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민준이 준 소설을 찬찬히 살피던 형우는, 곧 그 안에서 나름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거… 교과서구만.’
<나 혼자만 파워 업>과 <독자가 다 앎>은 형우도 이름을 들어 본 유명 작품이었다. <커다란 인생>은 현대 판타지의 수작이었고, <개백정 황태자가 되었다>는 민준이 쓰던 <환생이 조금 애매하다>와 비슷한 맥락의 퓨전 판타지 소설이었다. <매지션 킬러>는 약간 고전적인 정통 판타지의 냄새가 났다.
‘세부 장르인가.’
웹소설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지만, 사실 그 안에도 수많은 세부 장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형우가 지금 읽고 있는 추천작들은 각각의 세부 장르에서 나름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는 평가받는 작품들이었다.
“뭐부터 읽지……?”
그 앞에서 형우는 마치 고급 뷔페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뭘 골라도 재밌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형우는 소설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 혼자서 파워 업>, 어디서 이거 엄청 재밌다고 들었었는데.”
그 두꺼운 양장본을 다 읽는 데에는 네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두 배의 시간을 들여 소설을 분석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 책은 뭐였지? 보자… 아, <독자가 다 앎>이구나!”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다시 책을 붙잡은 형우는 그대로 활자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음에는 <커다란 인생>인가? 오호, 이건 작가가 주인공이잖아?”
그다음에는 <개백정 황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매지션 킬러>까지. 형우는 쉬지 않고 산처럼 쌓여 있는 소설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다 했다!”
형우는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어제 밤새 적어 내린 분석문들을 천천히 살폈다. 민준의 과제는 각 소설들을 분석하여 장르문학의 대표적인 요소 세 가지를 특정해 오라는 거였다.
“…일단 첫 번째. 주인공은 완벽하면 안 돼.”
완벽한 주인공에게는 고난이 없고, 그러므로 감정을 이입하기가 힘들다.
‘주인공이 완벽하게 나오는 먼치킨 장르조차도 주인공 가족한테 문제가 있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거나 했었지.’
완벽하지 않고 문제가 있는 주인공. 형우가 찾아낸 첫 번째 정답이었다. 두 번째 정답을 적기 위해, 형우는 책 무더기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건 진짜 당황스러웠었지.”
형우가 집어든 것은 <백설마왕>이라는 패러디 작품이었다. 형우가 읽은 모든 작품 중 가장 심플한 프롤로그를 가졌다.
[주인공이 사과를 주워서 마왕이 쳐들어왔다.]
이게 끝이었다. 처음에는 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도 되나?’
하지만 그 의심은 책을 읽으면서 차차 확신으로 변했다.
“미친… 진짜 이야기 전개가 되잖아.”
형우는 쌓여 있는 소설들 사이에서 A4용지를 한 뭉텅이 꺼냈다. 민준의 습작 중 하나였던 <노가다 십장에게는 게임이 너무 쉽다>라는 게임판타지 소설이었다. 애착을 갖고 40화 넘게 연재했음에도, 고작해야 추천을 100개 남짓 받은 탓에 유료화조차 실패했다고 했다.
‘좋은 작품을 읽는 것도 좋지만, 실패한 작품을 읽는 것도 좋다고 했지.’
그리고 소설을 읽은 지 10분 만에, 형우는 이 소설이 왜 실패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재미는 있는데, 게임은 대체 언제 하는 거지?’
게임판타지라는 장르명이 무색하게 소설은 5화 내내 딴소리만 했다. 어린 여동생, 부러진 다리, 실패한 사업 같은 것들. 주인공이 게임을 시작하는 계기들이었지만, 장황해도 너무 장황했다.
‘이래서 시작은 최대한 빨리, 간단하게 하라는 거군.’
마치 <해리 포터>에서 해리가 호그와트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 신청서를 내고, 수능 시험을 치르고, 양부모와의 호적 정리나 하느라 1권의 절반을 사용한 느낌이랄까.
‘시작을 장황하게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별것 아닌 원인이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는 편이 더 재미있지.’
이게 두 번째 정답이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답만 남았다.
‘곁다리로 새지 않는 이야기.’
웹소설에서 이야기는 곁다리로 새지 않는다. 헌터물에서는 헌터 이야기만 하고, 복수극에서는 복수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 한국 드라마가 그랬지, 범죄 추리극이라면서 주인공이 연애만 해댔으니.’
형우는 이 부분에 특히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물론 그 외에도 필기한 것들은 많았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복선을 깔고 회수하는 방식 등. 빈칸 없이 꼼꼼하게 글자가 가득 들어찬 A4용지가 수십 장은 됐다. 손목이 짜르르 저릴 정도였다.
“이 정도면 과제는 만점이겠지?”
며칠간 잠을 설치듯 쪽잠을 잤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몸에 활기가 쭉 도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밖에 나갈 채비를 하는 형우. 어느새 잠에서 깬 참치가 표로롱 날아와서 형우의 어깨에 툭 앉았다.
* * *
“민준 삼촌! 저 왔어요!”
아침 댓바람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성민준은 잠에서 깨어났다. 민준은 입가에 흐른 침을 쓱 닦았다.
‘쓰다가 깜빡 잠들었나 보네.’
다행히 키보드에까지 침을 흘리지는 않았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 삼촌! 저 왔다니까요!”
“문 열려있어! 들어와!”
잠시 후, 형우가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민준이 길게 하품을 했다.
“…무슨 일이야? 책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냐?”
“아뇨. 재밌었어요. 전부! 과제도 다 했고요.”
“뭐야?”
그 말 한마디에 잠이 휙 달아났다. 저번에 형우에게 준 책은 거의 오십 권 정도였고, 그 대부분은 B5용지 500p 분량의 양장본이었다.
“그걸 일주일 만에 다 읽고 분석까지 했다고? 확실한 거냐?”
민준의 의심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문창과나 국문학과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들 중에서는 가끔 그런 놈들이 있다.
‘판타지 소설은 쉽다고 생각하는 놈들.’
나 돈 없는데 판타지나 써 볼까? 그거 엄청 쉽다던데. 나도 돈 좀 쉽게 벌어 볼까? 따위의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뛰어들어서는, 유명하다는 작품 한두 권 정도만 딸랑 읽고서 판타지의 모든 것을 체득했다고 거드럭대는 놈들 말이다.
몇억을 우습게 벌어들인 작품을 읽어 놓고서는 내용이 싸구려네, 맞춤법이 틀렸네, 비문 오문 문장 능력이 어떻고 전개가 미숙하고 어쩌고 잔뜩 늘어놓는다. 자기가 쓰면 무조건 그것보다 나을 거라며 며칠간 노트북을 붙잡고 뭔가를 써낸다.
그런 얄팍한 마음가짐으로 써낸 것들이 좋은 물건일 리 없다. 십중팔구는 쓰레기였다. 아니, 십중팔구도 아니다. 죄다 쓰레기였다.
그렇게 실패를 맛보고서는, 웹소설이나 읽는 하급 독자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느니, 자기 글이 너무 수준이 높았느니 하면서 또 병신 같은 허세는 다 부린다.
그런 작태를 몇 번이나 본 적 있었던 탓에, 성민준은 혹시 형우도 그런 쪽의 사람이 아닌가 잠깐 의심했던 것이다.
‘…괜한 의심이었군.’
하지만, 형우가 적어 온 것들을 본 민준은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로 다 읽었구나.”
소설을 대충 읽어서는 알 수 없는 치밀한 복선들과 전개 방식들을 모두 분석해 왔다.
“헤헤.”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으로 형우가 방긋 웃었다. 어두운 다크서클 가운데 있어서 그런지, 눈망울이 더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커피 좀 줄까?”
“예, 부탁드려요.”
“씁쓸이? 아니면 달달이?”
“달달이로 주세요.”
씁쓸이는 커피 머신으로 뽑는 아메리카노를, 달달이는 인스턴트커피를 말하는 거였다. 형우가 아메리카노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잠을 똑바로 자지 못한 탓에 당이 조금 떨어진 게 느껴지는 상태였다. 성민준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커피 두 잔을 만들어 하나를 형우에게 건넸다.
“맛있네요.”
“작가질 하면서 느는 건 커피 타는 솜씨랑 글솜씨밖에 없거든.”
“발자크?”
민준이 피식 웃었다. 발자크는 하루 커피를 2L씩 마신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였다. 그러니까, 글 쓰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작가 농담이었던 셈이다.
커피를 마시며 민준은 형우가 가져온 방대한 양의 A4용지를 천천히 훑었다. 양이 너무 많아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아무거나 뽑아서 읽어도 내용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 정도면….”
민준은 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잠깐 끔뻑거리더니, 마지못해서라는 느낌을 가득 담아 이야기했다.
“글을 써 볼 정도는 되겠네.”
애매한 칭찬이었지만, 형우는 세상에서 가장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조금 더 실망하기를 바랐는데.”
나가는 형우를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준은 커피 한잔을 추가로 뽑았다. 이번에는 달달한 인스턴트커피가 아니라, 쓰디쓴 아메리카노였다. 분위기를 위해서 특별히 조금 더 쓰게 만들었다.
“…장르 소설의 대원칙이라.”
그대로 커피를 들고서 천천히 다시 한번 형우가 써 온 종이를 살폈다.
“전부 맞았어.”
완벽하지 않은 주인공, 하찮은 시작과 장대한 결과, 그리고 곁다리로 새지 않는 이야기.
전문 용어로는 순서대로 사랑스러운 루저(Lovable loser), 유진 스크라이브(Eugène Scrib), 아크 플롯(Arc plot)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지금에야 소설 학원 같은 곳을 가면 쉽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지만, 스스로 알아낸 것과 배워서 안 것은 그 차이가 컸다.
인터넷에서 공식을 보고 큐브를 푸는 사람과 끊임없이 노력해서 스스로 큐브를 풀어낸 사람의 차이랄까. 전자는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진정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후자는 큐브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역시 천재가 맞나?’
형우가 분석한 글을 천천히 살펴보던 성민준은 처음에 그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천재는 무슨.’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문학에 천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열일곱 살에 인류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프랑켄슈타인>을 써낸 메리 셸리도 있고, 스무 살까지 글자도 모르다가 <모비 딕>이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써낸 허먼 멜빌 같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형우가 써낸 것은 그런 느낌과는 달랐다. 뛰어난 감각이나 번뜩임으로 써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깎고 깎아 낸 노력에 가까웠다.
딱 보고 안 게 아니라, 알 때까지 물고 늘어진 거다. 자신의 눈앞에 놓인 수많은 깜지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난 오 년간, 녀석이 어떤 식으로 글을 써 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말 그대로 손에 피가 날 때까지 썼을 테다.
‘뭐, 이것도 천재라면 천재기는 하지.’
글은 가슴으로 쓰는 것도,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엉덩이로 쓰는 것이다.
한 유명 작가가 한 말이었는데, 민준은 이 말을 거의 성경만큼이나 믿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건 작가에게 있어 최고의 재능이지.’
그런 의미에서, 형우는 작가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능 중 한 가지를 이미 갖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끝인 것도 아니고.’
형우는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 분야를 연구한 사람은 거기에 대한 아집 같은 것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형우는 5년간 순문학을 배웠음에도 장르문학을 받아들이는 데에 최소한의 거부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거참. 부끄러워지게 만드네.’
민준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종이책 시장에서 웹소설로 갓 넘어왔을 때, 민준은 조금 오만한 상태였다. 종이책도 출판해 봤는데 그깟 웹소설 따위야 뭐 어렵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쓴 작품이 <노가다 십장에게는 게임이 너무 쉽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재한 지 10화도 안 돼서 출판사로부터 컨텍이 왔다. 그 때문에 민준은 자신이 천재인 줄 알고 글쓰기를 우습게 여겼었다.
그 대가는 컸다. 무려 이 년이 통째로 날아갔다. 한창 돈이 없어서 형우의 어머니에게 핀잔을 듣던 때가 딱 그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멍청했지.’
똑같은 실수를 형우에게 이어 주고 싶지 않았던 민준은 일부러 칭찬 대신 모진 말을 했다.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모르도록 말이다.
‘천재는 자기가 천재인 걸 모르는 게 딱 좋아.’
분위기를 잡으며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렸다.
“…으음?”
민준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시럽을 어디 뒀더라…?”
아무래도, 너무 쓰게 만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