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끄아아아아, 다 끝냈다!”
한국대학교 문예창작과 4학년 창작실의 내부에서 거대한 고함이 터져나왔다. 고함을 지른 사람은 형우의 절친한 친구인 서의재였다.
“선배 벌써 끝냈어요?”
“그래. 연수야, 너는 얼마나 남았냐?”
“저도 이것만 고치면 끝나요.”
시계를 바라보니 일곱 시. 교수님이 말한 과제 커트라인이 오늘 열 시까지였으니, 어떻게 아슬아슬하게 맞춘 셈이다.
“텅텅 비었네요.”
창작실 주위를 쓱 둘러본 연수가 중얼거렸다. 저번 학기만 하더라도 이 창작실에는 형우와 현수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둘 뿐이었다.
현수는 대학문학상에 등단한 이후 교수님께 허락을 받고 칼럼을 쓰는 출판사에 조기 취업해서 격주마다 문학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우는 현수의 축하연에서 공태준과 한판 크게 싸움을 벌인 후에 그대로 휴학계를 냈다.
“후우, 현수 선배야 뭐 걱정도 안 되는데… 형우 선배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시골에 가서도 글을 쓸 거라고 호언장담하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학교에 하루종일 묶여 있으면서도 가끔은 쓰기 싫어지는 게 글이라는 건데.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안 그래요, 의재 선배?”
“뭐가? 형우 지금 서울에 있을 건데.”
“…뭐라고요?”
“엉. 오늘 무슨 출판 계약인가 뭔가 맺는다고 서울 올라온다고 하더라. 형우가 말 안 했어?”
연수의 표정을 보자마자 의재가 재빠르게 말을 고쳤다.
“말 안 했나 보네.”
“아니! 그 선배는 서울에 오면 온다고 말이라도 하지! 그러면 한 번 만날 수 있잖아.”
“안 그래도 내가 그 이야기 했는데, 괜히 시험 기간에 폐 끼치고 싶지 않다더라.”
형우답다면 형우다운 이유였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라도 좀 해 주지.”
“그건 나도 의외네. 너 형우랑 친하잖아. 분명 이야기해 줬을 줄 알았는데. 요즘 연락 안 하냐?”
“솔직하게 말하면… 선배 시골 간 이후로는 좀 뜸했어요. 미안해서요.”
“뭐가 미안해?”
“괜히 저 때문에 휴학했잖아요.”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공태준 때문이지.”
“그때 제가 주먹질만 안 했어도….”
그렇게 괜한 죄책감에 연락을 망설이다 보니 어느새 연락이 뜸해져 버린 것. 의재가 옆에서 한소리 했다.
“어차피 형우는 그런 거 신경도 안 쓸 텐데, 뭘 혼자 그러냐?”
“아무리 그래도….”
“오히려 걔는 네가 연락 안 해줘서 섭섭하다 생각하고 있을 걸?”
“그럴까요?”
“답답하다 답답해.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아. 이래서 착한 애들 둘이 모이면 재미가 없다니까? 사이다 가져와! 사이다!”
그렇게 말하며 과장되게 가슴을 탕탕 치는 의재. 그 모습을 본 연수의 손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즐거워요?”
“어. 아주. 난 지금 즐거운 의재 모드야.”
“한 마디 더 하면 덜 즐거운 의재가 될 걸요.”
“히익.”
의재가 재빨리 꼬리를 말았다. 연수는 고등학교 때까지 전문적으로 격투기를 배웠다. 게다가 지금도 주말마다 격투기 도장에서 취미 삼아 스파링을 뛰는, 문창과의 론다 로우지였다.
“처신 잘하라고.”
“…격투기 배운 사람이 주먹 휘두르면 살인죄라던데, 넌 그런 거 없냐?”
“타격기 아니라서 상관없어요. 하던 일이나 해요.”
“젠장. 이렇게는 못 살아!”
의재는 가끔 과거가 그리웠다. 연수의 풋풋한 새내기 시절. 그녀는 격투기를 배웠던 과거를 꼭꼭 숨긴 채 문학소녀를 연기했더란다.
하지만 그 연기는 금세 들통났다. 기반 지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늦으면 고등학교 초입, 빠르면 초등학생 시절부터 작가를 꿈꿔왔던 다른 학생과는 다르게, 연수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건 고등학교 말이었다.
격투기로 배운 백전 연마의 정신으로 정진한 끝에 한국대학교 문창과에 기적적으로 합격하기는 했지만, 수업을 따라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매일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도 도저히 진도를 맞춰나가기가 힘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이 소설 쓴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톨스토이야. 둘 다 러시아인이긴 한데.”
그런 연수를 도와줬던 것이 당시 군대를 갓 전역했던 의재와 형우였다. 그중에서도 먼저 친해진 것은 형우였다. 의재와 연수는 형우의 소개로 서로 알게 됐다.
“그나저나 참 신기하네. 연수, 너는 형우랑 어떻게 해서 친해진 거냐?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어라, 제가 말 안 했던가요? 3년 전에 기억해요? 형우 선배가 엄청 화냈을 때.”
“형우가 화를 냈다고?”
의재가 아는 형우는 늘 착하고 순둥순둥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런 형우가 화를 낼 때가 딱 한순간 있기는 했다.
“…기억나. 아마 그때, 누가 남이 열심히 쓴 소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 것 같았는데.”
“맞아요. 그때 쓰레기통에 버려진 소설이 제 거였어요. 제가 좀 못 썼거든요.”
그때의 형우는 정말 말 그대로 불같이 화를 냈었다. 어떻게 남이 쓴 글을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가 있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선배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어요.”
“나도야. 역린(逆鱗)이라는 거지.”
그때 이후로 한국대학교 문창과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생겼다. 형우 앞에서는 뭐든지 해도 된다. 하지만, 글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대로 지옥을 보는 거야. 원래 평소 얌전하던 놈이 화내면 더 무섭거든. 그나저나 범인은 잡았던가?”
“못 잡았어요.”
“그것 참 아쉽네.”
의재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연수는 그날 자신이 쓴 소설을 쓰레기통에 버린 범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걸 영원히 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왜, 왜 이래?”
천우희는 놀란 표정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도 예, 예만 하는 초식남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의 형우는 뭐랄까. 느낌부터가 달랐다. 초식은커녕, 한 마리 커다란 맹수를 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랄까.
“다시 말해 보시라고요. 제 글이 뭐요?”
“그, 그게….”
“우희 작가님 글 잘 쓰시는 거 세상이 다 알죠. 근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쓴 거,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읽어보기라도 했으면 내가 말도 안 하는데요, 읽어보지도 않았잖아요.”
“잠깐, 잠깐만.”
쨍그랑!
갑작스럽게 바뀐 형우의 분위기에 놀란 천우희가 놓쳐버린 컵이 깨지는 소리였다. 카페의 모든 눈이 형우 일행을 향해 집중됐다.
“뭐야, 뭐야, 싸우나 본데?”
“근데 방금 우희 작가라고 하지 않았어? 혹시 천우희 아냐?”
“천우희가 누군데?”
“있잖아. 이번에 KBC 드라마 작가….”
주위를 한번 살핀 지원이 재빨리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작가님들, 그만 하세요, 그만!”
“언니! 이거 내 잘못 아니야. 저 사람이….”
“천우희! 너도 적당히 해!”
“바, 반말을….”
지원의 고함에 천우희의 말이 쏙 들어갔다. 그러고 나니, 카페에 침묵이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서 나가요!”
지원은 카페에 모인 사람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하며 천우희와 형우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도착한 곳은 흡연 부스 앞이었다.
치익.
지원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우희 작가님은 담배 안 피우시고, 형우 작가님은요?”
“저, 저도 안 핍니다.”
“그래요. 그러면 잠깐 가만히 있어요.”
순식간에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지원이 담배 세 대를 연달아 피우는 동안, 천우희와 형우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적당히 듣고 흘리려고 했는데, 듣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너무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위이잉-
흡연실의 문이 열리고 담배를 다 피운 지원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대체 어쩌시려고 그래요? 아실 거 다 아시는 분들이.”
“언니,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요?”
그 사이, 천우희는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참 부러운 회복력이었다.
“그래요. 말이 너무 심한 건 맞아요. 하지만 그 내용은 뭐, 솔직히 틀렸나? 나보다 더 잘 파는 사람 없는 거 맞잖아.”
그 말을 들은 형우는 또다시 심사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돈이 작품의 전부입니까?”
“전부죠. 자본주의 시장이고, 장르문학 시장인데. 그래요, 가끔 그런 사람들 있어요. 문학 평론가랍시고 거드럭대는 사람들. 노벨 문학상 받은 작품은 위대한 작품이고, 영국 판타지소설 협회상 받은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는 쓰레기고. 당신도 그런 입장이에요?”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됐죠, 뭐. 문학성? 저는 그런 거 안 믿어요. 문학은 시장이고, 시장은 매출이야. 돈이 전부라고.”
천우희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모든 것은 돈으로 평가받는 것이 옳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조금 슬픈 문학관이라고도 생각했다.
소설을 쓰면서 느낀 즐거움, 잘 쓰기 위한 노력, 그런 모든 것들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우희의 말은 결국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고 중요한 것은 오직 매출뿐이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매출이 나오지 않는 다른 작품들을 허섭스레기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작가보다 출판사에 많은 돈을 안겨주는 작가예요. 그렇죠, 언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당신은 끼어들지 마! 이건 지원 언니랑 내 문제니까. 맞잖아?”
잠시 고민하던 형우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태도가 글러 먹었을지언정, 천우희의 말은 확실하게 정곡을 찔렀다. 편집부의 결정에 대해서 형우는 간섭할 권한이 없었다. 형우의 표정을 본 천우희가 보란 듯이 턱을 하늘 위로 척, 치켜올렸다.
“어때요, 언니? 제 전담을 해 주실 거죠?”
“…우희 작가님.”
천우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지원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언니.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지금이라도 정신 차렸으면 된 거야.”
“…뭔가 오해하신 것 같네요, 작가님. 이 사과는 제가 한 잘못에 대한 사과가 아닙니다.”
“…그러면?”
“앞으로 할 잘못에 대한 사과, 일까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천우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잘못을 할 건데?”
“…다른 좋은 편집자 찾으시길 바라요. 작가님이랑 함께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방금, 뭐라고?”
천우희가 입을 쩍 벌렸다. 지원의 거절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 특유의 오만한 표정이 변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하, 미쳤어. 언니 지금 완전 미쳤다고요. 감히 매니저 주제에 나를 까?”
오히려 그녀는 그 오만함을 더욱 두껍게 뭉쳐 온몸을 꽁꽁 감쌌다.
“그래요, 나도 언니 같은 사람 필요 없어! 어차피 편집자 그거, 괜히 잔소리나 해 대는 성능 좋은 맞춤법 교정기 같은 거 아닌가?”
“말이 심하시네요.”
끼어든 것은 형우였다. 사실 이전부터 끼어들고 싶었지만, 이제야 명분이 생겼다.
“당신도 작가라면 편집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왜 말을 막 하시죠?”
“중요하긴 무슨. 난 필요 없어. 못 믿겠으면 내기할까?”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천우희가 형우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맞아, 당신도 작가잖아. 게다가 5위 안에도 든 적 있다며? 그러니까 한 판 붙어 보자.”
“…붙자고요?”
“앞으로 50일 후에, 누가 더 매출액이 나은지 그걸로 결판을 내자고. 물론 나는 말 번복 안 해. 편집자는 안 써. 당신은 편집자를 쓰든 뭘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해.”
천우희가 이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네가 지면, 네 글이 허섭스레기라는 걸 인정하고 내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
“제가 이기면요?”
“그럴 일은 죽어도 없겠지만, 뭐든지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물론 쫄았다면야….”
“좋아요, 하겠습니다.”
설마 정말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껌뻑거리는 천우희를 향해 형우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 표정이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당연한 일이다.
‘이길 싸움을 왜 피하냐?’
순진한 글쟁이인 형우는 포커페이스 같은 건 하는 법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