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들켰으니 이제 변명을 하려나? 아니면 사과를 할까?’
…아쉽게도 형우의 예상은 모두 틀렸다.
“허어, 이래서 요즘 작가들은… 좋게좋게 가려고 했더니 아주 출판사가 만만하지? 어?”
공판석은 방귀를 뀌고도 성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뻔뻔한 사람이었다.
“지금 그쪽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김 작가. 이 바닥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아.”
다리를 턱 꼰 것을 시작으로 판석은 자신의 태도를 180도 바꿨다. 이미 들킨 마당에 작가님, 작가님 하며 저자세를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작가가 매니저 휴대폰을 멋대로 훔쳐봐? 세상에, 내 이런 일은 듣다 듣다 처음이오.”
판석이 언성을 높였다. 급발진처럼 보였지만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 무는 식의 근거 없는 헛손질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계약만 성공시키면, 다 묻을 수 있어.’
형우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판석이 온 힘을 기울여서 만든 계약서 안에는 작가가 출판사에 대한 비방을 금지하는 조항도 있었다.
판석이 수없이 신입 작가들의 뒤통수를 쳤음에도, 그 악행이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판석은 설득보다는 이쪽이 더 편했다. 80년대 스타일이랄까.
“여기서 이러면 대접 못 받습니다. 저희 바닥 좁아요. C&N에서 행실 개판인 작가로 낙인찍히면 뭐, 다른 매니지먼트는 넙죽 받아줄 것 같아요? 어림도 없는 소리지.”
판석은 과장을 잔뜩 섞어 무서운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형우란 놈이 잔머리는 깨나 쓰는 것 같아도 그래 봐야 초짜. 업계 사정을 알 리가 없다.
과장을 잔뜩 섞어 적당하게 겁을 주면서 약점을 쿡쿡 찌르면, 그대로 겁을 잔뜩 집어먹고 허겁지겁 계약서에 서명을 할 것이다. 공판석은 초보 작가들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형우 씨도, 솔직히, 작가 되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런데 이런 태도론 지금 작가를 할 수가 없어. 뭐, 그 작가처럼 같이 양평 가서 연탄 팔 거야?”
꿈을 잡고 협박하는 것.
지망생들은 꿈을 먹고 사는 자들이다. 돈 못 벌고, 굶주리고, 기약이 없어 보여도 꿈 하나를 잡고 늘어지는 악바리들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물고 당길 꿈이 없으면 바로 넘어져 버리고 마는 자들이기도 했다.
꿀꺽.
형우의 목울대가 떨리는 모습이 잘 보였다. 여기쯤이군. 판석이 그대로 쐐기를 박았다. 지금까지 채찍만 던졌으니, 이제 당근이다.
“하지만 뭐, 실수라고 하면 못 봐줄 것도 아니지. 서명해요. 그러면 모든 게 좋게 좋게 되는 거야. 당신은 작가 되고, 나는 돈 벌고. 일석이조라고.”
안 물고 못 배길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당근.
독이 잔뜩 들어 있지만, 먹기 전에는 알 리가 없다. 그러므로, 풋내기 어린 양은 채찍이 무서워서라도 당근을 씹어 삼키고 말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전문가는 못 이긴다는 거지.’
여전히 저울은 자신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정보는 권력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났다. 기쁜 마음에 다리를 덜덜 떨고,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형우의 반응을 기다리던 그때.
“아니요, 절대 서명하면 안 돼요.”
미팅실 문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판석의 움직임이 그대로 뚝 멈췄다.
허억, 허억.
급하게 달려온 듯이 헐떡거리는 목소리가 미팅룸 가득 퍼져나갔다. 판석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안재욱의 말을 듣고 불안한 예감에 C&N의 미팅룸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C&N의 수석 편집자이자 형우의 담당 편집자.
서지원이었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온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판석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서 매니저? 5시까지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일이 좀 빨리 끝났습니다.”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을 왜 세 시간이나 예약을 잡은 거야? 서 매니저, 자꾸 그따위로 커리큘럼 엉성하게 잡을 거야?”
판석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다. 내부 사정이 어떻든 직급은 판석이 위였다. 지원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빨리 다른 업무로 돌려버리면 그만이었다. 판석의 말을 들은 지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편집장님.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랬습니다.”
“중요한 일?”
“네. 오늘 계약한 안띵 작가님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편집장님. 혹시 소설토끼라는 출판사에 대해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뭐…? 소설토끼…?”
소설토끼. 그 이야기를 들은 판석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안띵? 안띵이 누구지? 머릿속을 뒤져 봐도 나오는 게 없었다. 당황하는 공판석을 향해 지원이 또각, 한 걸음 다가갔다.
“전에 보험 회사에서 일하시다가 이번에 전업 작가로 전향하신 분이세요. 본명은 안재욱 작가님이고요.”
안재욱. 그 이름이 왜 갑자기 지금 나온단 말인가. 그는 과거 공판석이 형우에게 했던 것처럼 등을 처먹으려다 실패했던 작가였다.
‘안재욱이 안띵이었다고?’
그걸 알았다면, 절대로 안띵의 미팅에 지원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왜 지원이 빠르게 돌아왔는지 이해가 됐다.
“그, 그게… 서 수석! 내가 다 설명하겠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지원을 휘두른다는 거창한 계획은 벌써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얼굴은 시꺼메진 공판석은 한참이나 흑백 영화 속 우스꽝스러운 찰리 채플린처럼 손발을 버둥거렸다.
“세상에.”
형우가 중얼거렸다.
‘역시 미친 사람이 맞았잖아.’
변명을 바디 랭귀지로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 * *
‘미친놈!’
판석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지원은 미친 듯이 물을 들이켰다.
‘시대가 어느 땐데, 출판사가 작가를 휘둘러?’
자칫했다간 업계 전체에 C&N이 신입 등이나 처먹는 삼류 출판사라고 소문이 쫙 날 뻔했다.
‘아무리 낙하산이라고 해도 저런 멍청한 놈이 편집장이라니! 그냥 확 받아 버려?’
한참 고민하던 지원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진정하자. 카드빚, 전세금, 집값 마련.’
직장인을 일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자, 그대로 정신이 바짝 들었다. 형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천천히 사기 계약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빡쳤겠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봐도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당사자가 오죽하겠는가. 평소에는 서글서글한 형우였지만, 글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언제나 매사에 진지했다. 아무리 봐도 형우는 타고난 작가였다.
망할 공판석 놈이 괜한 짓만 안 했어도 알아서 계약한 뒤 C&N의 실적을 쭉쭉 올려 줬을 텐데.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려도 아주 누런 코를 빠트렸다. 갑질에, 모욕까지. 계약은 이미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다른 출판사에서도 건필하시길 바라요. 이 정도로 말하면 될 테다. 심호흡을 하고, 셋을 센 뒤에 말하자. 하나, 둘….
“저기요, 형우 작가님!”
“예?”
어느새 지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형우의 팔을 붙잡고 서 있었다.
“호, 혹시! 아직 계약하실 의향 남아 있으세요? 물론 매뉴얼에 적힌 정식 계약서로요!”
‘정식 계약서’ 부분을 강조하는 지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당연한 일을 특별한 듯이 말하다니, 지금 하는 일이 염치 없는 짓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요. 화를 내신대도 이해합니다. 그래도 저는 한 명의 편집자로서, 형우 작가님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형우의 표정은 보지도 않았다. 눈을 꾹 감고서, 지원은 재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딱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 니까?”
겨우겨우 말을 끝마친 후에야, 지원은 진정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열이 치이익,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는 다시 차가운 이성이 내려앉았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이성은 차갑다기보다는, 차라리 시렸다. 형우의 눈이 끔뻑거렸다. 그 모습을 본 지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죠?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텐데. 방금 한 말은 잊으셔도 괜찮아요.”
거절당하기 전에, 먼저 지나가는 말처럼, 재미없는 농담처럼 넘겨버리려고 했다.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이제는 후련하게 보내 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지원이 형우를 보내 주는 것보다, 형우가 펜을 집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할게요.”
“물론 그러시겠죠. 다른 출판사 가셔도 좋은 작품 많이… 아니, 뭐라고요?”
“한다고요, 계약.”
지원은 순간 자신의 귀가 고장이 난 줄로만 알았다. 목마른 사람이 빗소리 환청을 듣는, 그런 거.
“방금 뭐라고 하셨죠? 계약 안 해, 그렇게 말한 거 맞죠?”
“아니요. 정확하게 계약한다고 했는데요. 왜요, 저랑 계약하기 싫으세요?”
“아뇨아뇨아뇨! 싫다뇨! 완전 마음에 들어요!”
지원이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었고, 형우는 그 위에 쓱쓱 싸인을 했다. 이제 환청에 이은 환각인가?
‘아프네.’
몇 번이나 볼을 꼬집은 후에야 지원은 자신의 눈과 귀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말인즉슨, 형우가 진짜로 계약을 했다는 건데….
“볼 떨어지겠어요.”
형우가 서명한 계약서를 내밀며 씩 웃었다.
지원은 희대의 호구, 혹은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저, 제가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이상하다는 거 아는데, 왜 계약을? 화나지 않으셨어요?”
“화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왜요?”
“그야….”
형우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원 편집자님이 최고의 편집자잖아요.”
* * *
지이잉.
형우의 휴대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메시지를 보낸 건 저번 주부터 공식적으로 형우의 편집자가 된 지원이었다.
지원 : 작가님! 이번 화 확인했어요! 바로 감평 보내드릴게요!
형우 : 부탁드려요!
계약을 맺기 전에도 이것저것 잘 챙겨주던 지원이었지만, 정식 계약관계가 되니 그 급이 달랐다. 지나가는 말로 의자가 조금 불편하다고 했더니, 최고급 의자를 수소문해서 보내 줄 정도였다. 지원은 됐다고 했지만, 형우는 그 돈을 지원에게 보냈다. 괜한 갑질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바꾼 의자는 전에 쓰던 의자에 비하면 마치 침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30만 원이 넘는 고급 의자였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글쓰기에 필요하다면 형우는 그 무엇도 아낄 생각이 없었다. 형우는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천장을 보고 두 다리를 쭉 뻗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만 원이 없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지금 형우의 통장에는 삼백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C&N과 계약을 체결하며 선인세로 받은 것이다. 형우는 그대로 지원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형우 : 고맙습니다. 편집자님. 의자 정말 편해요.
지원 : 제가 사드렸어야 하는데 :(
형우 : 흐흐, 출판사에서 받은 선인세로 산 건데요, 뭘.
지원 : 그거 제가 드린 것도 아닌데….
C&N의 편집자 직급은 인턴을 제외하면 크게 세 개의 등급으로 나뉜다. 일반 편집자와 수석 편집자, 그리고 편집장. 일반 편집자가 자신의 재량으로 줄 수 있는 선인세는 삼십 만 원. 수석 편집자는 그보다 세 배정도 많은 백만 원까지를 재량껏 지급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주, 형우가 C&N에서 받은 선인세는 무려 오백이었다. 그 정도의 선인세를 자신의 재량만으로 지급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생각난 김에 전화나 걸어 볼까.”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척.
“예, 김형우 작가님. 전화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는 데까지 불과 삼 초도 걸리지 않았고, 목소리에서는 잔뜩 긴장한 느낌이 났다.
신속하고, 정확하고, 공손하게. 훌륭한 전화 예절의 표본이었다.
‘이런 건 진짜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
…그게 진심인지는 더 봐야겠지만. 형우는 그대로 의자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네, 네. 편집장님. 별일은 아니고… 이번 <전설의 보안관> 표지 일러스트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아! 표지 일러스트 말씀이십니까! 헤헤, 마, 마음에는 드셨을랑가요?”
비굴함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C&N의 장르 소설부 편집장, 공판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