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2화 (12/200)

#11.

캬아!

저녁 시간, 형우의 집. 삼겹살을 한 점 집어먹은 성민준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역시 상추도 맛있고 깻잎도 맛있지만, 이 무총쌈만 한 게 없다니까? 형우야, 서울엔 이런 거 없지?”

“네.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무총을 상추처럼 먹는 무총쌈. 봄 무의 진가는 무 뿌리가 아니라 무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무총 뿐만이 아니다. 그 옆에는 어머니가 즉석에서 만든 쌈무도 있었다. 손으로 무를 저렇게 얇게 써는 것은 오 년 넘게 자취를 한 형우조차도 불가능한 묘기였다.

“누님. 무가 참 맛있소. 무총도 맛있고. 이거 어떻게 한 거요?

가을 무는 배랑도 안 바꾸지만, 봄 무는 개를 줘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겨울을 대비해 양분을 잔뜩 쟁여놓은 가을 무와는 다르게 봄 무는 그 양분을 대부분 성장하는 데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무는 달랐다. 무총은 작고 연했고, 알은 큼지막하게 두껍고도 달콤했다.

“이거, 가을무라고 해도 믿겠소.”

“가을 무가 다 죽었냐. 텁텁하기만 하구만.”

민준 삼촌이 기껏 너스레를 떨었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아까의 대화 때문이다.

‘싫어요.’

형우는 글을 그만두면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말을 단박에 거절했다. 뭐라고 더 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알았다며 다시 무를 뽑았다.

“너도 몇 개 가져가. 이번에 두 줄 뽑았어.”

“두 줄이면 몇 갠가. 이십 뿌리요, 삼십 뿌리요?”

“이십. 열 개 들고 가서 이장님 드려.”

“세상에. 이장님은 복 받았네. 그런데 제 건요?”

“너한테 무를 주면 네가 해 먹니? 나중에 깍두기 담가줄 테니까 일단 가.”

“누님은요?”

“나는 양조장에 일이 있어서, 한두 시간쯤 있다 올 거다.”

“알겠습니다, 누님! 충성!”

민준은 그대로 과장되게 손을 들어 어머니에게 경례했다.

“형우, 너도 민준이 좀 도와줘.”

“어, 저요?”

갑자기 말을 걸어온 어머니 탓에 형우는 조금 놀랐다. 어머니는 뭘 그리 놀라냐는 듯이, 형우를 향해 무 몇 개를 내밀었다.

“그래, 무 열 개를 혼자서 어떻게 옮기니? 네가 다섯 개 들어.”

그 말을 들은 민준이 입을 빼쭉 내밀었다.

“누님. 누님 아들이 더 젊은데 왜 다섯 개요? 난 네 개만 들 거요. 형우, 네가 여섯 개 들어라.”

“뭐야?”

째릿!

어머니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민준 삼촌을 노려봤다. 그 앞에서 민준은 작은 쥐처럼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농담이요, 농담. 형우야 다섯 개만 들거라. 흐흠, 공평, 공평이 제일 중요하지.”

“괘씸하니 네가 여섯 개 들어.”

“알겠소, 누님. 형우야 하나 더 줘라. 아니 그 큰 거 말고 옆에 작은 거, 그래, 그거…. 어라, 너도 갈 테냐?”

“삐약!”

어느새 형우의 어깨에 내려앉은 참치가 귀엽게 외쳤다.

* * *

무는 무거웠다. 형우와 민준은 그걸 끌어안은 채로, 밤의 시골길을 낑낑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던 중, 민준이 갑자기 뒤를 홱 돌았다.

“누님이랑 싸웠냐? 표정이 영 어두운데, 무슨 일 있었지?”

그렇게 묻는 민준에게, 형우는 오늘 무밭에서 어머니가 글을 관두고 공무원을 하라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뭐 그런 걸로 고민해?”

“예?”

심각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다 들은 민준의 반응은 딴판이었다.

“너, 앞으로 작가질 하면 그 비슷한 이야기 오백 번은 더 들을 거다. 그중 450개 정도는 들을 필요도 없어. 그건 다 배알 꼴려서 하는 말이니까. 자기는 꿈도 뭣도 다 버리고 낭만 없이 사는데, 작가란 놈이 거드럭거리니 심통 나서 하는 말.”

“남은 50은요?”

“그건 좀 중요하지.”

민준이 씩 웃었다.

“그건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윤아 누님도 딱 그 마음일 거다. 네가 매일 밥도 안 먹고 방에서 소리를 지르고, 어깨 푹 내려앉아서 괜히 한숨만 푹푹 쉬니까. 글이라는 게 사람 잡아먹는 거구나 싶은 거지.”

그러면서 민준이 들려준 이야기는, 과거에 자신이 스트레스성 위궤양에 걸렸던 때의 이야기였다.

“퇴원하던 날, 나도 누님한테 똑같은 말 들었어.”

“공무원 하라는 말이요??”

“공무원은 아니고… 책이니 노트북이니 다 팔아치우고 밭뙈기나 사서 농사나 같이 짓자고 하더라. 자기가 알려 주면 먹고살 정도는 된다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당연히 거절했지, 인마. 누님이 얼마나 불같이 화를 내던지. 화 풀 때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화는 어떻게 풀렸는데요?”

“어쩌긴 뭘 어째.”

민준이 털털하게 웃었다.

“성공해서 보여 줬지. 누님, 이것 좀 보소. 내가 글 써서 차도 바꾸고 집도 바꿨소. 이렇게.”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당당한 척했지만, 사실 소설이 망한 건 형우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재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말을 들은 민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뭔 소리야. 너 재능 있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루 만에 수십 권 소설을 다 읽고, 그 세부 요소를 분석해서 알아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뿐인가? 첫 소설에서 추천하는 글을 받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이트에는 중에서는 50화를 넘게 쓰고도 추천 글 하나 받지 못한 습작생들도 수두룩 빽빽하다.

“그리고 뭣보다, 너는 글 쓰는 걸 재밌어하잖아.”

하루에 여덟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노트북 앞에 서서 빈 페이지를 응시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이었다.

“넌 재능이 없어서 망한 게 아니야. 이유는 다른 데 있어. 너도 알지?”

그 익살맞은 질문에, 형우는 피식 웃었다.

“…맞아요. 자만심이죠. 독자를 만만하게 봤어요. 독자라기보다는… 계몽 대상으로 봤죠. 글 쓰는 건 나니까, 독자는 그냥 읽고 배우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쓴 글이 재밌겠냐?”

민준의 말은 정확하게 형우의 가슴팍을 후벼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픈 느낌보다는 마치 오래된 티눈을 파낸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었다.

“…조금만 일찍 말해 주지.”

“실패하기 전이었으면 네가 귓등으로나 들었겠냐? 당신에게는 재능이 있으니, 조금 겸손한 마음으로 차기작이나 열심히 생각하도록. 이상!”

그렇게 말하면서 담배를 꺼내 무는 성민준이 얼마나 얄미워 보이던지. 하지만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직접 입으로 들으니 또 다른 느낌이랄까. 같은 분야의 선배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이었다. 그사이 담배를 다 피운 민준이 형우를 바라보며 사람 좋게 웃었다.

“다 왔다. 이장님 댁이야.”

이장님 집은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늦은 밤 TV를 보다가 갑자기 튼실한 무 열 개를 받아든 이장님은 귀가 입에 걸릴 듯이 웃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 나도 그냥 받기만 해서는 성에 안 차지.”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며 이장님은 형우와 민준을 쇼파에 앉혔다. 형우의 어깨에 얌전하게 앉아있던 참치가 날아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뺘아악!”

“어? 참치야?”

참치가 날아간 곳은 이장님의 거실 구석에 위치한 한 오래된 진열장의 앞이었다.

콕콕.

그대로 진열장의 유리 칸막이를 쪼는 참치를 형우가 재빨리 만류했다.

“안 돼. 그러다가 망가지면 어쩌려고.”

“뺙.”

알아들었다는 듯이 참치는 쪼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형우의 어깨 위로 돌아갔다. 형우는 혹시 진열장에 금이라도 갔나 싶어, 유리 위에 잔뜩 앉은 먼지를 슥 닦아냈다. 그러자 진열장 안에 놓인 물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민준이 아는 체를 했다.

“뭐야? 비디오테이프잖아?”

민준의 말대로 진열장 안은 먼지가 잔뜩 앉은 비디오들로 가득했다. 어느새 다가온 이장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게 아직도 우리 집에 있었구만.”

“이장님 거예요?”

“아냐, 아냐. 내가 이 나이에 비디오 같은 거 보겠나? 예전에 내 아들이 봤던 거야. 누구한테 받은 거라고 했는데…. 아 맞다.”

잠시 골똘히 고민하던 이장님이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맞네, 맞아. 이거 철호 거네.”

“아버지요?”

김철호,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형우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이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 이름도 쓰여 있잖여.”

이장님의 말대로였다. 김철호. 비디오의 구석에 자그맣게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형우가 다급하게 이장님의 팔을 잡았다.

“이장님, 이거 저 가져가도 돼요?”

“그렇게 혀. 어차피 이 집에선 보는 사람도 없어. 보자 보자, 그 플레이어인가 뭔가도 아마 여기 있을 것인데… 여깄군.”

잠깐 찬장을 뒤적거리던 이장님의 손에 뭔가 커다란 비디오 플레이어가 끌려나왔다.

“언젠가 버리려다가 혹시나 해서 내비 둬 본 건데, 드디어 주인을 찾아 가는구만.”

형우에게 테이프를 건네주며 이장님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 표정이 조금 슬퍼 보이는 걸 보니,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을 추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준의 표정은 좀 달랐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민준은 줄곧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삼촌, 뭐 문제라도 있어요?”

“문제라기보다는….”

민준이 별것 아니라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형님이 비디오를 좋아했었나 싶어서.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거든.”

* * *

끼이익.

양조장에서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윤아의 두 눈이 크게 커졌다. 집 안이 완전 난장판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우야?”

윤아는 슬쩍 형우의 열린 방 틈을 바라봤다. 형우는 보이지 않았다. 집을 이 모양으로 해 놓고 어디로 가버린 건지. 윤아는 아들의 방문을 슬쩍 열었다.

“…비디오?”

성민준과 같은 세대인 윤아는 한눈에 비디오와 그 주변 도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요즘에야 DVD 같은 것도 구닥다리 유물 취급받지만, 윤아가 어릴 때만 해도 비디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대중적인 수단 중 하나였었으니까.

윤아는 저도 모르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테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쾌걸 조로>

그것을 본 윤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순간에 딱 맞춰 형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니? 언제 오셨어요?”

형우는 커다란 브라운관 TV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마도 저걸 찾느라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뒀던 모양이었다. 윤아의 시선을 느낀 형우가 멋쩍은 듯이 변명을 늘어놨다.

“오늘 이장님 집에 갔었는데, 이게 있더라고요. 아버지 거라고 하던데.”

“맞다. 느이 아버지 거지.”

“그래서 노트북으로 한번 연결해 보려고 했는데… 옛날 기기라 그런지 단자가 맞지가 않더라고요.”

“잘 찾아왔다. 그건 될 거야.”

형우가 들고 온 TV는 윤아가 결혼할 때에 혼수로 들고 온 오래된 제품이었다. 리모컨도 없어서, 동그란 다이얼을 빙글빙글 돌려서 채널을 맞춰야 하는 추억 속의 물품. 진작 버리려고 했지만, 혹시 쓸 데가 있을까 싶어 창고에 박아 놓은 채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줘 봐라. 내가 하마.”

“제가 할게요.”

“네가 비디오에 대해 뭘 아니.”

윤아는 기어코 형우의 손에서 TV를 빼앗아 든 뒤, 능숙한 손놀림으로 비디오 플레이어에 연결했다. 다행히도 오래된 기기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뭐부터 볼까요?”

“<쾌걸 조로>”

윤아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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