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27화 (27/200)

#26.

우직.

지원의 손이 바르르 떨리며, 쥔 커피캔이 조금 으스러졌다. 천우희 때문이었다.

‘아주 그냥, 별짓을 다 하고 있어!’

다른 작가랑 내기를 했으면 지든 이기든 글로 승부할 것이지, 비겁하게 여론 조작이라니!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공론화를 시켜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었지만, 지원은 일단 참았다. 정 때문은 아니고, 비즈니스 때문이었다.

천우희가 계약하고 있는 회사가 C&N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즉, 천우희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리면 퍼트릴수록 회사에는 누가 된다는 뜻이다.

만약 형우가 천우희에 대한 처벌을 강력하게 원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형우는 이 일을 그저 자그마한 해프닝 정도로 취급하는 듯했다.

‘나쁘게 끝났다면 모를까, 좋게 끝났잖아요. 이왕 글로 승부하자고 했으니까. 그걸로 승부 보고 싶어요.’

정말이지, 천우희가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 싶은 대인배스러운 태도였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요?’

‘흐흐, 그 덕분에 독자 5천 명이 늘었는데.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천우희 덕에 지난 며칠 사이 형우의 소설은 의도치 않은 바이럴 마케팅과 인플루언서 마케팅 덕분에 미친 상승세를 기록했다. 잘된 광고의 예로 광고학과 교과서에 실릴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달성한 선작 수가 2만 5천. 유료화 후에 선작 수가 오르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인데, 염원하던 2만의 벽을 넘은 것은 물론 이제는 3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득이 됐고, 또다시 일을 벌일 것 같지도 않은걸요.’

억지로 일을 키우려면 충분히 키울 수 있겠지만, 형우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천우희에게는 나중에 따로 볼 일이 있었다.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는 거지.’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제갈량은, 남만의 왕 맹획과 싸울 때 그를 일곱 번 사로잡은 뒤 일곱 번 풀어줬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제갈량의 마음씨가 적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할 정도로 넓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이유는 두 개였다.

첫째는 맹획이 너무 쉬운 상대라서였고,

두 번째는 맹획을 감화시켜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서였다.

지금 형우는 어느 정도, 제갈량의 그런 기분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대신 천우희 작가님에게 위장약이라도 하나 보내 주세요. 배 많이 아프실 텐데.’

‘네. 그렇게 할게요.’

약간 떨떠름하지만, 지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웃고 넘길 일이라고 치부하는 모양인데 괜히 나서서 일을 벌이는 것도 좀 그래서 이번에는 천우희에게 엄중 경고하는 것으로 끝냈다.

‘다시 이런 짓 벌이면, 그때는 가만히 안 있어요. 지금도 일이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이거 경찰서 가도 할 말 없는 거라고요! 운 좋은 줄 아세요, 천우희 작가님!’

‘제, 제송해요, 언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벌벌 떠는 표정을 보니, 재발의 위협은 없을 것 같았다. 커뮤니티 계정도 삭제했다고 했다.

“이래서 작가들 sns랑 커뮤니티는 금지시켜야 한다니까…!”

그 일을 떠올리니 캔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살짝 우그러진 캔이 이번에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픽, 터졌다.

“꺄악!”

비명을 지른 건 자판기 근처에서 배경처럼 존재감을 지우고 있던 윤진이었다. 지원의 분위기가 너무 무서운데, 커피는 마시고 싶고 하니 숨어서 홀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윤진 님? 괜찮으세요?”

“아, 네네. 안 묻었어요. 휴, 산 지 얼마 안 되는 옷인데….”

“그런 옷을 왜 직장에 입고 와요? 놀러 갈 때나 입어야지.”

“저도 그러고 싶은데… 요즘 일이 바빠서 일 끝나면 봄이 다 지날 것 같더라고요.”

“웹툰 때문에요?”

지난 분기, C&N에는 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출판사의 개국공신인 학습만화 부서가 결국 3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말았다. 뉴튜브의 어린이 컨텐츠가 늘어가면서 교육만화가 경쟁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C&N 이사회 내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학습만화부서를 폐쇄해야 한다는 측도 있었고, 지금까지 쌓아온 만화가들과의 커넥션이 아까워서라도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자는 쪽도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꽤 괜찮은 의견을 냈다.

“학습만화 부서와 장르소설 부서를 합쳐서 웹툰을 진행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만화가들과의 커넥션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지원이 생각해도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그거야 좋지만….’

그날 이후, C&N의 장르소설부는 출판사 건물 내에서 가장 바쁜 부서 중 하나가 되었다. 첫 번째 주제는 이거였다.

어떤 소설을 웹툰화할 것인가?

시험작이니만큼,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리고, 편집부의 매니저들은 이왕이면 자신이 담당하는 작가의 작품을 웹툰화시키고 싶어 했다.

“저는 고성춘 작가님의 작품을….”

“임연진 작가님의 이 작품은 어떻습니까?”

“소설머신119 작가님도…!”

과열되는 분위기를 제지한 것은 의외로 공판석이었다.

“자네들 말은 다 이해했어. 알아, 나도. 다 좋은 작품들이지. 하지만 말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번 웹툰은 시범작이잖나. 이게 성공해야 다음 웹툰이 나와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 터트려야 한다고. 뻥.”

공판석이 두 손으로 폭탄이 터지는 시늉을 했다. 편집부의 사람들은 그 말을 한 번에 이해했다.

“<망국의 테라피스트>를 웹툰으로 만들자는 겁니까?”

“그래. 천우희 작가라면 이슈몰이에도 좋잖아?”

매니저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천우희라면, 흐음. 과연….”

“믿을 만하지. 웹툰화 이력도 있고, 이번 작도 괜찮고.”

그렇게 모두의 의견이 <망국의 테라피스트>로 모이고 있을 때, 사람들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손이 올라갔다. 하얀 블라우스에 은빛 팔찌. 수석 매니저인 지원이었다.

“최근에 이슈몰이를 한 작품이라면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전설의 보안관>말입니다.”

* * *

“네? 웹툰이요?”

형우는 깜짝 놀라서 그만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겨우겨우 휴대폰을 붙잡은 형우의 귀로, 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확정은 아니에요.”

C&N의 내부 투표 결과, 형우의 <전설의 보안관>과 천우희의 <망국의 테라피스트>가 거의 반반으로 갈렸다고 했다.

“웹툰 프로젝트가 시작하는 2주 뒤 두 작품을 비교할 거예요. 당연히 더 좋은 쪽이 웹툰으로 제작되는 거죠.”

“천우희. 요즘 그 이름 많이 듣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지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전생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건지, 자꾸만 둘이 얽혔다. 게다가 하필 2주 뒤라니. 그날은 천우희와 형우가 했던 내기의 만료일이기도 했다.

“우연치고는 참 절묘하단 말야.”

형우가 기억하기로 <망국의 테라피스트>의 선작은 거의 3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전설의 보안관>의 선작은 2만 5천 정도.

웹타쿠의 리뷰 덕에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는 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천우희가 가진 로맨스 소설의 여왕이라는 별명은 절대 허명 따위가 아니었고,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이런 호재 정도는 밥 먹듯이 일으킬 수 있었다.

‘글도 글이지만, 연재 기술이 엄청난데….’

답답할 때는 연참을 때리고, 늘어질 때마다 팬아트라도 집어넣었다. 그런 식으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그 기교만큼은 형우도 한 수 배워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저번 화도 팬아트가 올라왔지.’

요즘 천우희는 거의 두 화에 하나꼴로 작품 말미에 팬아트를 달았다. 팬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했지만, 형우에게는 좀 다른 식으로 해석됐다.

‘자기는 아는 작가 많다 이거지.’

천우희도 분명 웹툰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터. 마구잡이로 올리는 팬아트는 마치 자신의 작품이 더 웹툰에 어울린다며 뽐내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이번 화는 작가의 말까지 좀 거슬렸다.

[작가의 말 : 팬아트를 볼 때마다 글 쓸 힘이 막 나네요! 어떤 작품은 100화 다 합쳐도 팬아트 다섯 개도 못 받는다던데… ㅠㅠ]

어제 올린 <전설의 보안관>이 딱 100화째였다. 받은 팬아트도 정확히 네 개. 누가 봐도 저격이었다.

‘드럽게 쪼잔하네.’

아마도 위장약을 받고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다음에는 청심환을 보내 줄까? 그렇게 고민하며 노트북 자판을 톡톡 건드렸다.

“소원 하나 받고, 거기에 웹툰이라.”

생각보다 판돈이 더 커졌다.

소설이 웹툰화가 되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웹툰이 적당한 수준만 돼도 소설의 유입이 눈에 띄게 증가할 것이다. 만약 <나 혼자만 파워 업>처럼 대성공이라도 하면 말할 필요도 없다.

‘꼭 이겨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천우희가 생각보다 강했던 건 사실이지만, 형우에게는 아직 꺼내지 않은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며칠 전이었으면 그게 터져도 힘들었을 텐데.’

웹타쿠 덕에 차이는 아주 근소해졌다. 단순히 독자의 증가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분명, 지난 며칠간 있었던 사건은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 싸움, 내가 무조건 이길 거야.”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글을 쓰는 거였다. 일단 좋은 글을 쓰자.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자.

다시 기지개를 켜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형우. 참치는 이미 그 옆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세 시. 작업을 시작한 지 아홉 시간째였다.

* * *

오늘의 투데이 베스트

1. 우희, <망국의 테라피스트> ★29,111

2. 참새치, <전설의 보안관> ★26,348

“휴, 다행이다!”

천우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이슈몰이로 인한 <전설의 보안관>의 선작(★) 상승세는 자신의 작품과 3천의 차이를 둔 시점에서 한풀 꺾였다. 그 지표를 본 천우희가 슬쩍 미소 지었다.

“2주 남았는데 차이가 3천이라….”

물론 지금의 기세대로만 간다면 형우는 분명 2주 사이에 3천의 선작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우의 작품만큼 가파르지 않을 뿐 천우희의 작품도 상승세인 건 마찬가지였다.

가만있는 사람을 지나치는 것보다는 당연히 앞서 뛰어가는 사람을 잡는 게 힘들다. 계산대로라면 형우가 천우희를 이기기 위해 2주간 늘려야 하는 선독 개수는 3천이 아닌 5천이었다.

“더 볼 필요도 없겠네.”

자신의 승리를 직감하며, 천우희는 오늘 12시에 올릴 <망국의 테라피스트>의 100화를 한번 확인했다. 두 번을 넘게 읽어도 군더더기는 없었다.

문장에는 기교가 넘치고, 캐릭터는 확실했다. 주인공이 자신의 미용 지식을 통해 여드름으로 고생 중인 왕국의 왕비를 자기 편으로 포섭하는 내용은 그야말로 백미였다.

[호호홋, 네 덕분에 파티에서 내가 가장 돋보였단다! 카트린느!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그러면요, 왕비님.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드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크으. 안 봐도 독자들이 환장할 것이 뻔했다. 너무 흔한 설정이라며 태클을 거는 사람이야 몇 명 있겠지만, 크게 걱정은 안 됐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다는 거지.’

클리셰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작가의 역량이다. 괜히 정도를 무시하고 클리셰 부수기를 시도했다가 작품을 말아먹은 사례는 수십 개도 넘었다. 클리셰가 클리셰인 이유는, 그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건 이미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소원은 뭐가 좋을까. 무릎을 꿇고 싹싹 빌라고 할까? 아니면 하루종일 백화점을 끌고 다니며 짐꾼으로 부릴까?

어떤 식이든, 최대한의 굴욕을 줄 생각이었다. 다시는 감히 자신에게 까불지 못하도록. 애초에 입문한 지 이제 반년이 되어 가는 초짜와 이렇게 진심으로 싸운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감히 나를 놀려? 두고 봐! 잔뜩 굴욕을 준 다음에, 보란 듯이 위장약을 던져줄 테다!’

천우희가 책상 위 위장약을 보며 중얼거렸다. 형우가 지원을 통해 보냈던 위장약이었는데, 보자마자 약이 올라 눈이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일부러 버리지 않고 놔뒀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에 누워 곰의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던 고사의 누군가처럼, 천우희는 저 위장약을 보며 몇 번이고 결의를 다졌다.

“아앗, 벌써 1시잖아? 약속에 늦겠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요즘 천우희는 소설 외적으로 꽤 바빴다. 드라마 제작총회에도 얼굴을 비춰야 했고, 웹툰 작가도 직접 고르고 싶었다. 오늘은 그중 후자. 웹툰 작가의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어제 만난 애는 그림체가 좀 별로였고, 오늘 만난 애는 좀 쓸만했으면 좋겠는데.’

벌써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천우희는 그대로 노트북을 덮었다. 책상 앞에 앉은 지 고작 세 시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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