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31화 (31/200)
  • #30.

    “조기졸업이라고?”

    “네, 가능할까요?”

    한다은 교수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 요즘엔 신청자가 없긴 했지만, 그런 제도가 있지. 그거라면 교수를 찾아오는 게 맞기도 하고. 다만, 조건이 좀 있는데, 알고 있니?”

    “그렇습니다.”

    형우가 알기로, 한국대학교 문과대학의 경우 조기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개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다.

    첫째. F학점을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으며, 평균 학점이 우수할 것.

    “말할 필요도 없겠구나.”

    한다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우는 지금까지 F학점이나 학사경고는커녕, 오히려 장학금을 안 받은 학기가 없을 정도로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필요 학점을 모두 이수했을 것. 이 또한 문제 될 건 없었다. 학구열이 뛰어났던 형우는 1학년 때부터 최대학점을 꽉꽉 채워 수업을 들었다.

    남들이 월공강이니 금공강이니 머리를 싸매고 시간표를 짤 때, 혼자 주 5일 등교를 했다. 꼭 듣고 싶은 강의를 못 들었을 때는 계절학기를 들었다. 그렇게 해서, 형우가 수강해야 하는 남은 학점은 19학점.

    충분히 한 학기 만에 소화할 수 있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담당 교수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거지요.”

    형우의 이야기를 다 들은 한다은이 기특하다는 듯이 형우를 바라봤다.

    “조사를 열심히 했구나.”

    “꼭 필요하거든요.”

    “나도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서명을 해 주고 싶다만… 그건 좀 힘들겠구나.”

    분명 ‘담당 교수의 인가’라고 쓰여 있기는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런 사안은 담당 교수의 기분에 따라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20년 전 대학이라면 모를까, 지금 교수 멋대로 학생에게 혜택을 주었다가는 틀림없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만다.

    “조기졸업에는 정당한 사유가 필요해. 그러니 말해 주렴.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은 이유가 뭐니?

    “그게… 따지자면 취업, 이랄까요?”

    형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전날 지원에게 부탁해서 챙겨 놓았던 계약서의 사본이었다.

    “사실, 방학 때부터 웹소설을 썼거든요. 운이 좋아 출판도 됐고요.”

    “무슨 작품인데? 제목은?”

    “아실지는 모르겠는데… 달피아라는 곳에서 연재 중인 <전설의 보안관>이라는 작품이에요.”

    “그래…?”

    교수님은 사이트에서 연재 중인 소설과 형우가 내민 계약서를 번갈아서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는 형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곳에 오면서 가장 긴장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교수님은 평생 순문학만 붙들고 사셨던 분이 아닌가. 어쩌면 웹소설이라는 문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으음.”

    한다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형우는 약간 두려워졌다.

    감히 나한테 배우고 이런 걸 써! 하고 멸시하며 소리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러지 않았다.

    “이 별(★) 옆에 적힌 숫자가 독자 수지? 이만 명이 넘네. 부러워라.”

    “네, 넷?”

    “연재는 일주일에 다섯 번? 일주일에 2만 5천 자를 쓰는 셈이구나. 아니지, 퇴고를 더한다면 5만 자인가, 맞지?”

    “네. 대충 그 정도….”

    “…정말 열심히 했구나.”

    멸시는커녕, 형우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시선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교수님….”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돈은 얼마나 버니?”

    “저번 달에 천만 원 정도요.”

    “…세전? 세후?”

    “세후입니다.”

    “…형우 너.”

    교수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보다 많이 버는구나. 괘씸하게.”

    “예?”

    “…나도 교수 때려치우고 웹소설 써야 하나? 그러면 나 좀 가르쳐 줄래? 그렇게 해 주면 조기졸업이야 못 시켜줄 것도 없지.”

    “…네?”

    “농담이다. 정색하기는.”

    하도 진지하게 말하는 통에 순간 진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다른 애들한테는 가르칠 만도 해.”

    그렇게 중얼거린 교수님은, 교수실 서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이건?”

    “너도 알지? 매 학기마다 열리는 교내 행사.”

    한다은 교수님이 내민 포스터 위에는, ‘한국대학교의 청년 리더’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 * *

    한국대학교의 청년 리더.

    1년에 두 번, 방학마다 열리는 교내 행사로 각 과마다 재능 있는 재학생 한 명이 대표로 나와 다른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펼치는 행사다.

    연설이 끝난 후에는 재학생과 교수들의 투표를 통해 그중 최고의 리더를 뽑고, 그 사람은 ‘한국대학의 리더’로 선정되어 상을 받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정말로 좋은 점만 있는 행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행사에는 학생들이 모르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교수들 사이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점이다.

    “오호홋! 한다은 교수님! 지난 1학기에는 문창과에게 우승을 내 줬지만, 이번에는 저희 불문과가 우승할 거라고요?”

    어제 아래층 불어불문학과의 윤 교수가 했던 말이다.

    ‘…그 망할 불어불문학과 교수한테 지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한다은은 이미 몇 번이나 본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연수? 이번에 조그마한 잡지에 기재되기는 했는데, 이걸로는 좀 부족하고…. 의재는 학교 오는 것만 해도 고마울 정도지. 그리고 공태준은… 에효. 애는 볼 필요도 없네.’

    아무리 훑어봐도, 이번 학기는 영 꽝이었다.

    2학기 들어 학생들이 갑자기 게을러졌다거나, 인재가 없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문창과의 특성 때문이었다.

    소설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가장 큰 등용문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新春文藝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춘문예는 11월쯤부터 공모를 시작하여 다음 해 1월 1일에 합격자를 발표한다. 아마추어 소설가들이 프로 작가로 비상飛上하는 시기라고 할까.

    겨울이 문창과생들에게 있어 비상飛上의 시기라면, 여름은 반대로 비축備蓄의 시기다. 다른 말로 하면, 별다른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는 시기라는 뜻이다.

    ‘이벤트가 없으니, 당연히 업적도 없을 수밖에.’

    누굴 고르든지 고만고만한 느낌이라서, 그냥 적당히 아무나 내보낼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까지 딱 도달했을 무렵, 우연처럼 형우에게 연락이 왔다.

    ‘…유레카!’

    웹소설가로 성공했다는 형우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다은은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쉬면서 글을 썼다는 것만 해도 이뻐 죽겠는데, 출판사랑 계약도 맺고 글도 엄청 잘 나간단다. 그 행동은 분명 뭇 학생들의 귀감이 될 만했다.

    ‘게다가, 그게 전부인 것도 아니지.’

    문창과 출신임에도 순수문학가가 아니라 웹소설로 성공했다는 특이성. 한다은은 그 부분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꼰대들을 한 방 먹일 기회잖아, 이거.’

    소설가라는 직업은 사실 돈 벌어먹기가 아주 힘든 직업이었다. 등단의 문은 좁고, 작가가 되기는 힘들다. 그렇게 힘들게 작가가 되어도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문창과의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웹소설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등장한 것이다. 상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고 있기는 했지만, 한다은 교수는 몇 번이나 학교에 장르문학에 관련된 커리큘럼 과정을 신설하자고 건의해 왔다.

    하지만 그 건의는 번번이 묵살되었다. 기성 작가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한국 최고의 문창과 학생들이 그런 자질구레한 스낵컬처에 시선을 돌려서는 안 된다나?

    똑같은 글인데, 어떤 글은 모범생이 쓰는 글이고, 어떤 글은 양아치스러운 글이라니. 그 이분법에 치가 떨렸다.

    ‘졸업한 제자들이 잘사는 게 중요하지, 그깟 학교 전통 같은 게 뭐가 중요해?’

    한다은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멀쩡한 길이 두 개 있는데, 한쪽을 억지로 막아 놓고 한 쪽으로만 가라고 하는 꼴이었다. 그러니 교통정체가 안 생길 수가 있나.

    언제 한 번 그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형우가 등장했다.

    ‘언제나 장학금을 받은 성실한 모범생인데다가, 웹소설에 도전해 성공까지 한 대견한 녀석.’

    그런 형우가 리더 행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이번 건을 계기로 학교에 장르소설 커리큘럼 신설까지도 요청해 볼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형우야. 이번 행사에 네가 나가 줬으면 좋겠다.”

    “으흠.”

    한다은의 말을 들은 형우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장르문학 쪽 커리큘럼을 신설한다는 취지도 마음에 들었고, 조기졸업 또한 꼭 필요한 제도였지만, 요즘 형우는 하루하루가 너무 바빴다.

    글만 쓰기에도 벅찬데, 거기에 스케쥴을 하나 추가하는 건 아무래도 좀 부담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거절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순간,

    “형우야, 너 혹시 조기졸업 말고, 선취업 후학점 제도는 못 들어 봤니?”

    한다은이 비장의 수를 던졌다.

    “그게 뭔데요?”

    “취업한 학생을 대상으로, 출석하지 않아도 교수 재량으로 출석의 일부를 인정해 주는 제도야. 게다가 조기졸업이랑 병행할 수도 있지.”

    이래도 안 한다고 할래? 그런 표정으로 한다은은 형우를 바라봤다.

    * * *

    학교 근처에 위치한 고깃집.

    “조기졸업에 선취업 후학점 제도까지 동시에요?”

    연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하나라면 모를까, 학교 역사를 통틀어도 이 두 가지 혜택을 동시에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아직 받은 건 아냐.”

    형우는 한다은 교수님의 제안을 수락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혜택이었다.

    “공정성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더라고.”

    결국 학교생활과 작업의 병행을 위해서는, 한 달 뒤 진행되는 행사에서 실적을 거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내일부터 행사 준비하는 거예요?”

    “일단 행사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나는 계속 작업해야지. 이제는 작가니까.”

    형우의 말을 들은 의재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길게 찢었다.

    “…너 방금 겁나 조현수 같았던 거 알아?”

    “뭐가?”

    “재수가 없다, 이 말이지. 세상에, 나도 그 선취업 후학점인가 뭔가 그거 하고 싶다고!”

    큰 소리로 말하던 의재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이마를 탁 쳤다.

    “대박. 나도 오늘 교수님 찾아갈까?”

    “선배는 취업도 못 했잖아.”

    “연수야, 왜 자꾸 뼈를 때려?”

    연수와 의재가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했다.

    안 보던 사이 둘이 엄청 친해진 모양이었다.

    “언제 그렇게 둘이 친해진 거야? 혹시 사귀는 거 아냐?”

    “선배, 그러다 맞아요.”

    “미안.”

    형우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기야, 너는 현수를 좋아하잖아.”

    “…아니라니까요?”

    연수가 술잔을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놨다.

    “현수 선배는 물론 선배들보다 잘생기고, 돈도 많고, 글도 잘 쓰고, 키도 크긴 하지만….”

    “연수야 잠깐. 나 기분 나빠질라 그래.”

    “기분 나빠할 게 뭐 있어요? 아무튼, 그 선배는 뭐랄까, 연예인 보는 느낌으로 좋아하는 거지. 딱히 막 이성적으로 끌리고 그런 건 없다는 거죠.”

    “…둘이 다른 거야?”

    “다르죠. 선배는 만약 선배 여자 친구가 남자 배우나 아이돌 좋아한다고 하면,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할 거예요?”

    “연애를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에이. 농담도. 그 나이에 모쏠이 말이 돼요?”

    연수가 농담하지 말라는 듯 형우의 어깨를 툭 쳤다.

    “…농담 아닌데.”

    “설마.”

    “진짠데.”

    “허억. 지금까지 뭐 했어요?”

    “글 썼어.”

    “세상에….”

    의재와 연수가 똑 닮은 표정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마치 나라 잃은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이랄까….

    “…선배, 녹차 좀 드실래요? 항히스타민 성분이 많아서 우울증에 좋대요.”

    “안 우울한데?”

    “그러면 형우야, 술, 우리 술 좀 더 시킬까?”

    “이거면 충분하잖아. 내일 일 있거든.”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어디선가 <인간극장>의 배경음악이 들려오는 듯도 하고….

    “주문하신 삼겹살 3인분이랑, 소주 두 병 나왔습니다!”

    술이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나왔다. 술이 세 잔쯤 돌았을 때, 형우는 손을 뻗어 의재가 내미는 술잔을 거절했다.

    “난 그만.”

    “고작 세 잔 먹고?”

    “내일 일 있다니까?”

    “…뭔데 술자리를 뺄 정도로 큰일이야? 별것 아니면 죽어.”

    “그게….”

    형우가 멋쩍게 웃었다.

    “내일이 아버지 제사거든.”

    “헉.”

    연수가 의재를 확 째려봤다. 의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버버거리다가.

    “으윽.”

    하고, 손에 쥔 술을 그대로 자기 입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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