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목표는 그랬는데, 막상 써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랬겠지.”
형우의 이야기를 다 들은 천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몇 번인가, 그 균형을 무너트려서 작품이 산으로 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원 언니 덕에 살았지.’
실수는 겨우 면했지만,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베테랑인 자신도 그 정도인데, 로맨스 초짜인 형우가 전전긍긍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나한테 로맨스를 알려 달라는 거네. 그렇지?”
“네.”
형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우희는 거기에서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하나만 묻자. 왜 하필 나야? 내기를 이겨서, 뭔가 부탁하기 편한 상대라 그런 거야?”
“어… 그것도 없지는 않은데. 다른 이유가 더 크죠.”
“다른 이유라면?”
형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천우희 작가님이 최고잖아요.”
천우희와의 내기에서 승리를 확신한 순간부터, 형우의 목표는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로맨스 일변도로 세 개의 플랫폼에서 정상에 올랐던 프로 중의 프로인 천우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 다른 로맨스 작가들도 많았지만, 업계 탑을 보고 나니 다른 작가들은 영 눈에 차지 않았다.
‘내 새끼한테는 좋은 것만 먹여야지!’
하는, 소설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랄까.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천우희가 허, 하고 웃었다.
‘……얘, 좀 마음에 드네.’
목 뒤에서부터 지이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패배 이후 바닥을 찍었던 자존감 게이지가 차오르는 소리였다.
* * *
“일단 두 개는 끝냈고.”
형우가 서울에 온 이유는 총 네 가지였다. 첫 번째는 웹툰 계약이었고, 두 번째는 천우희에게 로맨스에 대한 배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웹툰 계약이야 하면 그만이었고, 걱정인 것은 천우희였다. 자존심 강한 그녀가 어쩌면 이를 악물고 자존심을 세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작품 막힐 때마다 연락해. 바쁘지 않다면 어울려 줄게.’
역시 천우희는 천우희라는 건지, 말투에 날이 바짝 서 있었지만, 뉘앙스를 빼고 본다면 일단 성공이기는 했다.
비록 형우에게 한 번 졌기는 해도, 천우희는 로맨스 소설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그저 아주 잠깐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도 그것을 안다.
지금 상태의 천우희와 다시 한번 똑같은 내기를 한다면, 그때는 정말이지 이길 자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지원 매니저님도 다시 천우희 작가님 작품을 봐준다고 했지.’
정신 차린 천우희와 능력 있는 편집자인 지원의 조합이라니. 어쩌면 조만간 로맨스 소설 독자들은 기쁨에 겨운 비명을 내지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독자들 중 몇 명은 내 작품을 보고 비명을 질렀으면 좋겠는데.’
형우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부자연스럽지 않게 헤럴드와 베아트리체 사이에서 연애 관계를 형성해 낼지 고민했다.
‘아예 <킹스맨>처럼 B급 감성으로다가 팍팍 가 버려? 아니면 현대 로맨스처럼 조금 은근하게? 으흠,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겠네.’
그렇게 고민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톡 하고 건드렸다.
“인마, 김형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옆을 바라보자, 의재가 형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는 연수도 있었다. 고민하며 걷던 사이 어느새 약속장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언제 왔어?”
“우리도 방금 왔어.”
오랜만에 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것. 그것이 형우의 세 번째 용건이었다.
“오랜만이다, 인마! 잘 지냈냐?”
“뭐, 그럭저럭.”
“그럭저럭 정도가 아닌데? 옷빨 잘 받는 거 봐. 이렇게 입을 수 있으면서 왜 지금까지는 보라색 후드티만 입고 왔어요?”
보라색 후드티가 어때서?
형우가 지금 입고 온 건 저번에 지원과 함께 백화점에서 고른 옷들이었다. 형우가 보기에는 예전에 자기가 입었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는데, 의재와 연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작가 되더니, 완전 기깔나네.”
얼마 전, 형우는 이 둘에게 자신이 웹소설을 쓴다는 것을 고백했다.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백까지 하냐 싶겠지만,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우와 함께 순문학을 공부하며 등단을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나만 쏙 빠져서 웹소설을 쓴다고 말하기에는 좀 껄끄러웠던 것이다. 배신감까지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서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수와 의재는 역시 서운해했다.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요?”
형우가 순문학을 등져서가 아니라, 늦게 말해줘서 서운해했다.
“난 또…. 나 때문에 선배가 글 접은 줄 알았잖아요!”
학기 초에 형우가 휴학을 결정한 이후부터, 연수는 늘 그게 혹시 자기 때문은 아닐까,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가, 의재가 이야기해줘서 알았다.
“흐흐, 왠지 말하기가 좀 그래서.”
“저희가 뭐, 그 공태준 자식처럼 장르문학이 어쩌고 순문학이 어쩌고 헛소리라도 할 줄 알았어요?”
“꼭 그런 건 아닌데….”
뜨끔, 하고 속이 좀 찔리긴 했다.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그런 이야기보다는, 공태준은 어떻게 됐어?”
“선배 휴학하고 처음에는 별 지랄을 다 했는데, 어느 순간 잠잠해지더라고요. 소문에 의하면 교수님이 화를 엄청 냈다던데….”
“…한다은 교수님이?”
문창과의 전임교수인 한다은 교수님은 형우가 가장 존경하는 교수이자 소설가였다. 오죽하면 5년 전 신입생 OT때 해 줬던 짧은 강의를 아직까지도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
게다가 성격도 좋아서, 학생들의 별것 아닌 실수는 그냥 허허 하고 넘어가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그런 교수님이 화를 냈다니, 형우의 놀란 표정을 본 의재가 피식 웃었다.
“공태준 보면 보살도 못 참지. 예수님이 와도 십자가로 때릴걸?”
“그건 맞지. 요즘은 어때?”
“뭐, 제 녀석도 정신머리가 있으니까 전보다 좀 얌전해지기는 했는데… 난 잘 모르겠다. 사람이 그렇게 빨리 변하면 난 못 믿겠더라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요즘은 꼰대질은 좀 그만둔 것 같은데… 그게 진짜로 개과천선한 건지 사고 쳤으니까 잠깐 고개 숙이고 다니는 건지는 더 봐야 할 일이죠.”
“뭐하러 더 보냐? 그냥 안 보는 게 낫지.”
“그것도 그렇고요.”
“아직도 형우 네가 걔 때문에 네가 휴학한 거 생각나면 열불이 난다니까.”
“흐음.”
휴학을 결심한 이유가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는 했다.
“아 맞다, 형우야.”
한참을 가슴을 펑펑 치던 의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너 복학은 할 거냐?”
“마침 그 이야기 하려고 했어.”
복학 신청.
그것이 형우가 서울에 올라온 마지막 이유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의재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복학 신청 기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잖아? 혹시 학교 안 다녀서 착각한 거야?”
“그럴 리가. 내가 바보도 아니고.”
복학을 신청하기 전에 먼저 만날 사람이 있었다.
* * *
형우는 ‘한국대학교 문창과 한다은 교수실’이라고 크게 써진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냐.’
작년만 해도 진로 상담이다 출품 계획이다 해서 뺀질나게 드나들었던 교수실이지만, 재학생 신분이 아닌 휴학생 신분으로 오는 건 처음이었다.
똑똑똑.
“누구니?”
노크를 하자마자 대답이 나왔다. 그대로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저 4학년 김형우입니다.”
“형우라고?”
“예.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들어와, 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먼저 벌컥 열렸다. 교수님이 문을 열어준 것이다.
“들어오렴.”
까만색 뿔테 안경이 인상적인 중년의 여성. 한국대학교 문창과의 모든 소설 전공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한다은 교수님이다. 형우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좀 앉아 있으렴.”
방 안에 커피 냄새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커피를 내리던 도중인 것 같았다. 한다은 교수님은 커피 좋아하는 교수들 사이에서도 커피광으로 유명했다.
심지어는 교수실 안에 핸드드립 세트를 구비해 놓을 정도. 소문에 의하면 하루에 커피를 2리터씩 마신다고 했다.
“마침 잘 왔구나. 좋은 원두가 있었거든.”
교수님이 커피를 내리는 사이, 형우는 오랜만에 들어온 교수실을 둘러봤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그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커피가 완성된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형우는 그대로 커피를 홀짝였다. 향이 괜찮았다. 뭔가 약간 구수한 느낌도 있고, 시큼한 느낌도 있었다.
“맛이 어떠니?”
“맛있어요. 좋은 원두라더니. 어디 거예요?”
“루왁(Luwak).”
그 말을 들은 형우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루왁이라면 혹시….”
“그래, 고양이 똥 커피.”
“푸흡!”
형우는 그만 먹던 커피를 그대로 뿜었다.
“으앗, 죄송합니다!”
커피로 엉망진창이 된 테이블을 보며, 형우는 재빨리 휴지를 뽑아 들었다.
분명한 실례였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찮니? 사레들렸어? 내가 치우마, 너는 가만 있어라.”
하지만 한다은 교수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등을 툭툭 두드려 줬다. 그 덕에 기침은 순식간에 멎었다.
‘맞다, 원래 이런 분이셨지.’
권위적인 모습 없이 털털한 성격. 학생들 사이에서 교수 인기 투표를 하면 한다은 교수가 늘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쯤이면 괜찮겠지.”
대충 정리가 끝난 후, 형우와 한다은은 그대로 마주 앉았다.
“너랑 이렇게 상담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이번 학기까지가 휴학이었지, 아마?”
“맞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복학에 관련되어서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복학이라… 그럴 때가 됐지.”
총합 이백 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휴학한 학생까지도 꿰뚫고 있는 모습에 형우는 조금 놀랐다. 그 사이 사향고양이 똥 커피… 아니, 루왁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교수님이 말을 이어나갔다.
“…복학을 하고 싶으면 내가 아니라 조교를 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네가 그걸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가 더 있는 모양이지?”
“맞습니다.”
역시 눈치 백단 교수님. 형우는 한다은의 미소에서 포근함을 느끼며, 부담 없이 가지고 왔던 주제를 꺼내놓았다.
“교수님. 4학년은 조기졸업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