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23화 (23/200)

#22.

“아하, 작가님이셨구나. 난 또, 양복 입고 있길래 출판사 막내 직원쯤 되는 줄 알았지 뭐야.”

지원의 설명 덕에 이상한 오해는 금방 풀렸지만, 사과는 끝까지 안 했다.

오히려 지원을 살짝 노려보는 것이, 왜 진작에 말해 주지 않아서 불편한 상황을 만드냐고 힐책하는 듯했다.

‘이 인간, 작품 세계랑은 완전 딴판이네.’

천우희의 작품 속에는 늘 핍박받지만 당차고 정직한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피나는 노력 끝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스스로의 자리를 되찾는다.

천우희는 오히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악역 캐릭터를 더 닮았다. 주인공을 무시하고, 핍박하다가, 끝끝내 나가떨어지는 악당들 말이다.

‘뭐, 꼭 소설가가 주인공이랑 비슷하리라는 법은 없지만.’

자신만 보더라도 <서울낭인괴담>의 주인공인 철용이나 <전설의 보안관>의 주인공인 헤럴드와는 확연하게 성격이 달랐다.

만약 형우가 철용이나 헤럴드였다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광경을 그저 참고 넘기지만은 않았으리라.

“지원 언니, 이거 향 어때요? 이번 연도 신상인데, 나는 이런 시트러스 계열 향이 좋더라. 꽃냄새 나는 건 너무, 철없는 애들 같잖아.”

“아하하… 우희 작가님은 그러시구나.”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하하, 맞다. 지원 언니는 꽃향기 좋아하지. 오늘도 꽃 냄새네. 블라썸? 완전, 나 고등학교 때나 쓰던 건데.”

원래 저런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화가 난 건지, 천우희는 계속해서 은근슬쩍 지원에게 저렇게 꼽을 줬다.

‘좀 너무하잖아.’

고마운 사람이 모욕을 당하는 걸 보고 있는 건 힘든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왜 저런 말을 듣고만 있어요? 라며 팔이라도 잡아채고 싶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천우희를 원하는 출판사는 C&N이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많았고, 천우희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저렇게 안하무인 격으로 나오는 거지.’

괜히 끼어들었다간 오히려 지원에게 폐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흐응, 점장님? 2020 신상 이거하고요, 그리고 저거. 저것까지 주세요.”

그 사이 천우희는 쇼핑을 마친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른 것들은 진열되어 있던 상품들 중에서도 가장 가격이 높은 것들이었다. 점원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헤헤, 다 합쳐서 124만 3700원입니다!”

“고급 매장이 무슨 백 원 단위를 매겨? 알았어요. 보자 보자, 지갑이… 어라?”

그렇게 코트 안을 뒤지는 시늉을 하던 천우희가 지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언니, 저 지갑을 두고 온 것 같은데요? 어쩌지? 집에 다시 다녀오긴 너무 먼데….”

천우희가 긴 손가락을 뻗어 지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 모습을 보는 형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꼴값 떨고 있네.’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뻔하디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천우희가 바보라서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였다. 을TM. 명백한 갑질이었다.

“알겠습니다, 작가님.”

“어머, 언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깐!”

지원은 체념한 듯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형우의 눈에 불꽃이 확 튀었다.

‘돈도 많은 양반이 편집자를 벗겨 먹어?’

유명 작가라는 이유로 저래도 되나 싶었지만, 사회는 냉정했다. 유명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저래도 됐다. 소설이라면 지금쯤 주인공이 나서서 사이다를 펑 터트려 줘야 하는 씬이다.

그러니까, 형우가 헤럴드나 철용이었다면.

분명 천우희를 가만 두지 않았을 테다. 남의 눈치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그대로 박살 내 버렸겠지.

댓글은 이 집 사이다 잘하네 이런 걸로 도배됐을 테고. 하지만 형우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서부의 보안관도, 침몰한 도시의 헌터도 아니었으니까.

형우는 그저 21세기의 평범한 소시민이자, 이제 갓 작가가 된 풋내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풋내기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저기요, 천우희 작가님?”

천우희는 대답하는 대신 형우를 힐끗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태도였다.

‘하고 싶은 말은 없는데.’

해야 하는 행동이 있었을 뿐. 천우희에게 뚜벅뚜벅 다가간 형우는 그대로 그녀의 길고 치렁치렁한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쑥 집어 넣었다. 천우희가 비명을 꺅 질렀다.

“뭐야, 뭐, 뭐 하는 짓이야?”

“뭐긴요. 지갑 찾아드리는 거지.”

아까 천우희가 코트를 건네줬을 때 왼쪽 주머니가 묵직했었다.

“봐요, 여기 있잖아!”

“세, 세상에…!”

얼떨결에 지갑을 받아 든 천우희는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고함과 욕설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지금부터가 진짜로 중요하다!’

형우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천우희에게 순박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예전에 지갑 잃어버린 줄 알고 다시 산 적 있었거든요! 완전 아까웠는데. 헤헷. 작가님은 그렇게 안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조금 멍청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 그, 그게… 왜 거기에 있죠?”

화를 내려던 천우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화도 명분이 있어야 내는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준 사람한테 욕을 하면 그건 미친 사람이다.

상황을 알고 일부러 비아냥거린 거면 트집이라도 잡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형우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영락없이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고 즐거워하는 소시민의 모습이었다. 천우희가 험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고, 고마워요. 그게 거기 있는 줄은 차마 몰랐네.”

“뭘 이 정도로요. 지갑 찾으셔서 다행이에요. 카드도 이 안에 있네요. 와, 블랙 카드네. 이거 한도 엄청 크다던데.”

천우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기서 더 을TM을 시도하는 건, 그건 그냥 사 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거나 다를 게 없었다.

사회생활이란 건 꽤 오묘해서, 누군가가 뭔가를 ‘사 주게’ 만드는 것과 뭔가를 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완전 다른 취급을 받았다. 전자는 은근한 권력의 표현이었지만, 후자는 오히려 제 얼굴 깎아 먹는 일이랄까.

결국 천우희는 124만 3천 700원을 자신의 카드로 긁을 수밖에 없었다.

삑.

카드 긁히는 소리가 얼마나 경쾌하던지. 지원이 돈을 쓰지도 않았고, 천우희와 출판사의 관계가 나빠지지도 않았다. 자신과 천우희의 관계? 조금 나빠졌을 수도 있지만.

‘아니, 확실하게 나빠졌네.’

계산을 마친 천우희는 죽일 듯한 기세로 형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도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면 그건 분명 미친놈이다.

‘알게 뭐람. 어차피 볼 사이도 아니고.’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 * *

이쯤 됐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줄 알았건만, 천우희는 생각보다 더 집요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끝끝내 카페까지 따라와서는 둘의 사이에 턱 하니 걸터앉았다.

“제가 살게요. 작가님들, 뭐 시키시겠어요?”

“저는 아메리카노요. 아이스로.”

“천우희 작가님은요?”

“늘 먹는 걸로요. 아이스 카푸치노 더블샷에 휘핑 추가. 얼음은 거품 아래로 넣어주고, 계피는 많이. 아, 우유 말고 두유로요. 그리고 메이플 시럽 두 펌프만 따로 담아달라고 해 주세요.”

무슨 바리스타 시험 문제도 아니고, 살면서 저렇게 길게 주문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하지만 지원은 한번 들은 것만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지원이 가버리자 테이블에 남은 것은 형우와 천우희, 둘 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침묵이 흐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천우희였다.

“작가님이라고 하셨죠? 무슨 작품 쓰세요?”

“<전설의 보안관>이요. 서부극이죠. 최근 유료화 했습니다.”

“흐음… 처음 들어보는데. 죄송해요. 저는 투데이 베스트 5위 안에 든 작품 아니면 잘 안 읽거든요.”

“5위 안에 들었는데요.”

5위라는 말을 들은 천우희가 약간 관심을 보였다.

“그래요? 별 개수(선호작)는 몇 개나 되는데요?”

“지금 아마 만 팔천 개 정도….”

“에게?”

한껏 무례하게 말한 천우희가 과장스럽게 자신의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말실수를… 조금 놀라서 그랬어요. 제가 5위 안에 들었을 때는 2만 5천이 조금 넘었나, 그랬거든요. 후우, 장르 시장이 힘들긴 한가 봐요. 만 팔천이 5위에 들고.”

천우희는 말에 뼈를 실었고,

“아하 그러시구나. 정말 대단합니다.”

형우는 말에서 영혼을 뺐다.

‘멋대로 말하라지.’

그냥 신경을 안 쓰기로 했다.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는 이상 괜히 신경을 써 봐야 손해일 뿐이다.

하지만 천우희는 그걸 일종의 패배 선언으로 이해했는지 계속해서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두 번째 작품은 올린 지 일주일 만에 1위를 찍더라고요. 근데 이것도 최근에 쓴 것만 못 해. 들어 봤죠? <블랙 기업인데 사장님 얼굴이 최고의 복지!> 이번에 KBC에서 드라마화되는데, 글쎄 주인공 배우가 누군지 알아요?”

“누군데요?”

“아직 엠바고긴 한데… 어디서 퍼트리지 마세요. <허깨비> 나왔던 김동욱 알죠? 그 사람이 주연이에요. OST는 JK이동욱이 불러주기로 했고.”

열심히 설명하며, 천우희는 계속해서 형우에게 눈짓을 살살 줬다. 너랑 나의 차이가 이 정도다.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김동욱 배우에 JK이동욱이라. 대단하네요.”

“뭐, 평범하죠. 소설가라면 다들 한 번쯤은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어요?”

“아하.”

난 소설가도 아니라는 건가? 화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의 화법은 거의 이래도 화 안 내? 라고 묻는 수준이었다.

‘뭔 쌈닭도 아니고.’

한 판 붙고는 싶은데 명분이 없으니 못 배기게 긁어 파겠다는 괘씸한 심보였다.

‘작가 대 작가로도 이 모양인데, 편집자인 지원 님은 어떤 기분일까?’

그 사이, 커피를 들고 온 지원이 자리에 앉았다. 형우는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지원을 바라봤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요.”

“눈빛이 꼭… 베놈이 스파이더맨 쳐다보는 표정인데요. 톰 홀랜드 말고, 토비 맥과이어요.”

“…MJ가 세 번째로 납치당했을 때요? 막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면서?”

“맞아요. 정확해요.”

무슨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이해가 될 것 같은 비유였다. 천우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다들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아니에요. 커피나 마시죠.”

곧이어 형우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천우희의 앞에는 어쩌고저쩌고 카푸치노가 놓였다. 지원이 시킨 것도 형우와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빨대로 음료를 빨아 먹은 천우희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딱 맞게 시켰네.”

그 모습을 본 형우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귀가 밝은 형우는 방금 지원이 주문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개하고요, 흐음… 뭐더라. 카푸치노 대충 이것저것 넣어서 만들어 주세요.’

‘대충 이것저것이요?’

‘옵션 있는 대로 다 집어넣어 주세요.’

‘손님, 그러면 음료 맛이 좀 이상할 수도 있는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저 먹을 거 아니라서요. 가능하지요?’

옆을 보니, 지원도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인 것 같았다. 결국 형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어요?”

“아닙니다. 어제 본 <일박도전>이 생각나서.”

“쯧, 작가라면 글을 써야지. 그깟 예능이나 보고 있으면 되겠어요? 그나저나, 지원 언니.”

‘이것저것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우희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작품은 어차피 처음부터 C&N이랑 할 생각이었어요. 다음 주 유료화 예정이고. 앞에 세 작품 다 지원 언니랑 했는데, 이제 와서 꺾기도 좀 그렇잖아? 그런데 조건이 좀 있어요.”

“조건이요?”

“별 건 아니고, 1인 매니저로 해 줘요.”

1인 매니저. 오직 한 명의 작가만 담당하는 편집자들을 이야기하는 거다.

“그건… 힘들어요. 이미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이 많아서.”

형우와 안재욱, 그리고 성민준을 포함해 지원이 관리하는 작가들은 열 명이 넘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천우희는 막무가내였다.

“저도 이제 이름값 좀 붙었는데, 언제까지 조무래기들이랑 같은 취급할 거예요?”

조무래기, 라고 발음하며 천우희가 형우를 슬쩍 바라봤다. 이래도 네가 가만 있을 수 있나 보자,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잘 골라요. 나 천우희인지, 아니면 다른 허섭스레기 같은 작품들인지. 생각할 것도 없잖아.”

허섭스레기. 그 단어를 듣자마자 형우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고, 목소리가 낮아진다.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방금 말, 선 좀 씨게 넘은 것 같은데.”

모든 인간에게는, 그 어떤 타인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형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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