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3화 (13/200)

#12.

다그닥 다그닥.

허름한 TV 속 한 남자가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린다.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는 까만 가면이 퍽 인상적이다.

“쟤가 쾌걸 조로야. 배우는 알랭 들롱이고.”

어머니의 입에서 오래된 프랑스의 배우 이름이 나왔다.

[다치기 싫으면 그냥 꺼지시지?]

화면 속 젊은 시절의 알랭 들롱과 대치하고 있는 건 많은 수의 열차 강도들이다. 그들은 한 여인을 둘러싼 채 허벅지를 두드리며 조롱하고 있다. 복면을 쓴 알랭 들롱이 씨익 웃는다.

[너희는 다친 후에야 꺼질 수 있을걸.]

타다당!

조로의 권총이 불을 뿜는다. 순식간에 강도들이 쓰러진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그대로 검을 뽑아 휘두른다. 조로는 강하다. 심지어 조로가 타고 온 말도 강했다. 뒷발차기에 사타구니를 차인 악당은 분명 불알 두 개가 으깨졌을 테다.

“으윽.”

형우는 자기도 모르게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어머니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순식간에 강도를 박살 낸 조로도 웃었다.

‘내 이름을 기억하라.’

조로는 칼로 마차에 Z 표식을 남겼다. 그걸 본 강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서, 설마 당신이… 쾌걸 조로?’

‘정답이야.’

그렇게 악당을 물리친 조로는 그대로 여인을 말 뒤에 태운 뒤, 마을로 떠난다.

“대박.”

형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실 옛날 영화라고 해서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것이라기에 잠깐 관심이 동한 것에 더 가까웠다.

‘내가 과소평가한 거야.’

<쾌걸 조로>의 웨스턴 분위기는 단지 옛날 영화라고 칭하기에는 뛰어난 부분이 많았다.

밝은 낮에는 총독, 어두운 밤에는 쾌걸 조로로서 자신의 마을을 위해 헌신하는 서부의 영웅. 형우는 순식간에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한참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비디오가 툭 끊겼다.

“어, 어어?”

막 중요한 장면에서 끊긴지라, 형우는 괜한 소리를 냈다. TV에서는 태연하게 광고가 흘러나왔다.

[따봉 주스! 델몬트 따봉 오렌지!]

형우가 누군지 모르는 배우 한 명이, 오렌지 주스를 들고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어머니는 그마저도 추억이라는 듯 낄낄거렸다.

“30년 전에 유행했던 광고야.”

“아니, 비디오에 왜 광고가 나와요?”

“정품이 아니라 녹화한 거니까 그렇지.”

정식 판매본과는 달리, 녹화본은 사이사이에 광고도 다 들어가고, 그렇게 생겨 먹었단다.

“네 아버지가 뭐 저런 걸 알았겠니. 그냥 대충대충 한 거지. 네 아버지는 비디오를 안 좋아했거든. 녹화하면서 광고 빼는 법도 모를 정도로.”

“비디오를 싫어한 사람이 왜 저렇게 많이 녹화를 해 둬요?”

“내가 좋아했거든. 서부극. 소싯적 내 소원이 뭐였는지 아니?”

어머니가 비디오 테이프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 손짓이 뭔가 애틋했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소원은 시내에 나가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 한 편 보는 거였단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영화관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날 네 아버지가 시내를 가 보자고 하더구나.”

그렇게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 넘어 시내로 갔단다. 지금은 차 타고 한 시간이면 가지만, 그때는 교통도 열악하고 해서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고.

“우리가 간 곳은 극장이었어. 그때 걸려 있던 게 <쾌걸 조로>였지, 아마.”

“좋았겠어요.”

“좋기는 무슨. 영화 시작하자마자 네 아버지는 코까지 골면서 자더라.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래서 영화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정말요?”

어리숙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보다 어린 아버지라. 그런 생각은 잘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싸웠다. 이게 대체 뭐냐고. 기껏 기대한 영화관에선 잠이나 자고. 뭐 이런 남자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얼굴도 안 봤어.”

어머니의 고집이라면 형우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딱 됐을 때였나. 갑자기 밤에 누가 방문을 쿵쿵 두드리더라고. 네 아버지였지. 양손 가득히 뭘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

거기서부터는 형우도 뒷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비디오였나요?”

“그래. 일 주일간 잠도 안 자고, 영화 방영 시간마다 눈 딱 뜨고 기다려서 죄다 녹화를 뜬 거야. 혹시 누가 훔칠까 이름까지 써 놓으면서. 그날 저녁, 같이 누워서 영화를 봤다.”

“그때는 안 잤나 봐요?”

“그래. 두 눈 똥그랗게 뜨고 있더라. 알고 보니, 뭐 잠 안 오는 약초를 캐 먹었나 그랬더라고? 그 탓에 다음 날 온몸이 벌게져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멍청한 사람.”

그렇게 된 이야기였구나. 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이야기를 듣던 형우의 눈가에도 살 눈물이 맺혀 있었다. 별것 아닌 연애 이야기인데, 왜 이리 슬프고도 재밌는지. 그 표정을 본 어머니가 짓궂은 표정으로 형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날 네가 생긴 거야.”

“에, 뭐라고요?”

“나 참. 능력 없는 남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 하나는 진짜 끝내주던데. 아니면 그때 먹은 약초가 뭔가 있었나?”

형우의 얼굴이 벌개졌다.

“아들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돼요?”

“못할 건 뭐냐? 네가 몇 살인데?”

그렇게 형우가 태어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빠졌다. 비디오도 어느 순간부터 잘 보지 않게 되었고, 마을 꼬마 누구한테 넘겨줬었는데, 그게 이장님 댁 아들이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걸 네가 가져온 거지.”

따지고 보면 우연이랄 것도 없었지만, 왜 이리 우연처럼 느껴지던지.

낡은 브라운관 속에서, 조로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조로의 총이 불을 뿜고, 말들이 달렸다. 회전초가 굴러다니는 황야, 선인장과 메마른 마을들. 그리고, 그 흙먼지들 사이에서도 결코 더러워지지 않고 고고하게 서 있는 쾌걸, 조로.

그는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긴 끝에, 결국 개척지 주변에서 폭정을 일삼던 악당 후에르테 대령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하지만, 황무지에는 악당들이 너무 많다.

다가오는 악당들은 많고, 흘린 피는 더 많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로의 등 뒤로 수많은 발소리가 들린다.

[개척지를 위하여!]

황야를 내달리는 황무지의 고귀한 시민들, 그 수많은 등을 바라보는 조로를 뒤로한 채, 검은빛의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갔다.

“하나 더 볼까요?”

크레딧을 바라보며, 형우가 물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나는 그것도 좋아. <론 레인저>.”

그렇게, 비디오 앞에서 형우와 어머니는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비디오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유쾌하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들이었다.

* * *

형우와 어머니는 삼일을 꼬박 세며 박스에 가득 찬 서부극들을 모두 봤다. 혼자서 봤다면 좀 더 빠르게 완독했겠지만, 형우는 아버지가 남긴 영화를 어머니와 함께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어머니가 일을 나간 뒤에, 형우는 그대로 노트북을 꺼냈다. <서울낭인괴담>의 실패 이후로 처음이었다. 소재는 정해 뒀다.

서부극.

개척과 발전의 시대. 총 한 자루에 의지한 채 문명과 비문명의 사이를 전전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분명히 잘 쓸 수 있을 거야.’

이유 없는 확신은 아니었다.

지난 며칠간 형우는 <서울낭인괴담>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나쁜 점은 지나치게 늘어지는 전개와, 개연성 없는 캐릭터. 그리고 좋은 점은 총기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그걸 사용한 액션씬이다.

‘일단 장점은 확실하게 살릴 수 있고….’

서부극에서는 늘 총과 화약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다음은 단점을 고치는 건데….’

우선 전개부터.

<서울낭인괴담>에서 전개가 늘어졌던 이유는 형우가 자신의 글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늘 분량을 오버해서 글을 썼다.

당연히 같은 값이라면 양이 많은 걸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맛있는 한 접시의 식사를 기대하고 식당을 찾은 손님들에게 맛도 없는 요리를 냄비째 내민 것과 다를 바 없는 멍청한 행동이었다.

‘불필요한 묘사는 최대한 자제하고, 꼭 필요한 묘사만 사용하면서 스피디하게 진행하자.’

그런 의미에서 차기작으로 서부극을 고른 건 일종의 도전이기도 했다. 서부극의 배경은 황량한 도시와 메마른 사막이다. 그런 배경에 장황한 문체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는 건 하드보일드, 짧고, 긴박한, 그런 거.

‘마지막은 캐릭터인데….’

<서울낭인괴담>이 망했던 결정적 이유도 여주인공인 미나의 고구마스러운 언동 때문 아니던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애정이 가는 캐릭터를 만들자.’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캐릭터다.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구분하지 않고, 작가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말 중 하나였다.

“해 보자.”

형우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읽었던 수많은 작법서의 내용이 둥둥 떠올랐다.

타다다닥.

형우의 손이 자판을 내달렸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형우는 피곤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신작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몸에 활기가 펑펑 솟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보면 분명 미쳤다고 할 테지만,

애초에 미치지 않았다면야, 가난을 무릅쓰고 소설가 따위의 꿈을 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째깍, 째깍.

그렇게 끝없이 시간이 흘렀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눈이 뻑뻑했다. 글자를 얼마나 오래 봤는지, A4용지 위에 있는 글자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판 위를 달리던 형우의 손이 멈췄다. 그대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쾅!

머리가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했다.

애정이 가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몇 번이나 도전하다가 포기했다. 형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래된 노트북의 모니터 위로 작은 글자들이 수없이 반짝거렸다.

<뉴 카우보이>

만들어진 캐릭터에 애정을 담는 건 실패했다. 그래서 대신 애정이 가는 사람들을 모티브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약간 어수룩하지만, 사랑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보안관인 헤럴드 데이비스.

어릴 적 가족을 잃은 탓에 조금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일 줄 아는 뛰어난 현상금 사냥꾼인 베아트리체.

형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닮은 두 명의 총잡이가 황야를 누비는 그 유쾌하면서도 어딘가 뭉클해지는 이야기.

책상에 머리를 처박은 그대로, 형우는 실실거리며 웃었다.

“…완성이야.”

형우의 두 번째 작품은 그렇게, 갑작스러운 기회로 시작되었다.

* * *

“흐아아아아!”

형우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지난 며칠간 한참이나 글을 써댄 탓인지, 몸이 배기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하지만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형우의 표정은 꽤나 밝았다. 형우의 앞에 놓인 두꺼운 A4용지는 지난 삼일 간 썼던 <뉴 카우보이>의 원고였다.

“이렇게나 빨리 쓰다니….”

저번 <서울낭인괴담>도 빠르게 쓰긴 했지만, 이번 <뉴 카우보이>와는 비교도 안 됐다. 잘 세운 뼈대 덕분이었다.

소설의 3요소. 인물 사건 배경.

배경은 서부극. 인물은 형우가 가장 관심 있고 좋아하는 사람인 어머니와 아버지에서 따왔다.

배경과 인물이 확실하니 사건은 저절로 따라왔다. <서울낭인괴담>을 쓸 때는 생각해 둔 사건에 맞추기 위해 캐릭터를 이리저리 비틀어야만 했다.

‘그 탓에 망했지. 글도 쉽게 써지지 않았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뭐 그런 멍청한 실수를 했나 싶을 정도로 당연한 말이었지만, 형우는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민준의 말대로, 겪어 보고 깨닫는 거랑 칠판에 써진 글로 깨닫는 건 다른 맥락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난 김에 민준 삼촌네나 가 볼까?”

지난 며칠간 형우는 성민준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민준은 요새 바빴다. <환생이 조금 애매하다>의 2권 마감이 코 앞이었기 때문이다.

‘마감이 아마 어제까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날짜를 확인해 보니 맞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민준을 찾아가더라도 별로 폐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작가지 편집자냐 하면서 약간 투덜거리기는 하겠지만.

‘그거야 뭐.’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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