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20화 (20/200)
  • #19.

    “어제 보낸 표지 일러스트 말씀이시군요!”

    “네. 일러스트를 확인해 봤는데요, 조금 문제가 있더군요.”

    “문제라니요? 무, 무슨 문제입니까?”

    수화기 너머로도 공판석의 긴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형우는 괜히 조금 뜸을 들였다.

    “바로 제가 이 일러스트를 지금에서야 볼 수 있었다는 게 그러합니다.”

    “…그 말은! 감사합니다!”

    “…만약 일찍 봤었다면 이 표지가 얼마나 구린지 미리 알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허억.”

    “농담입니다. 마음에 들었어요.”

    공판석을 조금 쥐락펴락한 후에, 형우는 솔직하게 소감을 이야기했다. <전설의 보안관>의 표지 일러스트는 정말로 끝내줬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형우는 새로 산 노트북의 바탕화면도 그걸로 바꿔 뒀다.

    갈색 보안관 모자를 쓰고, 리볼버를 들고 있는 헤럴드. 그리고 그 옆에서 긴 금발을 휘날리고 있는 살짝 건방져 보이는 표정의 베아트리체. 단지 그림체가 유려한 것뿐만이 아니다.

    디테일도 잘 살렸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대로 헤럴드의 권총은 콜드 워커사社의 드라군 모델이었고, 베아트리체가 쓰는 건 윈체스터사에서 나온 M73이었다.

    “이 정도로 퀄리티는 사실 기대도 안 했는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조건은….”

    공판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우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어로 하지요.”

    휴우, 하고 수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형우는 C&N과 계약을 맺으면서, 총 세 가지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선인세로 충분한 돈을 지급해 줄 것.

    둘째. 능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를 통해 퀄리티 높은 표지를 그려 줄 것.

    그리고 세 번째. 작품 프로모션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 줄 것.

    기성이라면 모를까, 신인 작가에게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공판석은 형우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자기 물건은 잘 챙겼어야지.’

    형우는 서랍을 열어 계약서 하나를 꺼냈다. 공판석이 형우에게 내밀었던 불공정 계약서였다. 미팅룸에서 지원을 만나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공판석은 이 중요한 걸 미팅룸에 그대로 두고 갔다. 형우는 놓치지 않고 계약서를 챙겼다. 혹시 몰라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처음에는 그대로 확 폭로해 버릴 생각이었다. 물증도 있겠다, 거리낄 것도 없었다. 초범이라면 모를까, 공판석은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불공정 계약서로 같은 사고를 친 이력이 있다고 들었다.

    한 번이면 실수지만 두 번은 고의다. 공판석은 분명 업계에서 쫓겨날 테고, 형우는 그가 없는 C&N에서 새롭게 계약을 진행하려고 했다.

    “작가님! 저 공판석입니다!”

    공판석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제야 계약서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답게,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형우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작가님, 저 좀 제발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습니다. 정말로, 맹세합니다!”

    “됐습니다. 편집장님 말은 못 믿거든요.”

    한 번 거짓말한 사람이 두 번은 못 할까. 형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소설을 쓰다가, 평소처럼 잠에 들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눈을 뜨지는 못했다.

    “작가님, 작가님! 제발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공판석이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대체 주소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의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순식간에 형우의 집 앞에 몰려들었다.

    “저 사람 뭐하는 거여?”

    “출판사 사장인가? 그렇다는디. 형우 찾아온 것 같던데.”

    “형우를? 오메메. 사장이 찾아올 정도면 성공했나 보네.”

    작은 마을이라 소문도 빨랐다. 아침 일찍 밭일을 나가셨던 어머니가 버선발로 헐레벌떡 달려올 정도였다.

    “형우야! 네가 출판사를 인수해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게 대체 무슨 이야기니?”

    “…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난 듯해서, 형우는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 문밖에 있는 사람이 너한테 사기를 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따지자면 그렇죠.”

    “그렇다는거지. 알았다.”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머니는 별말 없이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툭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악, 어머니! 그만둬요!”

    “그만두긴 뭘 그만둬! 저 후레자식을 그냥!”

    “이 날씨에 물벼락 맞으면 몸살 난다니까요?”

    어머니는 대야에 찬물을 가득 담아 담장 밖으로 집어던지려고 했다. 형우는 어떻게든 저지하려고 했지만, 매일같이 글만 써 온 형우가 시골의 고된 농사일로 단련된 어머니를 힘으로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쏴아아!

    어머니가 힘차게 내지른 물벼락이 그대로 허공을 갈랐고,

    “으아아악!”

    담장 너머에서는 공판석의 비명이 들렸다. 너무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동시에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형우는 공판석이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날 줄 알았다.

    ‘오산이었지.’

    공판석은 물벼락을 맞은 모습 그대로, 계속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옷이 다 마르기도 전에 밤이 먼저 찾아왔다. 5월의 밤은 여전히 쌀쌀했다.

    “어, 문 열렸다!”

    “진짜네! 형우가 나왔나벼!”

    형우는 결국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잔뜩 모여서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워낙 일이 없는 시골이다 보니 이해는 됐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 있으면 감기 걸려요. 집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용서해주기 전까지는 못 들어갑니다!”

    공판석이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형우의 태도가 더 완고했다.

    “됐어요. 그런다고 제 생각 안 변해요.”

    “저한테는 토끼 같은 아이와 여우 같은 마누라가 있습니다.”

    공판석이 벌벌 떨며 형우에게 매달렸다.

    억지를 써서 안 되니, 그다음은 신파인 것 같았다.

    ‘억지를 써서 안 되니 그 다음은 신파? 무슨 싸구려 3류 영화도 아니고….’

    형우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판석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형우에게 달라붙었다.

    “한 가정을 지켜주신다 생각하시고 이번 한 번만….”

    “그만.”

    형우는 손을 들어 판석의 지리멸렬한 변명을 제지했다.

    “저도 우리 어머니 아들이에요.”

    “예?”

    “그리고, 당신이 등쳐 먹었던 사람들도 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고, 형이고 동생이었을 텐데. 편집장님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셨잖아요?”

    공판석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단순히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형우의 말은 날카로웠고, 눈빛은 그보다 더 매서웠다. 판석이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올렸다.

    “오백… 오백만 원 드리겠습니다. 선인세로요.”

    “…뭐라고요?”

    “조만간 작품 연재하실 거 아닙니까? 일러스트레이터도 최고로 구해 드리겠습니다. 프로모션도 팍팍 넣고요.”

    “하아.”

    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억지, 신파, 그다음은 흥정이었다. 자기가 정정당당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남을 비겁하게 만들겠다는 저 태도.

    저런 사람이 출판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 판석을 퇴출시키고야 말겠다는 형우의 다짐은 겨울날의 얼음처럼 점점 확고하고 단단해져 갔다.

    “제가 그런 것에 넘어갈 줄 아셨어요?”

    “…예?”

    “다른 작가들 등쳐 먹은 사람이랑 공범 되면서까지 부귀영화 누리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들어오기 싫으시면 마세요.”

    “자, 잠시만요!”

    문을 닫으려는 순간, 판석이 형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일을 눈감아 주시겠습니까?”

    “놔요, 놔! 바지 벗겨져요!”

    “제발! 제발! 작가님!”

    하필 입고 있는 건 긴 편하기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잘 벗겨지는 몸빼바지였다. 게다가, 공판석은 얼마나 절박했는지, 바지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입은 속옷까지 함께 잡았다.

    “야, 박채미! 고개 안 돌려?”

    “히히.”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채미는 하라는 수능 공부는 안 하고, 이 밤중에 밖에까지 나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형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작가님, 제발!”

    “놓으라니까!”

    그 와중에도 공판석은 무슨 전래동화 속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우의 바지 고무줄을 꼭 붙들고 놓아줄 생각을 안 했다.

    이러다가는 온 동네 사람 앞에서 스트립쇼를 하게 생겼다. 그 꼴만은 피해야 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일단 놔 봐요!”

    “정말요? 알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놓으라고요! 바지 찢어져!”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형우는 그대로 판석과 마주 앉았다. 어머니가 판석을 보며 인삼차 두 잔을 내왔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개뿔이.”

    아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고 한 상대에게 말이 고울 리는 없었다. 침 안 뱉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편집장님께서 지금까지 불공정 계약으로 피해 본 사람들 다 만나서 사과하시고 보상 원하는 분께 합당한 보상을 쥐여 주신다면, 그러면 함구하겠습니다.”

    형우의 입장에서는 안 된다는 말을 약간 돌려 말한 거였다. 하지만 공판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공판석은 그대로 형우의 고향을 떠났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김형우 작가님, 저 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공판석은 뭔가를 바리바리 들고 와서 형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다 뭡니까?”

    “작가님 말씀대로 받아 왔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합당한 보상을 해 줬다는 일종의 증명섭니다.”

    자필로 써진 성명서는 총 여덟 장이었다. 참 많이도 등 처먹었네. 그렇게 생각하며 증명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공판석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골프장 회원권 팔고 적금 깼습니다.”

    결국에는 돈으로 해결했다는 뜻이다. 그 부분이 형우는 살짝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진심 어린 사과, 인간 대 인간의 감동 그런 전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닌가? 그런 것보단 현금이 더 나은가?’

    뭔가 찜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 뱉은 약속을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좀 그랬다.

    “알겠습니다. 제가 졌어요.”

    “그러면, 함구해 주시는 겁니까?”

    “약속이니까요.”

    “감사합니다.”

    공판석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형우는 그 앞에서 즉시 휴대폰으로 찍었던 계약서 사진을 모조리 지웠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을 지우자마자,

    “드디어 끝났구만. 힘들어 죽겠네! 아고고고.”

    지금까지 굽혀져 있던 공판석의 허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빳빳하게 펴지기 시작했다.

    ‘뭐지? 기적인가?’

    그야말로 성경에서나 볼 법한 광경에 형우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표정엔 다시 건방이 들었고, 태도는 불손해졌다.

    “거 참, 지금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내 나이가 오십이오. 이렇게 고생시키고서 미안하지도 않소?”

    “헐.”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형우는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판석을 쳐다봤다.

    “저, 편집장님?”

    “편집장은 무슨 빌어먹을 편집장. 내가 왜 댁 편집장이오? 나 같으면 진작에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자고 할 때 넙죽 받았겠다. 세상 사는 법을 몰라도 너무 몰라. 지금 와서 받아달라고 해도 늦었소. 배 이미 떠났다, 이 말이지.”

    공판석이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사진도 지워졌겠다, 더 이상 굽신거릴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저러다 호된 꼴을 한 번 봤으면서도. 참 일관적인 사람이었다.

    ‘배가 떠나긴 뭘 떠나.’

    몇 번 눈을 끔뻑거린 형우는 그대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방을 가리켰다.

    “계약서 원본은 아직 서랍 안에 있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사이로 초침 소리만이 천천히 들려왔다. 째깍, 째깍. 그 소리에 맞춰 공판석의 허리가 다시 조금씩 굽혀졌다. 마치 태엽으로 작동하는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헤헤… 농담인 거 아시죠?”

    “농담을 참 살벌하게도 하시네요.”

    “저, 작가님? 저번에 말했던 그 선인세랑 일러스트, 그리고 프로모션말이죠…, 잠깐 이야기 좀 나누실까요?”

    형우는 방 안에 꼭꼭 숨겨놓은 불공정 계약서 원본을 조금 더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공판석은 약속을 모두 지켰다.

    선인세는 바로 입금되었고, 훌륭한 일러스트도 받았다. 프로모션은 <전설의 보안관>의 유료화 일정에 맞춰 즉시 시작하기로 미리 이야기를 해 놓았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과연 몇 명이나 따라올까?’

    두려움과 기대감이 얽힌 채로 형우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두려움보단 기대감이 조금 더 컸다. 유료화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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