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36화 (36/200)

#35.

“형우야. 오늘이 한국 대학교의 리더 시작하는 날 맞지?”

이른 아침부터 옷을 챙겨입고 있던 차에 의재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기억한 건 아니고, 오늘 아침에 연수한테 들었다. 무슨 도우미인가 뭔가 도와달라던데. 졸업할 때 필요한 봉사 시간도 준다면서.”

“뭐야, 너도 도우미 오냐?”

“나도 솔직히 돕고야 싶은데… 요즘 좀 하는 게 있어서, 아마 못 갈 듯? 그래도 힘내라고 전화는 할까 해서 전화한 거다.”

“그래, 응원 고맙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형우는 그대로 옷장을 활짝 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추리닝 몇 벌에 셔츠 몇 개가 전부였는데, 어느새 옷이 꽤 많이 늘었다.

“저번에 편집자님이 추천했던 코디가….”

지원은 아예 형우의 옷을 A코디, B코디, C코디… 이런 식으로 추천해 줬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지원 : 오늘은 날씨가 좀 덜 더운 편이니까, C코디로 가는 걸 추천드려요! ^^

C코디는 기본적으로 갈색을 베이스로 하되, 투명한 안경으로 포인트를 살리는 ‘작가 룩’이었다. 형우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형우 : 말씀은 고맙지만, 오늘은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어서요.

지원 : 혹시 그 데님 청바지에 보라색 후드티는 아니죠?

형우 : 아니에요;

지원 : 호피 무늬 바지랑 별이 빛나는 밤 그려진 티셔츠도 아니죠오?

형우 : 원래 편집자라는 사람들이 작가 옷장 사정까지 이렇게 다 꿰고 있어요?

그 이유가 자신의 절망적인 패션센스 탓이라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형우는 옷장 안쪽에서 가장 아끼는 옷을 꺼냈다.

오래됐지만 낡은 느낌보다는 고풍스러운 느낌이 더 강한 네이비색 정장과 거기에 깔맞춤한 바지. 거기에 단색 넥타이까지. 전부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품이었다.

“…흐음, 괜찮네.”

익숙한 동작으로 옷을 차려입은 형우는 거울을 보고 구겨진 부분을 확인했다.

헛수고였다.

“구겨진 데가 없잖아.”

보관을 엄청 잘해서 그럴 리는 없고, 아마 어머니의 솜씨일 것이다. 어머니는 형우에 대한 것은 거의 다 알았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형우가 이 옷을 꼭 찾아 입는다는 것까지도.

‘대체 몇 시에 일어나신 거야?’

아마 새벽같이 일어나 옷을 다려 놓으신 게 분명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직도 셔츠 여기저기에는 다리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옷 틈틈이 오랫동안 숨어 있던 아버지의 향취 같은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양복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이 합쳐진 물건이랄까.

‘애니메이션이었으면 갑자기 이 양복에서 빛이 뿜어지면서 악당들이 다 죽었을 텐데.’

그리고 주인공은, 이게 바로 유대와 가족과 사랑의 힘이다! 라며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를 테다.

‘뭐, 현실이니만큼 그런 기능은 없지만….’

그 어떤 옷보다 편안하고, 좋은 느낌이기는 했다. 나가기 전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은 아침 7시. 학교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세 시간이 걸리고, 행사는 1시에 시작하니 2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가기 전에 어머니한테 인사나 좀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밖을 살펴보는데, 멀리 밭에서 일하는 중인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어?”

그렇게 손을 올려 인사하려던 형우의 손이 딱, 하고 굳었다.

“저, 저거. 저 새끼 뭐야?”

* * *

“후우.”

잠실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가장 큰 서점 중 하나인 교보재문고. 형우는 그 사이에서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켰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서울에서 살 때는 일주일에 못 해도 세 번은 왔었다.

‘그리고 책은 아홉 번 올 때마다 하나 권씩 샀었지.’

마음 같아서는 올 때마다 책을 양손 가득 따박따박 쌓아 가고 싶었지만, 형우는 가난했다. 매일같이 서점에 들러서 책을 둘러보다가, 정말 사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책만 돈을 쪼개 샀던 것이다.

“…돈만 생기면 서점에 많이 올 줄 알았는데.”

작가로 돈을 벌기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서점에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웹소설 작가라는 직업이 서점과는 별로 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언제 종이책 한번 내봤으면 좋겠네.”

웹소설과 인터넷 연재라는 형식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종이책을 내 보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고 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종이책에는 뭐랄까, 로망이란 게 있다.

친구한테 책 나왔다고 책도 돌리고, 책 들고 사인해 달라고 오는 독자한테 인사도 해 주고.

그런, 작가라면 누구든지 하는 상상 말이다.

“…그게 꽤 어려운 일이란 말이지.”

서점의 판타지 소설 코너를 보며 형우가 중얼거렸다.

20년 전, 그러니까 ‘대여점 시대’에는 대부분의 장르 소설가들이 종이책을 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웹소설 시대가 온 요즘에는 오히려 종이책을 내는 경우가 더 드물어졌다.

인터넷 연재에 비해 중간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접근성 또한 떨어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종이책이 완전히 사라졌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요즘도 꾸준히 종이로 출판하는 장르소설들이 있다.

소위, 양장본이라고 말하는 것들.

원가절감을 위해 저질 종이로 만들었던 대여점 소설과는 완전히 반대로, 고급 종이와 미려한 하드커버를 사용해 만드는 비싼 소장용 책이다.

그렇게 ‘양장본’이 될 수 있는 선택받은 작품들은 수많은 웹소설 중에서도 단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과연.”

양장본 판타지 소설의 목록을 천천히 살펴보던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스트 기사의 이야기를 담은 부터, 말빨이 끝내주는 기사단장의 이야기인 <하얀 짐승들>, 대한민국 최고의 판타지 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약물을 마시는 새>까지.

거의 판타지 소설계의 세계문학전집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하나.

“와아… 민준 삼촌 책이 여기에 있다는 거지.”

그 수많은 양장본 사이에서 형우가 찾는 것은 민준 삼촌이 쓴 <환생이 조금 애매하다>였다.

얼마 전 총 7권 퇴고를 완료하고 양장본 출시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삼촌, 책 나오면 저도 한 권 줄 거죠?’

‘나는 <전설의 보안관> 돈 내고 봤는데?’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뭐가 다르냐? 너도 돈 내고 사서 봐라. 뭐, 가지고 오면 싸인 정도는 해 주마.’

그 때는 유세도 그런 유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서점에 위치한 양장본 코너를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연도와 전인희 사이에 성민준이라.’

순문학으로 치자면, 과장 좀 보태서 셰익스피어랑 찰스 디킨스 사이에 내 책이 꽂혀 있는 거다.

기분이 안 좋다면 그게 거짓말일 테다.

“근데 왜 안 보이지?”

분명 나왔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한참을 찾아도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형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혹시 이거 찾으세요?”

“예?”

형우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눈앞에 들이 밀어진 큼지막한 책 한 권이 보였다.

<리턴 투 디제스터>, 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제목 언제 바뀌었어요?”

“좀 예전에요. 그나저나, 옷 잘 입으셨네요.”

“C번보다 낫죠?”

“그렇다고 해 둘게요.”

지원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형우도 마주 고개 숙였다.

“이런 데에서도 뵙네요. 우연인가?”

“우연 아닐걸요? 형우 작가님도 민준 작가님 책 나오는 날이라 오신 거 맞죠?”

“맞아요.”

“저도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서점에 책이 잘 진열되고 있나, 인기는 어떤가… 그런 것 좀 보려고. 그러니까, 우연은 아님!”

…보통 그런 걸 우연이라고 하지 않나? 형우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제목은 왜 바뀐 거예요?”

“아, 웹소설적으로는 괜찮은데, 종이책으로 하기에는 좀 애매하더라구요. 작가님도 그걸 원하셨고요.”

“제목이 막 그렇게 바뀌어도 되는 거예요? 저처럼 못 알아보는 독자가 있으면….”

“그걸 알아보게 하는 게 편집부에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형우 작가님만 모르셨던 것 같은데… 저기 봐요.”

윤진이 가리킨 곳에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 있었다.

“야, <리턴 투 디제스터> 이거 봤냐? 완전 재밌는데.”

“나도 알아. 이거 <환생이 조금 애매하다>가 제목 바뀐 거래매?”

“솔직히 예전 제목 좀 그렇긴 했어. 정감 가긴 하는데, 누구한테 나 <환생이 조금 애매하다> 읽어! 그렇게 말하기 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은 저들끼리 말하면서 낄낄거렸다. 형우는 그 사이 책 일곱 권을 모두 다 찾았다. 묵직한 감각이 꽤 마음에 들었다.

“사시려고요?

“네. 민준 삼촌이 책은 사서 보는 거라고….”

“후후후. 왠지 알겠다.”

지원이 짓궂게 웃으며, 가방을 뒤졌다.

“잠시만요, 이거 드릴게요.”

지원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초록색 카드 한 장이었다.

“이번에 C&N이랑 교보재문고랑 제휴 맺으면서 작가님들한테 보너스 온 거거든요. 책 살 때마다 자동으로 다이아몬드 마일리지 붙어서, 12% 적립돼요.”

“12%나요?”

형우도 나름 책을 많이 샀지만, 형우의 등급은 실버 등급. 마일리지는 7% 남짓이었다.

“마침 남은 거라… 형우 작가님 쓰세요. 그걸로 민준 작가님 책 사시면 되겠다. 아무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확인할 게 있어서요.”

“네. 수고하세요.”

“민준 작가님 소설 꼭 끝까지 읽으세요! 끝까지요!”

끝까지, 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의미심장하게 형우를 바라보던 지원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뭔데 그러지?”

그렇게 생각하며 학교로 가는 택시에 앉아 <리턴 투 디제스터>를 펼쳤다. 1p가 아니라, 마지막 페이지였다.

책의 말미에, 민준 삼촌이 쓴 작가의 말이 보였다.

* * *

작가의 말.

소설을 쓴 지 20년이 흘렀습니다. 쓸 때마다, 지금 쓰는 작품이 가장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번 작품은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소설을 고쳐 준 서지원 편집자님.

부족한 열정을 채워 준 나의 제자, 김형우.

.

.

.

* * *

그 부분을 읽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제자래. 그냥 아는 꼬맹이라고 쓰지.”

작가의 말은 두 줄이 더 남아 있었다.

.

.

.

그리고, 부족한 감정을 채워 준 당신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

.

.

“…부족한 감정을 채워 준 당신이라.”

조금 오글거리는 말이긴 했지만, 양장본 책에 나오는 글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멋있어 보였다. 형우는 아까 아침에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웬 놈이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있기에, 뭐 하는 놈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민준 삼촌이었다.

밭일로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에 정성스럽게 핸드크림을 손수 발라 주던 민준 삼촌. 그리고 수줍은 듯 손을 빼지만, 결코 힘을 세게 주지는 않는 어머니.

“…조만간 새아빠 생기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민준의 <리턴 투 디제스터>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와, 저 사람 CBS 기자 아냐?”

“저기 빨간 넥타이. 저 사람 나 알아. 서울시 의원이잖아! 옆에 <작품세상> 사장도 있어!”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는, 교내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각계각층의 저명한 인사들이 꽤 많이 모이는 편이다.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는 명문대학인 한국대학교 학생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학생을 뽑는 자리나 마찬가지니, 당연히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이곳에서 얼굴도장만 제대로 찍어도 인생이 잘 풀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그 관심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서오세요, 정 교수님.”

오늘 행사에 참여한 문창과의 전임교수, 한다은은 몇몇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한다은 교수님. 요즘 어떠세요?”

“저야 늘 똑같죠. 하하.”

“저번에는 문창과가 1등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요?”

“1등을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게 악수를 나누던 한다은의 시선이 어느 부분에서 멈췄다.

‘…공태준?’

슬쩍 스쳐 가긴 했지만, 분명 공태준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노란 셔츠를 입은 사람이 언뜻 보였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터라, 얼굴까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한다은 교수님? 저는 기자인 정승록….”

“아, 죄송합니다. 바쁜 일이 생겨서요. 인사는 조금 있다 하는 걸로 하지요.”

불길한 예감이 든 한다은은 재빨리 노란 셔츠를 쫓아갔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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