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잠시만요, 한 번만 더 읽어 볼게요.”
보통 신입이라면 이쯤에서 이미 넘어왔을 텐데, 형우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성급한 호구는 아니라는 건가.’
호구.
로비에서 서성거리는 형우를 봤을 때, 공판석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하지만 뭐, 몇 번을 읽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지금 형우가 읽고 있는 계약서는 C&N의 메뉴얼에서 추천하는 편집자용 일반 계약서가 아닌, 편집장의 권한으로 수정을 가한 일종의 ‘특별’ 계약서였다.
본래 특별 계약서는 업계 탑급 작가들을 이례적으로 우대하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일반 계약보다 불공정하게 만든, 말 그대로 ‘특별히 불공정한’ 계약서였다.
예상대로 형우는 그 계약서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 미디어특별법이라는 게 뭐지요?”
“아, 그거요. 그게 1998년에 제정된 건데, 그때가 한창 영국 쪽에서부터 특별안건이….”
정확히는, 발견하려고 할 때마다 훼방을 놨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전문용어를 잔뜩 섞고 말을 길게 늘여놓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주 어려운 설명은 아예 설명하지 않는 것보다 더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공판석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신입 작가한텐 이게 당연한 거지. 저번 그 자식이 이상했던 거야.’
안재욱이던가, 안형욱이던가? 이름조차도 기억 안 나는 그저 그런 작품을 쓰던 놈. 신입이라기에 평소처럼 후려치기를 하려고 들었는데, 하필 보험 회사에서 구르다 온 놈이었다. 결국 불공정 계약이 탄로 나고 경질까지 당할 뻔했다.
‘갓 들어온 신입이 있어서 다행이지.’
판석은 능수능란한 사회인답게, 자신의 잘못을 새로 들어온 신입 직원에게 떠넘겼다. 그 애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울면서 시말서를 쓰게 됐다. 별다른 죄책감은 없었다. 결국 뭐, 빽 없는 탓 아니겠는가.
몇 달 지나지 않아 판석은 자신의 직장을 옮겼다. 그렇게 온 곳이 C&N이었다. 소설토끼 같은 작은 출판사에서, C&N 같은 큰 출판사로 갈 줄이야. 출판사 생활을 하며 쌓아놓은 인맥이 도움이 됐다. 게다가 직위도 여전히 편집장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쾌재에 공판석은 콧노래까지 불렀다.
‘이게 인생이지.’
물론, 수석 편집자인 지원을 비롯한 C&N의 편집자들은 갑자기 굴러온 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소설을 보는 실력이라도 있었으면 괜찮았겠지만, 공판석은 사실 작가를 케어하는 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다.
남들 다 하는 입에 발린 소리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지원이 하는 것처럼 소설의 방향성이나 연출을 작가에게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공판석의 능력은 다른 데에 있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의 불공정 계약을 통해 출판사에 최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 그것이 판석의 특기였다.
‘C&N에는 신입 작가가 드물어서 실력 발휘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공판석은 입맛을 다셨다. 그 사이 형우는 다 읽은 계약서를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몇 번을 읽어 봐도 잘 모르겠네요.”
“하핫.”
그 모습이 너무 풋내기다워 웃음이 나왔다. 노련한 사회인이었다면 ‘계약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따위의 말은 결코 하지 않았을 텐데.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군.’
처음부터 깔아놓은 밑밥의 성과였다. 그렇게 되면 일은 편했다. 공판석이 손가락 끝으로 계약서를 콕콕 건드렸다.
“사실 이깟 계약서 내용이 뭐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법 테두리 안에서 하는 건데, 거기서 거기거든요.”
이 말은 100% 사실이다. 확실하게 법에는 저촉되지 않는다. 다만, 작가가 손해를 좀 볼 뿐.
‘뭐, 이런 건 속는 놈이 잘못이니까.’
판석은 그런 속내를 꽁꽁 감추고, 그대로 사람 좋은 표정을 띄워 올렸다.
“계약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습니까? 여기에 서명하시면, 작가가 된다는 것 말입니다. 작가, 되고 싶으시죠?”
“네. 그렇기야 한데….”
“그러면 뭘 망설이십니까, 작가님?”
판석이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형우에게 쓱 내밀었다. 슬쩍 표정을 보니 작가님이라는 말에 이미 넋이 나가버린 표정이었다.
‘끝났군.’
몇몇 사람들은 작가를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느끼기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작가님도 바쁘실 텐데, 빨리 끝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괜히 작가님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괜히 죄송하네요.”
영혼 없는 비즈니스용 멘트에 홀라당 속아 자기가 피땀 흘려 쓴 작품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바보들.
“아, 아닙니다. 편집자님이 죄송하실 건…. 펜 이리 주세요.”
그리고 오늘 그 바보의 명단에 이름 하나가 더 추가될 예정이었다.
“여기에 사인하면 되는 거지요?”
바로 김형우라는 이름이 말이다.
‘미치겠네.’
판석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심장이 기쁨으로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대로 형우가 계약서에 싸인을 하려는 순간,
“아얏.”
형우가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지르며 펜을 떨어트렸다. 공판석이 당황한 표정으로 형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뭐, 뭔가 바늘 같은 게 목 뒤를 쿡 찔렀는데….”
“목 뒤요? 아, 뭐가 있긴 있네요!”
형우가 차고 있는 넥타이에 뭔가가 삐쭉 꽂혀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잡아 뽑았다.
“이건…… 깃털?”
정확히는 참새의 깃털. 공판석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겨울철에 오리털 잠바조차 못 입을 정도로 엄청나게 심한 깃털 알레르기 탓에, 깃털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에- 엣취!”
공판석의 커다란 몸이 큰 폭으로 들썩였다. 그 바람에 주머니 속 휴대폰이 테이블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어, 내 휴대폰… 푸헷취!”
“가만 계세요! 제가 대신 주울게요!”
형우는 정신을 못 차리는 판석을 대신하여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다.
‘하필 왜 거기에 깃털이 있냐… 그나저나, 떨어지는 소리 엄청 크던데, 깨진 거 아냐?’
액정이 멀쩡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형우는 판석의 휴대폰 전원 버튼을 살짝 눌렀다.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 화면이 화악 밝아졌다.
“…응?”
떠오른 화면을 본 형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깨진 편이 공판석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다.
* * *
한참이 지난 후에야 공판석의 재채기가 멎었다.
“험험, 죄송합니다. 불상사가 좀 있었군요.”
한번 헛기침을 한 후, 판석은 제멋대로 널브러진 계약서를 다시 주워 올렸다.
“그럼 계약을 계속하실까요?”
“그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질문이요?”
공판석의 입꼬리가 순간 굳었다.
‘뭔가 눈치챘나?’
아까와는 확실하게 다른 반응이 미심쩍었다. 하지만 여기서 표정관리를 해내지 못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터, 판석은 그대로 입꼬리를 치켜올려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예, 작가님! 뭐가 궁금하실까요?”
“별 건 아니고… 그냥 최근에 소설에서 좀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요. 조금 조언을 주실 수 있을까 해서.”
질문을 들은 판석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계약서의 문제를 발견한 것만 아니면 나머지야 뭐든 상관 없었다.
“물론이지요. 그게 편집장 역할 아니겠습니까! 어디가 좀 걸리시나요?”
“베아트리체가 감자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 말이에요. 지원 편집자님은 그 부분이 좀 길다고 하던데. 편집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흐음, 글쎄요. 제 생각에는 괜찮은 장면 같은데요. 지원이가 또 깐깐하게 굴었나 보네. 제가 다음에 한소리 하겠습니다. 허허.”
판석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형우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가요? 그럼 헤럴드가 카미유를 죽이는 장면은 어떻게 보셨어요? 진짜 힘줘서 쓴 건데.”
“흐흐. 원래 죽일 때는 확실하게 죽여야죠. 짜릿했습니다.”
그대로 고개를 살짝 숙여 형우와 눈을 맞췄다.
“작가님은 재밌는 이야기 쓰시는 분입니다. 스스로를 조금 더 믿으셔도 돼요. C&N의 편집장인 제가 자신합니다. 허허.”
만점짜리 대답이었다. 내용도 충실했고, 작가들이 좋아하는 입바른 소리 소리도 조금 덧붙였다.
“뭣보다, 제가 즐겁게 읽은 소설을 쓴 작가님이시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형우가 판석의 말을 끊었다. 판석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그럴 리가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베아트리체는 감자를 못 먹습니다, 편집장님.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베아트리체는 어릴 적 가족과 함께 감자샐러드를 먹던 도중 강도에게 습격당해 부모를 잃는다. 그 트라우마로 인해, 베아트리체는 감자를 입에도 대지 못한다.
“그러니 베아트리체가 감자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 따위 있을 리가 없지요.”
“그, 그게….”
“그리고 헤럴드가 까미유를 죽였다고요? 헤럴드와 까미유는 동일 인물입니다.”
헤럴드의 모습이 마치 프랑스의 총사대 같다면서, 그의 친구들이 붙혀준 별명이 바로 ‘까미유’다. <전설의 보안관> 전반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복선 중 하나기도 했다.
“소설을 봤다면 모를 수가 없는 부분인데.”
그럼에도 모른다면, 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편집장님, 제 소설을 읽은 적이 없으시네요. 그렇죠?”
공판석은, <전설의 보안관>을 읽지 않았다.
* * *
십 분 전, 형우가 우연히 보게 된 공판석의 휴대폰 화면에 떠올라 있던 건 <전설의 보안관>의 1화였다.
‘…이게 왜 여기에 떠 있지? 아, 나 만나기 전에 복습 한번 하신 건가?’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휴대폰 어플을 사용해서 소설을 읽으면, 읽은 부분에는 [읽음] 표시가 떠오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판석의 휴대폰에는 당연히 떠올라 있어야 할 [읽음] 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50화짜리 작품인데 고작 1화만 읽었다고?’
형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미팅룸에 들어온 후부터 형우는 판석과 30분 넘게 <전설의 보안관>이야기를 했다.
‘하하, 인생 최고의 소설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헤럴드 성격이 너무 마음에 들더군요. 요즘 캐릭터 같다는 느낌인가?’
‘특히 그 카타르시스가….’
그 탓에, 형우는 판석이 <전설의 보안관>을 모두 읽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다.
‘원래 편집자가 이렇게 말하던가?’
적어도, 민준 삼촌이나 지원 편집자님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형우야. 이번 26화 봤다. 캬, 헤럴드가 거기에서 총알을 미리 빼 뒀을 줄은! 진짜 재밌더라. 인생 최고의 소설 중 하나야, 진짜.’
‘작가님! 38화에서 대도시로 돌아간 후의 헤럴드의 성격 변화가 참 보기 좋아요. 그리고 40화에서 결국 시장과 대화하며 카타르시스를 터트리는 장면까지! 저 진짜 감동했다니까요?’
인생 최고의 소설이라든지, 성격이 마음에 든다든지, 카타르시스가 좋다든지 하는 말은 같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달랐다.
구체성. 공판석의 말에는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구체성이 없었다.
‘혹시… 내 글을 안 읽었나?’
그런 의심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형우는 완전히 믿음을 거두지는 않았다.
‘설마, 읽지도 않은 소설을 30분 넘게 칭찬하는 게 말이 돼? 뭔가 오해가 있겠지.’
어쩌면 소설을 컴퓨터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근에 휴대폰을 바꿨을지도 몰랐다.
‘감평 디테일 부분도 마찬가지야.’
음식에 대해 설명할 때 육즙이 어떻고 밑반찬이 어떻고 자세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엄청 맛있다, 끝내주게 맛있다, 그렇게 말하고 끝내는 사람도 있는 법이였다.
‘의심보다는 예방이 낫지.’
그렇게 생각한 형우는, 공판석과 이야기하며 일부러 소설의 내용을 조금 틀리게 말했다.
“그리고 편집장님은 그 부분을 알아차리지 못했죠.”
형우가 공판석을 노려봤다. 그냥 쓸데없는 의심이기를 바랐는데,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그대로 짓밟힌 느낌이 들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읽긴 읽었는데.”
“그래요, 읽긴 읽었겠죠. 단 1화뿐이지만.”
형우는 판석의 입에서 변명이 튀어나올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어디서 보셨죠? 커피 타면서? 아니면 아까 화장실 다녀올 때?”
“아닙니다. 작가님. 분명 오해가….”
“오해는 개뿔이.”
형우는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펜을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계약은 없던 걸로 하지요. 소설도 안 읽은 편집자랑 어떻게 계약을 하겠습니까?”
편집부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공판석의 표정에 당황이 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