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국대학교의 교칙에 의하면, 재학 중이 아닌 학생은 정식으로 위원회에 회부할 수 없다.
‘도피휴학이라, 약간 비겁하긴 하지만 먼저 비겁한 건 저쪽이었으니까.’
형우가 노린 것은 그 부분이었다. 아무리 공태준이 지랄한다고 한들, 휴학생 신분의 형우에게 개 같은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선배, 죄송해요….”
집으로 가는 버스, 형우의 옆에 앉은 연수는 미안하다는 듯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괜찮아. 어차피 요즘 좀 휴식이 필요하기는 했어.”
사실 휴학은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거였다. 드라마 속 회사원이 사표를 품고 다니는 걸 흉내 내며 품속에 휴학계를 넣고 다닌 것도 그런 이유였다.
“휴학은 괜찮아. 하지만….”
오히려 걱정은 다른 쪽에 있었다.
“공태준, 그 인간이 진짜로 경찰서 같은 곳까지 찾아가면 어떡하지?”
“그러면 저도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연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저희도 가진 패 많아요. 그 새끼가 선배랍시고 후배 여자애들한테 깝죽거리고, 그런 게 몇 갠데. 막말로 우리도 총대 메기 싫어서 참고 있었던 거지, 그쪽에서 법으로 나오면 저도 이제 안 참아요. 내가 총대 메고 쏴 버릴 거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가. 형우가 연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래, 든든하다. 멋지네.”
“…왜 지금에야 생각이 난 걸까요?”
“원래 좋은 반박은 말싸움 다 끝나고 생각나잖아. 그러다 이불도 뻥뻥 차고, 안 그래?”
이게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힘든 순간마다 머리를 번뜩 스치면서 정답이 튀어나왔을 테지만. 사실 좋은 방법은 언제나 늦게 떠오르는 법이다.
“안타깝지만,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생각해.”
3월 2일, 방학 후 등교.
3월 3일, 휴학계 제출.
“그래도 뭐, 애매하게 중간쯤에 휴학한 것보다는 낫지.”
그렇게 이야기하던 사이, 버스는 어느새 형우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연수와 형우가 나란히 내렸다.
“정말 이거면 충분해요?”
“몇 번이나 말했잖아.”
거듭 사과하는 연수에게, 형우는 정 미안하면 이삿짐 싸는 거나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학교도 휴학했는데, 비싼 돈 내고 서울에 있을 필요 없지.’
이참에 월세방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푹 쉬다 올 생각이었다.
“선배, 글은 어떻게 해요?”
“뭘. 글을 꼭 학교에서만 쓰나. 혹시 알아? 탁 트인 자연에서 쓰면 더 잘 써질지?”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아, 짜장면은 네가 사는 거다?”
“당연하죠.”
“탕수육도?”
“네. 마음껏 시키세요. 짜장면 두 개, 탕수육 하나 맞죠?”
“아니, 그걸로는 어림도 없지. 짜장면 세 개. 탕수육 하나, 거기에 깐풍기까지.”
마지막 말은 형우가 한 게 아니었다. 슬그머니 다가온 의재를 보고, 연수가 알은체를 했다.
“의재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불렀어. 오늘 쉬는 날이라기에 이사 좀 도와달라고.”
과사에서 나오자마자 형우는 의재에게 전화해서 휴학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다 들은 의재가 당장 만나자고 하기에 그대로 집으로 부른 것이다.
“공태준 그 새끼! 아오 씨발,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럼 네가 정학 받았겠지.”
“차라리 그러고 말지, 그걸 참냐?”
의재는 한다면 한다는 성격이었으니까, 저 말은 분명 진심일 테다. 형우가 걱정스럽다는 듯 의재를 바라봤다.
“…너야말로 다 끝난 일 가지고 학교에서 괜한 일 만들지 마. 공태준이랑 부딪치지 말라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 참기야 한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안 풀리네? 그 새끼는 왜 너만 보면 지랄이래?”
“난들 아냐.”
개 같은 놈이 개 같은 짓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살 만할 테다.
“고향으로 간다고?”
“어. 오랜만에 엄마 얼굴도 좀 보고. 푹 쉬다 오게. 이번에는 공모전 준비한다고 내려가지도 못했거든.”
“그러지 말고 우리 집 올래? 원룸이라 조금 좁기는 한데, 어떻게 좁게 쓰면 될 거야.”
“말뿐이라도 고맙다.”
형우는 그대로 반지하 방의 열쇠를 꽂고 돌렸다. 끼이익,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고,
“아얏!”
그 즉시 이마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온 참치가 형우의 이마를 콕 쪼아 버린 것이다.
“뺘악!”
“참치야, 그만, 아! 아프다니까!”
한참이나 툭탁거린 끝에, 형우는 겨우 참치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편의점 사장님이 주셨던 쌀과자가 큰 도움이 됐다.
“…미사역 드루이드?”
“너도 그거 알아?”
“그게 형우 선배였어요?”
모자 위에 참새를 얹고 다니는 미사역 드루이드는 최근 SNS에서 꽤 화제를 모았다.
“…완전 난리였는데, 합성이다 아니다로.”
“누가 합성이라 그러면 합성 아니라고 해. 얘 이름은 참치야. 얼마 전부터 키우게 됐어.”
“헤에.”
연수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쌀과자를 쪼아 먹는 참치를 바라봤다.
“귀엽다….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오호, 귀신 잡는 해병대를 잡는 강철 주먹 서연수가 저런 표정을?”
옆에서 의재가 깐족거리자, 연수가 주먹을 확 치켜들었다.
“죽을래요?”
그 모습을 본 의재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 대표로 태권도를 했던 연수니만큼 ‘죽을래요?’는 비유가 아닐 확률이 좀 있었다. 연수를 본 형우가 슬쩍 미소 지었다.
“좀 있다가 만지게 해 줄게. 이삿짐 싸는 거 끝나고.”
“정리할 것도 없는데요, 뭘.”
연수의 말대로였다. 반지하 방은 작았고, 형우도 많은 가구를 쌓아 두는 성격은 아니었다.
* * *
“휴우!”
세 번째 박스를 테이프 고정한 후, 마지막으로 오래된 노트북을 가방에 챙겨 넣는 것으로 정리는 끝났다.
“가구들은 나중에 업체로 옮기면 되니까. 다들 고생했어.”.”
가구라고 해 봐야 밥솥과 냉장고, 그리고 책상과 책장 몇 개가 전부기는 했지만. 전부 다 정리하는 데에는 두 시간도 안 걸렸다.
“참치야, 너도 고생했다.”
형우가 새장 문을 활짝 열었다. 청소를 위해서 잠깐 참치를 새장 속에 넣어 뒀던 것이다.
“뺘악!”
문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튀어나온 참치는 그대로 날개를 퍼덕거려 어딘가로 날아갔다. 날아간 곳은 허름한 책장 뒤였다.
“거기 뭐가 있니?”
“잠깐, 연수야.”
참치의 뒤를 쫓는 연수를 말린 건 형우였다.
“내가 볼게.”
저번에도 참치가 저런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10cm도 넘어 보이는 돈벌레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결국 참치가 먹어 치우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좀 아찔한 기억이었다.
‘돈벌레만 아니면 좋겠는데.’
형우가 침을 꿀꺽 삼키고, 책장 뒤쪽을 살폈다. 돈벌레는 아니었다.
<전생검신전기 2>
참치가 책장 뒤에서 발견한 것은 흔히 말하는 B6규격 대여점 소설이었다. 심지어 1권은 어디 갔는지, 2권만 달랑 남아 있었다.
‘저런 책이 아직 내 방에 남아 있었나?’
고등학교 시절, 형우는 대여점 소설에 빠져 살았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도 거기서 기인했다.
하지만 정작 노력해서 학교에 들어오고 나니, 그곳은 형우의 생각과는 상당히 달랐다. 한국대학교 문창과는 교수진부터 학과 커리큘럼까지 장르문학보다는 순문학에 친화적인 학교였다.
공태준처럼 대놓고 장르문학은 쓰레기라며 핀잔을 주는 사람까지는 많지 않았지만, 순문학을 놔두고 굳이 장르문학을 파는 사람들 또한 없었다.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형우 또한 자연스럽게 장르문학과는 점점 거리를 두게 됐다.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살 때는 비싸게 샀는데, 중고 서점에 파니 오백 원도 안 쳐 줘서 조금 억울했던 기억이 났다. <전생검신전기>는 책장 뒤에 떨어진 덕에 겨우겨우 팔리지 않고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버리고 가기에는 아깝고, 책 한 권을 넣자고 이미 포장이 끝난 박스를 다시 뜯기도 좀 그랬다. 뭣보다, 이런 책이 집에 있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별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잠시 고민하던 형우는 <전생검신전기>를 가방 속에 슬쩍 챙겨 넣었다.
* * *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고향 집의 대문 앞. 형우는 그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일단 말은 해 뒀는데….”
도저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분명 어머니가 한 소리 하실 게 뻔했다.
“그냥 의재 집에서 머물 걸 그랬나?”
심지어 형우는 어머니와 별로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본 것도 아마도 군대 전역 날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뉘신데 여기서 서성이쇼?”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형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너 형우 아니냐? 맞지? 윤아 누님 아들?”
“민준 삼촌?”
“그래 인마, 짜식, 많이 컸네!”
성민준. 어릴 때부터 형우와 알고 지내던 고향 토박이 아저씨였다. 어머니보다는 다섯 살이 어렸다.
“누님 집 앞에 누가 새장을 들고 서성이기에, 잡상인이라도 온 줄 알았지 뭐냐.”
형우의 짐은 단출했다. 노트북이 든 가방과, 참치를 넣어 들고 온 새장이 전부였다. 어제 정리한 이삿짐은 며칠 뒤에 내려올 예정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대학 간다고 서울 올라간 이후로 처음 아니냐?”
“어… 그런 것 같아요.”
“짜식, 얼굴도 좀 보게 내려오고 그래야지 인마. 공부 바쁜 건 알겠는데… 윤아 누님! 누님 아들 왔소!”
형우가 말릴 새도 없이 성민준이 외쳤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덜컹.
집의 대문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왔으면 들어오기나 할 것이지. 동네 시끄럽게 뭐 하는 짓이야?”
* * *
형우의 걱정과는 달리, 어머니는 왜 왔냐느니, 그동안 뭐하고 지냈냐느니 하는 것은 묻지 않았다. 심지어 참치를 보고서도 아무 말 없었다.
한 말이라고는 밥 먹었냐? 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무뚝뚝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2년 만에 왔는데 이럴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흣챠.”
그렇게 한참을 TV만 보던 어머니는 갑자기 TV를 끄고 일을 나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오후 7시였다.
“해 다 졌는데, 무슨 일을 해요?”
“농사만 일이냐. 아래 양조장에서 술 빚는다. 아, 맞다.”
어머니는 나가기 전 기억났다는 듯, 냉장고를 가리켰다.
“저기 뭐 있으니까 배고프면 꺼내 먹고.”
“예. 다녀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형우는 방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들어온 방은 가구가 빠져 넓어 보였다. 있는 거라곤 옷장 하나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이건 아직도 안 버렸네.”
초등학교 때부터 내내 공부하고 책을 읽었던 추억 속의 책상. 혹시나 하고 손가락으로 쓱 문질러 봤지만, 역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열심히 쓸고 닦은 덕분이리라.
“그나저나…. 할 게 없네.”
막상 호기롭게 고향으로 오기는 했지만, 오고 나니 할 게 없었다. 누워서 잠을 청하려고 해도, 올라오는 내내 기차에서 눈을 붙인 참인지 잠조차 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일어났구나.”
“뺙뺙!”
참치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였다.
“잘 잤니?”
“뺘악!”
녀석은 작은 부리를 움직여 능숙하게 새장 문을 땄다. 저런 건 또 언제 배웠대?
“뺘아악!”
그대로 형우에게로 날아온 참치는 그대로 옆에 놓인 가방을 콕콕 쪼았다. 그 안에는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글을 쓰라고? 아니야. 며칠은 좀 쉬고 싶어.”
정확히 말하자면,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쪽에 가까웠다.
‘난독증이라니.’
요즘 형우는 약간의 난독 증세를 겪고 있었다. 형우도 가끔 기성 작가들이나 동기들이 난독을 호소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글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런 증상이 생긴다고 했는데, 직접 겪어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기야, 이렇게 스트레스받은 적이 없긴 했지.’
글에 영혼이 없다고 한 현수의 말이 치명타였다. 글을 읽기도 힘들었고, 쓰는 건 더더욱 힘들었다. 지금 상태로 억지로 수업을 들어 봐야, 그냥 시간 낭비, 등록금 낭비밖에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태준이 뭐라고 지껄이든 형우가 학업을 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러니까, 글은 당분간 못 써.”
“뺘악, 뺘악!”
하지만 참치가 원하는 건 형우가 글을 쓰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녀석은 조그마한 부리를 이용해서 낑낑거리며 형우의 지퍼를 잡아당겼다.
“저건?”
그 틈으로 책 한 권이 보였다. 형우가 책장 뒤쪽에서 발견한 대여점 무협 소설인 <전생검신전기 2>였다.
“뺘악!”
참치는 그 표지를 부리로 콕콕 쪼아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읽어.’
라고 말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