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월 2일. 전국 학생들의 개강일. 봄의 하늘 아래로, 현수막 하나가 나부꼈다.
전국 대학생 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한국대학교 4학년 조현수(문창과).
“에휴.”
현수막을 본 형우가 한숨을 깊게 쉬었다.
전국 대학생 문학상.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 중에선 가장 이름있는 문학상이다.
형우가 준비했던 공모전이기도 했다.
위이잉!
타이밍 좋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문창과 단톡이었다.
과대: 오늘 5시에 조현수 학우님의 전국 대학 문학상 대상 축하회가 있습니다. 시간이 있으신 분은 꼭 참석해 주세요.
조현수: 감사합니다.
서연수: 축하드려요 선배! 저도 소설 부문 냈었는데 ㅠㅠ
공태준: 야 ㅋㅋ 너 될 줄 알았다.
…
그 밑으로도 수많은 축하 메시지가 가득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메시지들을 보니 괜히 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제출이라도 하고 떨어졌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괜히 사고에 말려들어서는.’
며칠 전, 대학교문학상 공모전의 마감일.
형우는 몇 달 동안 밤을 꼬박 새워 완성한 소설을 응모하기 위해 우체국으로 가던 중에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한 할머니 한 분을 발견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은 다섯 시 오십 분. 우체국은 여섯 시에 문을 닫으니, 마감 십 분 전이었다.
‘도와드리고야 싶지만….’
내 코가 석 자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우체국으로 발을 돌리려는 찰나, 형우의 눈에 한 무리의 중학생이 들어왔다.
부아앙!
딱 봐도 양아치같이 보이는 학생들이 전동 킥보드 두 대를 여섯 명이 같이 타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위험한데, 서로 왁자지껄 떠드느라 전방주시도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킥보드가 컨트롤이 될 리가 없었고……
“어, 어!”
……방향을 잃은 킥보드는 그대로 길을 헤매고 있던 할머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찔했지.’
만약 형우가 할머니를 향해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분명 큰 사고가 났으리라.
‘그 탓에 공모전은 놓쳤지만.’
학생들이 탄 킥보드는 형우의 소설을 사정없이찢어발겼다. 최대한 빠르게 근처 피시방에서 새로 소설을 뽑아 왔지만, 이미 시간은 여섯시 반. 우체국의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에휴. 내 방학.”
한숨을 내쉬며 형우는 핸드폰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부적을 바라봤다. 참새 한 마리가 그려진 노란색 부적. 자신을 점쟁이라고 밝힌 할머니가 고맙다며 준 것이다.
“영험하다던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평소에는 미신을 잘 믿지 않는 형우였지만,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왠지 모르게 미신 같은 것에도 은근히 믿음이 가는 법이다.
“요, 형우!”
교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등을 툭 쳤다. 형우가 그쪽을 돌아봤다.
“아, 의재구나. 오랜만.”
방학동안 운동이라도 한 건지, 안 그래도 떡 벌어졌던 어깨가 더 커진 느낌이었다. 거기에 부담스러운 태닝이라니.
문창과 학생이 아니라 체육과 학생이라고 해도 해도 위화감이 없는 이 남자의 이름은 서의재.
형우의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나저나 뭘 그렇게 보고 있었냐?”
의재의 물음에 형우는 그대로 머리 위 현수막을 가리켰다. 아, 저거. 의재가 아는 체를 했다.
“현수가 현수막에 걸렸네.”
“그걸 지금 개그라고 한 거야?”
형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의재를 바라봤고, 의재는 뭐 어떠냐는 듯이 하하 웃었다.
“네 얼굴이 워낙 죽상이기에 좀 풀라고 한 거야. 그나저나 조현수라니. 세상 존나 불공평하네. 걔는 부자고, 얼굴도 반반하고, 글도 잘 쓰고. 못하는 게 뭐냐? 듣자 하니 뭔 카드 게임도 잘한다던데.”
조현수.
과 수석으로 입학한 이후, 한 번도 1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수재 중의 수재였다.
“하기야, 그러니 대학 문학상을 탔겠지.”
“분명 졸업생 대표도 쟤가 할 걸? 얼마 전에는 뭔 행사에서도 대상 탔다던데……. 그나저나 형우 너, 뒤풀이 갈 거냐?”
아까 메시지로 온 현수의 수상 기념 뒤풀이를 말하는 거였다.
“난 됐어.”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현수와는 나름 친한 사이였지만, 그 자리에 가면 너무나도 배가 아플 것 같았다.
‘누군 내지도 못했는데, 누구는 대상이라니.’
좀생이 같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라는 건가?
“정말? 안 간다고?”
의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형우를 쳐다봤다.
“한우 먹는다던데?”
“뭐라고, 한우?”
한우, 그 단어에 형우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래 인마. 몸에 좋고 맛도 좋고 1인분에 이만 원씩 한다는, 마블링이 르누아르가 그린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는 그 한우!”
누가 문창과 아니랄까 봐, 묘사가 아주 리얼했다. 형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넌 나중에 음식 블로그 하면 잘하겠다.”
“그거 칭찬이냐, 욕이냐?”
“칭찬이야.”
꼬르륵.
형우의 위는 결국 의재의 실감 나는 묘사를 참지 못했다.
* * *
짠!
형우와 의재의 잔이 부딪쳤다. 눈앞의 석쇠에서는 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인마, 오길 잘했지?”
“그래. 이 고기가 뭐랬지? 스키야키?”
“일본식 불고기라는데, 우리 학교 근처에 이런 데가 있었을 줄이야. 나만 몰랐지 뭐.”
“알았어도 우린 못 와. 짜장면이나 먹었겠지.”
“흐흐, 그건 그렇지. 그러니 맘껏 먹자고!”
그렇게 한창 한우를 음미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의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선배! 적당히 좀 먹어요!”
2년 후배인 서연수. 그녀는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의재를 째려봤다.
“아직 현수 선배는 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막 먹으면 어떻게 해요!”
“뭐래, 돈 네가 내냐? 현수도 분명 뭐라고 안 할걸?”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아는데요?”
“왜 몰라? 연수야. 우리는 말이다, 현수를 삼 년 넘게 봐 왔단다.”
문창과는 전통적으로 늘 여초과였다. 특히 형우와 의재의 기수는 그게 조금 더 심했다. 총원 서른에 남자 고작 세 명.
“그 상황에서 친해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연수야, 그러니까 우리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 혹시 아니? 우리가 너랑 현수 사이에 다리라도 놔 줄지?”
“다, 다리라니! 무슨 소리예요?”
“너 현수 좋아하잖아. 우리 과 애들은 다 알 텐데.”
당황한 연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누, 누가 좋아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괜히 글을 쓰는 사람이겠니. 인간의 감정, 서브 텍스트, 그런 걸 누구보다 잘 캐치하니 글을 쓴다고 나서는 것이야. 뻔히 보이는 인간의 감정을 모른 척하면, 글쟁이로서 벌 받는다.”
“아니거든요!”
“연수야. 속일 걸 속이려무나. 하늘이 자기가 땅이라고 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물고기가 자기가 새라고 한들 새가 되는 것은 아니란다.”
“선배, 한 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저 고등학교 때까지 태권도 한 거 알죠?”
연수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의재가 과장스럽게 무서워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형우의 입에서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딸랑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깃집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현수다!”
하얀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후줄근한 모습의 남자. 오늘의 주인공인 조현수였다.
“오오, 조현수! 한국대학교 문창과의 희망!”
“믿고 있었다! 현수야!”
“조현수 선수! 우승!”
동기들이 온갖 과장된 수식어를 남발했다. 오늘 같은 날은 어깨 좀 펴고 폼 좀 재도 좋을 텐데, 녀석은 평소처럼 어색한 듯 웃기만 했다.
“문창과의 희망은 뭐야. 부끄럽게.”
“흐흐, 뭐 없는 말 했나? 이참에 말해 보자. 현수야. 너 상 받을 거 알았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운이 좋았지.”
동기들의 칭찬에 현수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화답했다.
“와, 진짜 재수 없다. 안 그러냐 형우야?”
그 모습을 본 의재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형우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해.”
“저걸 그냥 놔둘 거냐?”
“뭐 하게?”
“흐흐, 이 형님이 생각해 둔 게 있지.”
의재가 소주 한 병을 챙겨 들고서는 현수의 옆에 턱 앉았다.
“현수 너, 동기들한테도 축하주 한잔 받아야지. 안 그래?”
“나 술 못 마셔. 차 끌고 왔단 말야.”
현수가 보란 듯이 차키를 내밀었다. 제 딴에는 봐달라는 제스쳐였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그으래?”
대학생이 자동차까지! 이 부러운 놈!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차 끌고 왔다는데, 술 권하기도 그렇지. 의재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대신 음료수를 잔뜩 시켰다.
“설마 환타도 못 먹는다고 하진 않겠지?”
“환타 정도야….”
“너 분명 괜찮다고 한 거다?”
“차 끌고 왔다는데, 술 권하기도 그렇지.”
그렇게 말한 의재는 소주병을 멀리 치우고 그 대신 음료수를 잔뜩 시켰다.
“설마 환타도 못 먹는다고 하진 않겠지?”
…그렇게 병따개를 들고 현수를 바라보는 의재의 표정은 마치 <사탄의 인형>에 나오는 처키 같아 보였다.
* * *
“더, 더는 못 마셔… 꺼어억.”
환타를 내리 세 병을 마신 현수가 픽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동기들 사이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의재의 말대로라면, 탄산음료를 잔뜩 마시면 어느 순간부터는 술 마시는 거랑 별 차이가 없어진단다.
“그럴 거면 물을 먹이지?”
“물은 자식아, 잘못 먹으면 죽어. 물 중독이란 게 있는데, 체내 나트륨 농도가….”
“술자리에서 나트륨 농도가 왜 나와! 너도 술이나 마셔라!”
동기들이 푸하핫 웃으며 의재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의재는 삼국지의 관우라도 된 듯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그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럼 오늘 저 서의재! 죽을 각오로 술 한번 마셔 보겠습니다!”
“누가 보면 네가 상 받은 줄 알겠다!”
“상이야 받았지! 술상! 잔칫상! 문학상 대상 뭐 먹지도 못하는 거. 이게 더 낫지 않냐?”
“그 말이 맞다! 먹자! 먹어!”
위이잉.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던 차,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누구야? 의재, 또 너냐?”
“헤헤, 나 맞네. 잠깐만… 이거 단톡인데?”
그 말을 시작으로 술자리에 모인 모두의 핸드폰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아오, 씨발.”
메시지를 가장 먼저 확인한 의재가 욕을 내뱉었다. 주위 반응도 비슷했다.
‘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형우도 재빨리 핸드폰을 확인했다.
과대: 야 공태준 온대.
의재: 뭐야 영훈이가 마크하기로 했잖아.
과대: 영훈이 다쳤다는데?
의재: 어쩌다가?
과대: 몰라. 참새한테 물렸대.
의재: 뭐라고?
형우를 비롯해서, 단톡을 확인한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듯 썩어들어 갔다.
연수: 언제 도착하는데요?
과대: 5
연수: 5분이요?
과대: 4… 3… 2… 1….
딸랑딸랑.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가게의 입구를 바라봤다.
“어이, 후배님들. 나 빼고 재밌게 놀고 있으셨어? 인사는 어디 갔고?”
어마어마한 대사와 함께 등장한 이 남자의 이름은 공태준.
과 내에서는 공태준이라는 이름보다 꼰대준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꼰대 중의 꼰대였다.
“ ….”
방금까지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부과대인 의재가 몰래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늦으셨네요.”
“영훈이 그 새끼가 클럽 가자고 했는데, 씨발 갑자기 안 된다고 하더라고. 뭐 그딴 놈이 다 있어?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현수 어디 있어, 현수?”
“저 여기 있습니다, 선배님. 끄윽!”
아까 마신 환타가 아직도 남았는지, 현수가 길게 트림을 했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어디서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분위기가 불편할 만도 하건만, 꼰대 중의 꼰대인 공태준은 오히려 마음에 쏙 든다는 듯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 현수. 1등 축하한다 야.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만 쓰면 1등 할 거라고… 인마, 형 말 듣기를 잘했지? 나중에 한턱 쏴.”
“이미 쏘고 있는데요.”
“자식아, 이거 말고 개인적으로 한번 쏘라고. 너 돈도 많잖아?”
공태준이 으쓱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왜 하필….’
공교롭게도 그 자리는 형우의 맞은편이었다. 공태준을 마주하는 형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형우는 공태준이 등장한 순간부터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공태준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형우였기에.
신입생 시절, 형우는 당시 3학년이던 공태준에게 크게 덴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소설가를 묻는 질문에, 판타지 소설가를 말했던 게 그 이유였다.
‘판타지 따위나 쓰려고 대학 왔냐? 그런 불쏘시개는 집에서 혼자 써! 나 때는 새꺄, 대학에서 그런 말 하면 문학을 더럽힌다고 선배들한테 얻어맞았어, 인마! 세상 좋아진 줄 알아!’
그 이후로도 만날 때마다 나 때는, 나 때는 하며 얼마나 지랄하던지. 거기에 치가 떨린 탓에 형우는 그 꽉 막힌 군 생활 때도 ‘나 때는’이라는 말을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어? 뭐냐, 형우 너도 왔냐? 이런 데 잘 안 오잖아.”
그제야 형우를 발견한 공태준이 피식 웃더니, 먼저 말을 걸었다.
“너는 배알도 없냐? 나라면 안 왔다.”
공태준이 빈정거렸다. 잔뜩 긴장한 형우를 대신해 의재가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뭐야, 너희 몰랐냐? 얘도 그거 냈잖아. 전국 대학생 문학상.”
형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한테도 말 안한 건데, 이 인간이 어떻게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