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34화 (34/200)

#33.

“학예회 비슷한 거지 뭐. 연극 준비 중이야. 내가 감독이고 애들이 배우지.”

연극.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현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혹시 최근에 뉴스 봤어?”

“뭐, 경제가 좋지 않다는 말이 많던데….”

중동 지방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인해 난민들이 대거 생겨났고, 석유 시설이 파괴됐다고 들었다. 그 오일 쇼크로 인해 경제 전반이 타격을 입었다나.

“그 탓에, 이번 분기 들어서 후원금이 많이 줄었어. 기업들도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한 거지.”

지금까지는 딱히 와닿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현수에게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어쩔 수 없다더라. 어릴 때부터 봉사도 자주 하고 추억도 있던 곳이라, 상태나 볼까 해서 왔었는데….”

그렇게 확인한 희망보육원의 재정 상태는 현수의 생각보다 더욱 나빴다.

“…거의 파산 직전이야. 원장 선생님은 사비까지 쓰시면서 유지하려고 하고 있지만, 역시 무리인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형우야.”

“응?”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도움이라면 뭐, 후원을 해 달라는 거야?”

“그건 아니야.

현수는 착잡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 후원자 몇 명 받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해.”

경제가 악화되면 기업들은 가장 먼저 ‘절약’을 시작한다고 했다. 사업 규모를 줄이고, 경쟁력 없는 사업을 철폐하며, 사원들을 구조 조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기업 이미지를 위한 후원을 줄이는 것은 그 ‘절약’의 매뉴얼 중에서도 가장 앞줄에 있다. 기업의 존망 앞에서는 이미지를 챙길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보육원 같은 곳은 1차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육원의 아이들 중에는 사고로 고아가 된 아이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는 부모의 사정에 의해 버림받은 아이가 더 많았다. 여기서 부모의 사정이란 절반 이상이 경제적인 사정이다.

기업들의 후원은 줄어드는 데 반해 먹여살려야 하는 아이들의 수는 증가하는 보육원의 악순환惡循環.

현수의 로펌이 후원하는 희망보육원도 그 슬픈 흐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로펌이라 오일쇼크에 크게 영향을 받는 쪽은 아니지만… 다른 기업까지 그런 건 아니니까.”

보육원의 후원자가 절반으로 줄었고, 파산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흐름에 휩싸여 아무것도 안 하고 스러질 수도 없었다. 희망 보육원의 관계자들은 지혜를 모아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어린이 연극제라는 게 있어.”

14세 이하를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 연극제를 통해 희망 보육원의 이름을 알리고 후원자를 끌어모으는 것. 그것이 지금 현수의 목표였다.

“가끔은, 누군가가 옆에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있으니까.”

그렇게 실행된 ‘희망보육원 어린이 연극제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난관에 봉착했다.

“대본을 써 줄 사람이 없더라고.”

“아까 보니까 대본이 있던데?”

“그건 내가 임시로 만든 거야. 솔직히 말해서 평론가의 눈으로 보면 형편없지. 보육원 식구들은 나를 믿고 있지만, 나는 거기에 못 미치는 모양이야.”

하기야. 현수는 모범적인 문창과생이고 뛰어난 평론가였지만, 그게 곧 글을 잘 쓴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문과 실무는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그래서 말인데 형우야. 바쁜 건 알지만… 대본 하나만 써 줄 수 있을까?”

“부탁이라는 게 그거야? 대본 써 달라는 거?”

“…응.”

현수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형우가 그런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 나한테 서운해하면 안 돼.”

아무래도 거절당한 것 같았다.

하기야, 바쁜 사람한테 갑자기 뜬금없이 대본을 달라고 하다니, 거절당할 만도 했다.

“…하긴 형우 너도 바쁠 텐데. 괜한 소리 해서 미안하다.”

현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형우가 그런 현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아니, 무슨 소리야? 뭐가 미안해?”

“응?”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든 현수의 눈에, 이미 노트북을 꺼내 들고 있는 형우의 모습이 보였다.

“서운해하지 말라며. 안 써준다는 뜻 아니었어?”

“뭔 소리야. 나중에 내 대본이 별로라 떨어졌다, 그런 서운한 소리 하지 말라고.”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고민 따위는 없었다. 이보다 더 어려운 부탁이라도 분명 들어줬을 거다.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골방에서 먼지나 마시고 있었을 텐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형우야, 고맙다, 그리고 미안해.”

“아이고… 또 답답하게 구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냐?”

형우가 현수의 어깨를 툭 때렸다.

“인마, 사람 좋은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마더 테레사인 것도 아니고, 받은 게 있으니 주겠다는 건데 뭘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굴고 그래?”

“…응?”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너무 착한 것도 병이라니까. 준 만큼 받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거야. 그러다가 상대가 입 싹 닦아 버리면 너만 호구 되는 거고.”

어쩌다 보니 약간 훈수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왠지 낯간지러운 느낌에, 형우는 자기도 험험, 하고 괜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신 너도 내 연설문 꼭 도와줘야 된다. 나 기브 앤 테이크 확실한 거 알지?”

* * *

“문제가 뭔지 알겠어?”

“…흐음.”

현수가 쓴 대본은 <불식不蝕의 라푼젤>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동화인 <라푼젤>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다.

현수 스스로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별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형우가 보기에 그건 지나친 겸손이었다.

현수의 극본은 철학적이면서도 교조적이지 않았고, 인간 내면의 심리를 잘 파악했으며, 눈여겨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치밀한 복선들을 대사 사이사이에 교묘하게 분배했다.

하지만 딱 하나가 부족했다.

글의 목적에 대한 이해 말이다.

“…이거 어린이 연극이잖아.”

“그렇지.”

현수가 면목 없다는 듯 뒷목을 긁적거렸다.

“내가 평론만 쓰다 보니까, 어느새 스타일이 이쪽으로 굳어졌나 봐.”

“거참….”

글이라는 분야에도 습관이니, 관성이니 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한쪽으로 쓰기 시작하면 그쪽으로만 쓰게 된다는 뜻이다.

“이해는 된다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꼭두각시 탈놀이가 아니라 고난도 리듬체조를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수준 미달이 아니라, 수준 오버다.

“어때, 고칠 수 있겠어?”

“못 고쳐.”

현수의 질문에,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장면 장면이 너무 정교하게 이어져 있어서, 잘못 고치려다간 졸작 될 것 같아.”

“…후우, 알았어. 너도 바쁘니까.”

“아니, 또 그러네. 아까부터 왜 이리 내 스케쥴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실까?”

형우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쳤다.

“내가 언제 집에 간다고 말하기라도 했냐?”

“못 고친다며?”

“그래. 못 고쳐.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쓸 거야.”

형우의 말에, 현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간 내로 되겠어? 너 바쁘잖아.”

“며칠 밤 새우면 되지.”

형우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벌레인 형우에게 있어서 밤을 새워 글을 쓰는 일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남들이 술 먹고 놀면서 밤을 새는 것과 비슷한 감각 정도랄까.

“그렇게까지 내 부탁을 위해 희생해주다니….”

하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현수는 형우의 말에 상당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넌 진짜 좋은 친구다, 형우야.”

“밤 새는 게 뭐 대수라고 희생까지 나와?”

“아니야, 겸손할 필요 없어! 그게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알아. 진짜로 고맙다.”

“그, 알겠으니까 제발 저리 가서 애들이랑 놀면 안 되냐? 손발이 비틀려서 지금 자판이 두 개씩 쳐질 것 같거든?”

* * *

그렇게 호언장담은 했지만, 사실 극본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토리 자체는 금방 나왔다.

문제는, 그 스토리를 표현하는 방식인 연출이었다. 대사를 아무리 써 봐도 마음에 확 와닿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대체 뭐가 문제지?”

연설문을 쓸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분명 내용은 충실한데, 읽어 보면 뭔가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비유하자면 맛이 없는 느낌이랄까.

“저기요.”

그렇게 한참을 노트북 앞에서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가 형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원장 선생님이 자는 곳 안내해 주래요.”

“아, 복희구나.”

처음에 문을 열어줬던 소녀, 나복희였다. 그녀는 어느새 참치와 친해진 듯, 참치를 어깨 위에 턱 하니 올리고 있었다.

“쩌어기, 오른쪽 방에 이불이랑 베개 있어요.”

“고마워.”

텅 빈 화면을 보니 오늘 잠들기는 그른 것 같지만, 일단 고맙다고는 했다. 말을 다 마친 후에도, 복희는 뭔가 우물쭈물하면서 형우의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기요, 아저씨.”

“왜?”

“혹시, TV 안 봐요?”

“보고 싶으면 봐. 난 상관 안 해.”

작업할 때 형우는 그렇게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3년 넘게 반지하 생활을 했던 형우다. 지나가던 자동차 소리도 그러려니 하는 경지에 올랐는데, TV 소리쯤이야.

하지만 형우가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복희는 TV를 켤 생각을 안 했다.

“그게요…. 원장 선생님이 애들은 10시 넘어서 티비 못 보게 하거든요….”

아하. 형우는 상황을 이해했다. TV를 보고는 싶은데 원장 선생님은 무서우니, 형우에게 슬쩍 부탁하는 거였다.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보려고? <포롱포롱 포로리>?”

“…내가 무슨 애인 줄 알아요?”

그럼 니가 어른이냐? 소리가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또 꼰대소리 들을까 그만뒀다.

“그럼 뭐 보는데?”

“요즘 유행하는 거 있잖아요. 아, 한다.”

TV 화면에는 온갖 모자를 쓴 사람들과, 온갖 반지를 낀 사람들이 나왔다. 그래도 목걸이는 모두 똑같은 것을 차고 있었다.

흔히 ‘합격 목걸이’라고 부르는 큼지막한 목걸이였다.

“…<기브미더머니>?”

요즘 세간에서 제일 힙하기로 유명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아저씨는 <기브미더머니> 안 봐요?”

“예전에 군대 있을 때 봤어. 그때는 래퍼 노잼 응원했었는데.”

매일 밤, 당직사관 몰래 TV로 <기브미더머니>보는 게 얼마나 재밌던지.

“한 번은 들켜서 크게 혼났는데, 다음 주에도 똑같이 몰래 봤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깡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응원하던 애가 노잼이였는데, 애가 아마 아깝게 2등을 했을 거야.”

“…그때면 전 네 살 때라 잘 모르고요. 저는 이번 시즌부터 봤어요.”

“누구 좋아하는데?”

“스윙칩이요.”

“아, 스윙칩! 노래 좋지. 지금 나오네.”

마침 복희가 좋아하는 덩치 큰 랩퍼, 스윙칩이 공연할 차례인 것 같았다. 어차피 글도 안 써지겠다, 잠시 환기도 할 겸 형우도 노트북을 덮고 TV에 집중했다.

“오늘의 빅매치! 랩퍼들의 왕 스윙칩과, 잃을 것 없는 남자 하늘민혁의 디스 배틀입니다!”

그렇게 방송을 보기 시작한 지 정확히 삼십 분 후.

“……미친, 이거였어.”

열의에 찬 표정으로, 형우는 자신의 노트북을 거칠게 펼쳐 들었다. 어두운 밤, 창밖으로 노트북의 불빛이 새어 나갔다.

* * *

같은 시간, 현수는 보육원의 정원에서 꺼지지 않는 형우 방의 불빛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마운 녀석.”

다 피운 꽁초를 휴지통에 집어넣는 순간, 위이잉.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학교 선배인 공태준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 태준 선배님. 전화 받았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클럽인 것 같았다.

“인사는 됐고, 현수야!”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공태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전에 말해 줬던 거 있잖아. 연설문 좀 대신 써 달라는 거. 얼마만큼이나 했어?”

며칠 전, 공태준은 현수에게 전화해서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때 발표할 연설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선배님,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연설문은 직접 써야….”

“그런 정론은 됐고!”

공태준이 소리를 빡 질렀다.

“너 설마 지금 발 빼냐? 나도 네 부탁 들어줬잖아? 그 어린이 공연인가 뭔가, 그거 써 준거 잊었어?”

며칠 전, 현수는 공태준에게 극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 어디 잡지로 등단했다기에, 절박한 마음에 혹시나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아본 거였다.

썩은 동앗줄도 그런 썩은 동앗줄이 없었다. 내용은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고, 퇴고조차 안 해서 한 문장에 오타가 세 개씩이나 있었다.

현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선배님, 솔직히 그거 완성도 안 하고 대충 보내신 거잖아요. 중요한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대충이라니, 후배! 그러면 나 서운해!”

공태준이 어올리지도 않게 볼멘소리를 냈다.

“나 그거 세 시간이나 걸려서 얼마나 열심히 쓴 건데.”

“…세 시간이요?”

아무리 어린이 극본이라지만, 세 시간은 결코 뒤에 ‘이나’라는 말이 붙을 단위가 아니다. 고작 세 시간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아무튼 현수야! 너 먹고 튈 놈 아니잖아? 그치? 그러니까 잘 좀 부탁해! 나는 지금 옆에서 불러서… 어어, 나 지금 간다! 오늘은 양주로….”

전화는 그렇게 툭 끊겼다.

그렇게 멍하니 건물을 보는데, 형우의 방에 들어온 불빛이 보였다.

자신에게 받은 만큼 갚아주기 위해, 지금도 잠을 참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친구.

“…받은 만큼만 해 주라고 했었지.”

후우,

한숨을 한번 내쉰 현수는 그대로 노트북을 폈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뒤에, 노트북을 접었다.

잠시 후, 공태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현수야, 잘못 보낸 것 같은데? 확인해 봤는데, 4분의 1밖에 안 왔어!”

“4분의 1이라니요? 선배님? 그러면 저 서운합니다. 세 시간이나 걸려서 얼마나 열심히 쓴 건데.”

현수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먹은 만큼은 해 줬다.

“선배님도 세 시간, 저도 세 시간. 뭐가 이상합니까?”

다만, 그 이상은 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뭐? 현수야, 갑자기 왜 그래? 너 원래 그런 놈 아니었잖아!”

공태준이 당황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되물었다.

“혹시 그 연극 극본 때문에 그래? 그거 다시 써서 보내 줄게. 그러면 되잖아? 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구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현수는 그대로 전화를 툭 끊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네 시. 여전히 형우가 있는 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잘한 거겠지?’

끈적끈적한 열대야의 밤이었지만, 조현수는 마음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상쾌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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