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4화 (14/200)
  • #13.

    “에휴. 어머니는 또 이런 걸 다….”

    무거운 짐을 들고 민준의 집으로 향하며, 형우는 연신 투덜거렸다. 출발하기 전 어머니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형우야, 어디 가니?’

    ‘아, 민준 삼촌네 가요.’

    ‘민준이네 간다고? 그럼 이거 갖고 가.’

    최근 함께 서부극을 본 것을 계기로, 형우와 어머니 사이에 느껴지던 애매한 거리감은 많이 해소되었다.

    ‘너무 많은데요?’

    ‘작가가 아니라 돼지가 꿈이었니? 운동도 할 겸, 딱 좋은 무게구만.’

    …뭐, 그렇다고 해서 평소에 무뚝뚝하던 어머니가 드라마 속의 어머니처럼 완전 살가워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에 간간이 꺼내던 공무원 이야기나 글을 접으라는 말을 더 이상 꺼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잖아.”

    그 탓에, 형우는 지금 양손에 고구마니, 더덕이니 하는 것들을 잔뜩 든 채로 민준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구슬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뺘아아악!”

    참치는 형우의 머리 위에 턱 하니 걸터앉아 오랜만의 산책이 기분 좋다는 듯 울었다.

    “넌 참 속 편해서 좋겠다.”

    “뺘아악!”

    “야! 머리털 좀 뽑지 마! 대머리 된다니까?”

    그렇게 투닥거리는 도중, 멀리서 차 한 대가 시골길을 달리는 것이 보였다.

    “미니쿠퍼? 아니면 비틀인가? 아무튼 이 동네 차는 아닌데….”

    고향으로 내려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형우는 동네 사람들의 차는 대충이나마 꿰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온 차가 멈춘 곳은 놀랍게도 성민준의 집 앞이었다.

    “뭐지?”

    덜컹. 차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형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단발과, 짙은 선글라스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민준 삼촌네 집에 여자가? 혹시 여자친구?’

    매일 란닝구와 추리닝 바람으로 동네를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그 민준 삼촌이? 형우는 믿을 수 없어 눈을 몇 번이나 끔뻑거렸다. 그러던 중, 형우와 그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어어? 왜 이쪽으로…?’

    혹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살펴봤지만, 이런 이른 시간에 밭에 안 나가고 길을 돌아다니는 유유자적한 사람은 형우밖에 없었다.

    또각또각.

    형우가 당황하든 말든지, 그 여자는 형우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와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쪽이 성민준 작가님 집 맞나요? 전화를 안 받으셔서….”

    “누, 누구세요?”

    그렇게 묻는 형우를 보며, 여자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렸다. 렌즈를 낀 듯한 갈색의 눈동자가 형우의 얼굴과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참치,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A4용지를 번갈아 살폈다.

    “저어, 혹시… 김형우 씨?”

    “엇?”

    낯선 사람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형우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그런 형우를 내버려 둔 채, 여자는 품을 뒤져 네모반듯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C&N 장르 소설부 편집자 서지원입니다.”

    * * *

    “편집자님? 어, 어떻게 여기까지…?”

    지원의 얼굴을 본 민준은 말 그대로 사색이 됐다. 그 사이에 형우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려달란다고 그대로 알려주면 어쩌냐! 너는 눈치라는 게 없느냐?’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형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생깨나 해야 했다.

    “작가님이 하도 연락을 안 받으시니까.”

    “제가 언제 연락을 안 받았다고요?”

    “카톡을 이십 개나 씹으셨잖아요! 게다가 전화는 왜 꺼 뒀어요?”

    “그,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저희 집 개가 핸드폰을 물어뜯어서….”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참 별거 없는 변명이다 싶었다. 심지어 민준 삼촌의 집에는 개도 없었다.

    “작가님. 이렇게 또 펑크를 내시면 안 되죠.”

    “펑크라니! 정말로 다 썼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보여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턱 내미는 지원. 민준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형우의 앞에서는 존경할 만한 선배 작가고, 훌륭한 조언자였지만 그도 결국은 작가. 편집자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생쥐 신세였던 것이다.

    “그… 잠시만 있어 봐요. 두 시간… 아니, 세 시간 내로 퇴고만 딱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민준은 호다닥 작업실로 달려 들어갔다. 그렇게 되니, 남은 건 형우와 지원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데.

    “김형우 씨?”

    하고, 지원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저, 저요?”

    “네. 이름이 김형우 아니에요?”

    “맞죠, 맞아요. 하하하… 그나저나, 제 이름은 어떻게…?”

    “민준 작가님한테 들었거든요. 자기 고향에 쓸만한 원석이 하나 있다고.”

    지난날, 민준이 쓸만한 녀석이 있다며 카톡을 보낸 대상이 바로 서지원이었다.

    “그나저나, 계속 서서 이야기할 거예요?”

    민준은 벌써 작업실 문을 굳게 닫아건 채였다. 참 매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형우는 바리바리 싸 온 것들을 민준의 집 문 앞에 내려놓았다.

    “일단 따라오세요.”

    형우가 지원을 데리고 간 곳은 마을 어귀에 위치한 정자였다. 오후만 되면 마을 할아버지의 바둑 대회 같은 것이 열리는 장소였지만, 지금은 모두가 농사를 지을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꺅. 너 참 귀엽구나.”

    “표로롱!”

    지원은 연신 어깨 위에 올라간 참치와 노닥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참새를 키우시다니. 재밌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편집자님도 애완동물 같은 거 키우세요?”

    “편집자님이라니. 제가 형우 님 편집자도 아닌데, 말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요…?”

    “지원 씨라고 부르든가, 지원 님? 아니야, 이건 너무 일하는 것 같고. 아니면 차라리 누나는 어때요?”

    지원의 나이는 이십 대 후반. 형우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지원 씨로 할게요.”

    “뭐, 그렇게 하든가. 애완동물 물어봤죠? 저는 비슷한 걸 키우긴 해요.”

    “비슷한 거요…?”

    “작가들이죠. 동물 키우는 것보다도 훨씬 힘들어. 동물들은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하잖아.”

    으득. 갑자기 잘 이야기하던 지원의 표정이 굳었다.

    “맞춤법 교정도 안 하고 휙 던지는 작가들은 양반이에요. 그건 내가 하면 되니까. 하지만 펑크 내는 작가들은… 아냐, 그것도 괜찮아요. 오늘처럼 찾아와서 뭐라고 하면 금방 잠잠해지니까. 그중 최악은 누가 뭐래도 SNS로 똥 싸는 놈들.”

    “…똥이요?”

    “그래요. SNS로 독자들이랑 키보드 배틀 뜨고, 헛소리하고, 매출에 영향 갈 짓은 다 한다니까요? 최근에는 작가 한 명이 자기 인스타에 되도 않는 정치 글인지 뭔지 싸재꼈다가 욕은 욕대로 먹고, 기껏 런칭한 작품 매출도 반 토막 나고 결국 절판까지 때렸다니까요? 아니, 자기 하고 싶은대로 다 하려면 SNS를 몰래 파든가, 출판사 이름까지 걸어 놓고 그게 뭐 하는 짓이람! 계정을 다 파 버리든지 해야지!”

    아무래도 데인 게 많은 모양인지, 지원은 한참이나 철없는 작가들에 대한 하소연을 퍼부었다. 그렇게 한참 씩씩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형우를 보는 지원.

    “…형우 씨는 혹시 SNS 같은 거 하세요?”

    “군대 있을 때 잠깐….”

    “지금은 안 하시죠?”

    “네.”

    “완전 마음에 들어.”

    지원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그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형우는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형우 씨, 아까 민준 작가님 말요. 어떻게 생각해요?”

    “펑크낸 거요?”

    “그것도 그거지만, 세 시간 걸린다는 거. 그게 정말일까요? 최근 민준 작가님 글 쓰긴 썼어요?”

    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우가 보기에도 민준은 최근 글을 열심히 썼다. 그 말을 들은 지원은 흡족하게 웃었다.

    “얼레, 진짠가 보네? 형우 님 덕분인가?”

    “뭐가요?”

    “민준 작가님. 원래 펑크 잘 내시기로 유명하시거든요. 아니, 쓸 땐 확 쓰는데, 안 쓸 때는 진짜 더럽게 안 쓴다고 해야 하나? 저희 편집부 내에서는 별명이 동전이에요. 앞면 나오면 글 쓰고, 뒷면 나오면 안 쓴다고. 근데 요즘은 늘 앞면인 것 같아.”

    “그게 왜 제 덕분이에요?”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네. 옆에서 자기 까마득한 후배가 글 쓴다고 하루에 열 시간씩 타자기 두들기고 있으면, 아무래도 선배는 꺼림직하다는 말이죠? 작가들이 다 자존심은 하늘 같아서, 절대로 안 진다. 이런 게 있단 말야.”

    그러니까, 민준이 최근 다시 빡글을 하는 이유가 형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세 시간은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정 안되면 며칠이고 묵으려고, 호텔 예약까지 이미 해두고 왔다니까? 뭐, 이제야 필요 없는 일이지만….”

    이런 시골까지 차를 끌고 들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지원은 일에 대한 열의가 넘치는 편집자였다. 그 열의야말로 지원의 무기였다. 그 힘으로 지원은 젊은 나이에 C&N 같은 거대 출판사의 수석 편집자 자리까지 올랐다.

    “아무튼, 세 시간이라는 거죠. 세 시간….”

    잠깐 중얼거리던 지원의 시선이 멈춘 곳은, 형우의 손끝. 정확히는 두 손으로 소중하게 들고 있던 <뉴 카우보이>의 원고였다.

    “그거, 소설이에요? 이번에 쓴 거?”

    “맞아요.”

    “그것 좀 읽어봐도 돼요?”

    그거면 세 시간은 충분히 채울 것 같은데. 지원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턱 내밀었다.

    “오히려 바라던 바지요.”

    “에엥, 완전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미리 경고할게요. 저는 절대로 살살 말 안 합니다?”

    “최대한 세게 때려 주세요.”

    “마조히스트? 완전 마음에 들어!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좀 마조끼가 있어야 해. 안 그러면 멘탈이 약해서 금방 그만둬 버린다니까.”

    아무래도 저 ‘완전 마음에 들어’라는 말은 지원의 입버릇인 모양이었다.

    * * *

    ‘뉴 카우보이라… 서부극인가?’

    지원은 눈으로 슬쩍 거리며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민준에게 천재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봐야 이제 입문한 지 한 달 되는 원석.

    게다가 지원은 민준의 안목을 그렇게 믿지 않았다. 작가의 안목은 아무래도 편집자에 비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쓸만한 작가 없냐는 물음도 반쯤은 농담 삼아 건넨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도 뭐, 시간 때우기로는 나쁘지 않겠지.’

    독자 모드로 읽자. 그 정도의 마인드였다. 글에 좋은 점이 있으면 칭찬이나 해 주고, 나쁜 점이 있으면 첨삭이나 약간 해 줄 생각이었다. 초보 작가들에게는 그 정도만 해 줘도 충분한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다.

    요컨대, 지원은 여기서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새로운 소설을 훑어보는, 취미에 가까운 행위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생각은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그대로 멈췄다.

    ‘…뭐야 이거.’

    두 페이지, 세 페이지.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황야와 어리숙한 보안관 헤럴드. 그리고 그 옆을 서포트하는 현상금 사냥꾼 베아트리체. 지원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신인 작가가 쓴 서부극이라고…?’

    지금에야 흔하지 않지만, 20년 전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수백 수천 번이나 되풀이되었던 소재. 초보 작가의 손에서는 그저 그런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로 개화할 위험성이 높은 장르였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열 페이지를 넘었을 때, 지원의 손이 뚝 멈췄다. 형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문제가 있나요?”

    “형우 씨. 혹시 펜 가진 거 있으신가요?”

    “펜이요?”

    형우는 주머니를 뒤져 늘 갖고 다니는 볼펜 하나를 꺼내 줬다. 펜을 받아든 지원이 중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펜을 빙그르르 돌렸다.

    ‘이건 심심풀이 정도로 읽을 게 아니야. 완전 마음에 들어!’

    지원이 든 펜이 <뉴 카우보이>의 위를 휘저었다. 독자 서지원이 아닌, 편집자 서지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