘 모르는 학생의 발언이라도 이곳은 유서 깊은 행사 자리. 문단의 역사가 지켜보고 있으니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문단의 역사라뇨?”

형우가 되물었다.

“저는 문단의 역사가 아니라, 즐거운 것을 보고 싶다는 인간의 욕구에 의해 지배받습니다, 선생님.”

“쯧, 이래서 요즘 것들은….”

그렇게 천병옥이 중얼거리는 순간.

“거기까지.”

그 순간까지 팔짱을 끼고 있던, 한국 문학의 또 다른 거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문창과 소설의 담당 교수인 한다은입니다.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한마디 해야겠군요.”

천병옥이 한다은을 째려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둘은 1년 선후배 사이로, 당시에는 천병옥이 선배였다.

하지만, 지금 둘의 위치는 좀 상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둘 다 한국대학교 문창과의 3강强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도 급 차이는 분명 있었다.

천병옥이 그 별명을 얻어낸 게 기행으로 인한 유명세에서 기인했다면, 한다은은 오직 문학적이고도 교육적인 성과로 이뤄냈다는 차이가 있다고 할까.

“…한다은.”

천병옥이 중얼거렸다. 예상이 약간 빗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학생 행사인데, 교수가 직접 끼어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천병옥의 귀로, 한다은의 목소리가 따박따박 박혀들었다.

“아무리 유구한 행사라고 하나, 학생을 상대로 문단까지 들먹이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한다은 교수. 당신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장르문학을 쓰는 사람을 연단에 올리다니!”

천병옥의 질타를, 한다은은 대놓고 무시했다.

“어쩌죠? 전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데.”

“문단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하, 문단이라!”

가당찮다는 듯, 한다은이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하네요. 아까부터 문단, 문단 하는데 당신이 뭐라고? 누가 보면 문단이 선생님 건 줄 알겠어요.”

“뭣…?”

“애초에, 10년 전에 펜을 꺾으신 분이 이제 와서 문단, 문단 거리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군요. 그래요, 한번 문단에 가서 일러바쳐 보세요.”

당황한 천병옥을 향해, 한다은의 마지막 한 마디가 비수처럼 틀어박혔다.

“그대와 나, 문단이 누구의 편을 들어 줄지도 정말 궁금하군요.”

내가 훨씬 세다.

그런 뜻이었다.

“어, 어….”

한다은은 얼떨떨해하는 천병옥을 무시한 채로, 사회자를 향해 이야기했다.

“질문 시간도 슬슬 지난 것 같은데, 다음 사람이 나오는 게 맞지 않겠어요?”

“그,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문창과 김형우 학생이었습니다!”

짝짝짝.

아주 크지는 않은 박수 소리가, 밤하늘의 옅은 별처럼 여기저기서 반짝거렸다.

* * *

“후아, 내가 다 떨리네!”

강연이 끝난 후, 연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형우 앞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어떻게 천병옥 선생님한테 그런 말을 해요? 문단의 큰손이잖아. 난 진짜 보기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던데.”

“…그런데 말야, 연수야.”

“네?”

“…천병옥이 누구야?”

형우의 질문을 들은 연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병옥 선생님을 몰라요?”

“…어.”

“10년 전에 있었던 장르 논쟁, 분명 배웠잖아요. 이번 학기에… 아.”

연수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번 학기에… 없었군요.”

“맞아, 나 휴학이었잖아.”

“그러니까, 천병옥이 누구냐면요.”

연수는 천병옥에 대해 설명했다. 연수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형우의 얼굴이 점점 까매졌다.

“허…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갑자기 부모까지 끄집어내서 욕하기에, 그냥 길거리 아가리 파이터인줄 알았던 것이다.

“미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선배?”

“그런 사람, 아니, 그런 분이랑 내가 싸운 거야? 연수야, 나 무슨 말 했지? 말 막 하진 않았지? 예의 없다거나, 그러진 않았지?”

형우는 기억을 되짚었다.

이상한 말 말라느니, 말이 심하다느니. 예의 없는 소리를 엄청 많이 했다. 소리도 질렀다.

“…으아.”

형우는 울고 싶은 기분이 확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 뭔가 불이익이 있을 게 뻔했다.

“난 큰일 났다.”

“그래도요. 선배, 이런 말이 있잖아요.”

“무슨 말?”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일 거면 이긴 병신이 되라고. 일단 선배가 이기긴 했잖아요.”

“…이긴 거 맞아?”

“교수님이 그랬잖아요. 원래 꼰대랑 말싸움할 때는요. 저쪽에서 ‘나 때는’ 나오면 이쪽이 이긴 거래요.”

기억났다. 예전에 누구한테서 들은 이야기라고 했었지, 아마.

“그런데 연수야.”

“네?”

“…이기면 뭐가 달라져?”

잠깐 생각해보던 연수가, 그대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 * *

“오랜만이에요, 선배.”

한다은이 천병옥을 향해 커피 한 잔을 내왔다. 천병옥은 커피를 마시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왜 불렀나.”

“그 순문학 우월주의만 좀 버리면 좋을 텐데.”

“…우월한 걸 우월하다고 말하는 게 잘못인가?”

“어린 학생이랑 논쟁에서 지고 나서 하는 말 치고는 좀 그렇지 않나?”

한다은이 잔뜩 비꼬자, 천병옥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난 지지 않았다.”

“어머, 또 이상한 말 하신다.”

한다은이 풋, 하고 웃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선배가 그랬잖아요. 나이 많은 사람이랑 말 싸움할 때는 저쪽에서 ‘나 때는 말야.’ 나오면 이쪽이 이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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