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7화 (17/200)
  • #16.

    형우 : 저 판교 도착했어요.

    지원 : 벌써요? 저 지금 밖인데. 최대한 빨리 갈게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대박. 세상에, 나 어떡하지?”

    형우는 자기도 모르게 카톡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계약이라니. 듣기만 해도 얼마나 설레는지.

    “이제 진짜 작가가 되는 거구나.”

    문창과에 들어갈 때부터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작가 타이틀이었다. 얼마나 기대가 되던지. 그 탓에 형우는 두 시간이나 일찍 출판사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늦는 것보다는 낫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빌딩을 바라봤다. 판교의 태성빌딩. 형우가 오늘 계약하기로 한 C&N 출판사는 이 거대한 빌딩의 2층부터 꼭대기까지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와…!”

    출판사라고 하면 왠지 인쇄기로 가득하고 담배 연기가 자욱한 느낌을 상상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편견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우리나라 최고 출판사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형우가 알기로 C&N의 역사는 거의 40년 가까이 됐다. 처음에는 교육 만화 출판사로 시작했다가, 점점 발을 넓혀가며 대한민국 최고의 출판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의외로 장르 소설부는 비교적 최근에 생겼다고 들었다.

    “장르문학 부서가…. 아마 3층이라고 했지?”

    형우는 커다란 빌딩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빌딩 내부에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보다는 가벼운 후드티와 청바지 차림의 사람들이 더 많았다.

    ‘판교는 청바지, 강남은 정장이라더니.’

    그렇다고 형우의 정장 차림이 눈에 확 띌 만큼 돋보였던 것은 아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도 꽤 많이 오갔다. 형우는 그 부분에서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패셔니스타는 자기랑 똑같이 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안심이 되고, 패션 고자는 자기랑 똑같이 입은 사람이 주변에 많아야 안심이 된다고 했다. 형우는 패셔니스타보단 패션 고자 쪽에 가까웠다.

    띠링. 3층입니다.

    사람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내린 형우는 정문에 놓인 표지판을 살폈다.

    “저쪽은…. 아마 교육 만화 부서인 것 같고, 장르 소설 분야는 왼쪽인가?”

    건물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가 더 큰 것 같았다. 대한민국 굴지의 출판사답게 C&N은 그 내부에서도 수많은 부서로 갈라졌고, 형우는 그대로 길을 헤맸다.

    ‘타디스야, 뭐야.’

    그렇게 형우는 한참을 건물 안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 순간, 누군가가 형우의 뒤에서 험험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어디를 찾아오셨습니까?”

    뒤를 돌아보니, 풍채가 넉넉한 중년 남자 하나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우는 재빨리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살폈다.

    [장르 소설 편집부 편집장 공판석.]

    아무래도 알맞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형우가 편집장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미팅 예정 있는 김형우라고 합니다.”

    “아, 김형우 작가님? 서 매니저 담당 맞지요?”

    공판석은 그대로 바지춤에 땀을 쓱 닦더니, 그 커다란 손을 형우에게 내밀었다.

    “잘 왔습니다, 작가님. C&N 장르소설부 편집장인 공판석입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실까요?”

    * * *

    C&N 출판사 장르소설부의 미팅룸.

    “자자, 작가님! 커피 왔습니다.”

    양손에 커피를 한 잔씩 든 공판석이 어깨로 힘겹게 문을 열고 자리에 들어왔다.

    “주시죠.”

    “아닙니다! 앉아 계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공판석은 형우가 일어나서 커피를 받으려는 걸 한사코 말렸다.

    “저 공판석. 작가님이 제 출판사에서 허드렛일 하는 건 두고 못 봅니다. 작가 있고 출판사 있지, 출판사 있고 작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오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일단 커피부터 쭉 드세요. 믹스커피 두 개에, 설탕 조금 덜어서. 맞으시죠?”

    “맞아요. 감사합니다.”

    미팅룸의 커다란 테이블 위로 믹스커피 두 잔이 놓였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저희 출판사를 찾아 주셔서 다시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작가님 작품, 저도 완전 팬이거든요. <전설의 보안관>! 뭔가 제목부터 향수를 자극한다고 해야 하나… 제 사촌 놈도 글 쓴다고 대학 가서 돈깨나 허비하는 모양이던데, 작가님 반만 닮았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하하, 그분도 잘되시겠지요.”

    “작가님도 참. 말도 정말 예쁘게 하신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쑥스럽다는 듯 뒷목을 긁적이는 공판석. 왠지 편안함을 주는 소박한 웃음이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공판석은 50이 넘어 보이는 중후한 느낌의 신사였다. 몸에 살이 좀 붙어 있기는 했지만, 지저분하다기보단 오히려 푸근한 인상을 줬다.

    게다가 얼마나 예의가 바른지. 본인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형우를 꼬박꼬박 작가님이라고 부르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오죽하면 형우가 부담스러워 말릴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그럴 수야 없죠. 작가님인데요.”

    “그래 봐야 아직은 신입인걸요.”

    “신입. 그것참 듣기 좋은 말이지요. 무궁무진하다는 거 아닙니까? 허허. 작가님에게만 드리는 말씀인데.”

    공판석이 형우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소곤거렸다.

    “저도 C&N에 들어온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답니다.”

    “어어? 그런데 어떻게 편집장을…?”

    “경력직이죠. 이 전에 같은 바닥에서 일한 적이 있었거든요.”

    “혹시 어딘지 들을 수 있을까요?”

    “소설토끼라는 조그마한 출판사인데… 아마 들어도 모르실 겁니다. 너무 작은 곳이라. 별로 이야기할 게 없네요.”

    판석이 얼버무리며 말을 돌렸다. 얼굴에 만연하던 기분 좋은 미소도 조금은 굳은 것 같았다.

    ‘저번 출판사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뭣보다 괜히 서로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말하듯이,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기분 좋게 시작하는 게 가장 좋다.

    짝!

    약간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판석의 박수 소리였다.

    “아이고, 나 참. 내 정신 좀 봐. 작가님 계약하셔야 하는데 제가 괜히 붙잡고 있었네요. 제가 이런다니까요. 늘 괜찮은 작가만 보면 말이 많아져.”

    “괜찮습니다. 유익한 말이었는걸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사실은 빨리 계약을 하고 싶으시잖아요? 자, 여기 계약서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 놨지요.”

    * * *

    “헤맬 줄 알았는데. 형우 작가님도 잘 도착하신 모양이네.”

    형우의 문자를 본 지원의 얼굴에 잠깐 미소가 어렸다. 지금 그녀는 다른 작가와의 계약을 위해 회사 밖에 나와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지원의 표정을 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라, 매니저님 표정 엄청 좋으시네요. 혹시 뭐, 연애라도 하세요?”

    “흐흐. 연애보다 더 좋은 거죠. 이번에 대박 작가를 하나 찾았거든요!”

    “여전히 일이랑 사귀시나 보네.”

    “뭐, 아직은 남자보다 일이 좋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안재욱 작가님! 이번 작품도 저희랑 해 주신다고 하셔서 너무 고마워요.”

    지원이 오늘 만나는 상대는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소설가로 전향한 안재욱이라는 30대의 남자였다. 오늘 계약하는 소설 또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쓴 <너무 양심적인 보험 설계사>라는 작품이었다.

    “40화까지 원고 주신 거 잘 읽어 봤어요. 특히 28화에서 주인공이 공갈 사기꾼 멱살 잡는 장면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뭐라고 했더라? 깽값 받고 싶으면 진짜 다치고 나서 받아! 라고 했던가요?”

    지원이 짐짓 목소리를 깔고 남자 주인공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재욱이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흐흐. 그것도 제가 어디서 들은 이야기에요.”

    경험을 살려 쓴 소설에서는 이런 부분이 좋다. 디테일이라고 해야 하나. 독자들은 늘 디테일을 사랑한다. 물론, 작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너무 과하지 않은 디테일일 경우 이야기다.

    “하지만요, 작중에 보험 조항 관련이 너무 많아요. 33화에서는 세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 정도로 줄이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지요. 누구 말인데.”

    안재욱이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안재욱도 몇 명의 편집자를 만나 봤지만, 그중에서 지원만큼 글을 꼼꼼하게 읽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번 출판사는 글쎄, 찾아갔더니 매니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오는 길에 읽어 봤는데, 나름 괜찮았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어머. 그거 어떤 출판사에요?”

    “알면 어쩌시려고요?”

    “찾아가서 한 마디 해 줘야지. 그렇게 매니지 하면 안 된다고요.”

    지원의 말은 반쯤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다른 출판사니 망정이지, 만약 지원의 후임이 저런 태도로 일을 했다면 온종일 그녀에게 재교육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여기 있어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안재욱의 말재간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적절한 타이밍이다 싶어, 지원은 가방을 뒤져 준비해 온 계약서를 꺼냈다.

    “흐음….”

    안재욱은 제 1조부터 꼼꼼하게 계약서를 확인했다. 지원은 그 모습이 꽤 이채롭게 느껴졌다. 글을 쓰는 작가 중에서도, 의외로 계약서를 꼼꼼히 읽는 사람은 드물었던 탓이다.

    “계약서를 되게 열심히 읽으시네요? 역시 보험사에서 일하셨던 분이라 그런가?”

    “그런 것도 있지만…, 저번에 좀 크게 데일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혹시 소설토끼라는 매니지먼트 아세요?”

    소설토끼 매니지먼트. 그 이름을 들은 지원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지원의 상사이자 장르 소설 편집부의 편집장인 공판석이 C&N에 입사하기 전에 몸담았던 곳이 아닌가.

    “소설토끼가 왜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든 지원이 재차 물었다. 안재욱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거기에서 계약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 편집장이라는 양반이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가지고 오더라고. 너무 이상해서 이거 맞냐고 물어보니까, 그때 그 사람이 허허 웃으면서 뭐라더라. 잘못 가져왔다고 했었나?”

    그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안재욱은 소설토끼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을 즉시 중단했다. 그다음으로 찾아온 것이 지원의 C&N 출판사였던 것이다.

    “저 혹시, 그때 그 계약서 가지고 계세요?”

    “예예. 혹시 몰라서 가지고 있었어요. 계약이 하도 이상해서 말이지.”

    “그 계약서, 잠깐 보여 주실 수 있나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안재욱은 잠시 서랍을 뒤지더니, 종이뭉치 한 더미를 꺼내 왔다. 계약서를 읽는 지원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시꺼멓게 변했다.

    “맙소사….”

    불안감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출판사(이하 '갑'이라 한다)와 작가(이하 '을'이라 한다)는 위에 표시된 저작물을 이용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제3조. 권리의 귀속

    1. '을'은 작성 중인 중간 생성물을 포함한 모든 전자출판용 데이터에 대한 권리가 '갑'에게 귀속됨을 확인한다.

    2. '을'은 계약종료 후에도 '갑'의 서면 동의 없이는 출판데이터를 직접 이용하거나 제삼자에게 이용하게 할 수 없다.

    제10조. 저작권 사용료

    1. '갑'이 판매한 본 작업물의 수익을 아래와 같은 기준으로 '을'에게 배분한다.

    ㄱ. 모든 수수료와 세금을 제한 금액을 배분한다.

    ㄴ. ㄱ의 금액 중 60%를 '을'에게 지급한다.

    2. 2차 저작물의 모든 권한 및 수익금은 '갑'에게 귀속된다.

    제13조. 손해배상

    1. 제10조 3항에서 지급한 선인세를 유료연재 개시 1개월 이내 소진하지 못했을 경우, 이후 판매액과 상관없이 해당일 남은 선인세액을 계약 종료시 '을'은 '갑'에게 3배로 배상한다.

    2. 무료연재 중 '갑' 또는 '을'의 의사로 계약을 해지하였을 때, 해지일로부터 3일 이내 지급한 선인세의 3배를 '을'이 '갑'에게 배상한다.

    제15조. 계약종료

    1. '갑'은 사업상 필요시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이때 미정산 금액은 즉시 '을'에게 배분해야 하며, 선인세 관련 조항은 13조를 따른다.

    2. '을'이 계약 종료를 원할 때, 서면을 통한 중단 요청을 해야 하며 '갑'은 이를 거부할 수 있다.

    3. 종료일로부터 3년 이내에 '갑'은 판매 중단을 위한 조치를 완료하여야 한다.

    형우가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이지?’

    분명 다 읽긴 했는데, 머릿속에 들어온 건 없었다. 분명 한글이긴 한데, 한국어가 아닌 다른 세계의 언어 같았다. 눈을 끔뻑거리는 형우를 바라보며, 공판석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계약서가 좀 복잡하지요?”

    “그러네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요.”

    대답을 들은 공판석이 히죽, 웃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작가님. 서명만 하시면 제가 다 알아서 해 드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