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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오크 왕국
1백 척이나 되는 무장한 캐랙선은 그것만으로도 일대장관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즐길 여유는 없었다.
바다 수색과 동시에 육지 수색도 이어졌다. 신료들은 스너비 왕국 전역에 주둔 중인 군단마다 비상을 걸어 하벨을 찾아 나섰다.
이것도 공식적으로는 전쟁에 대비한 군사훈련이라고 했지만 천부장급 이상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육지와 바다에서 수색활동을 펼쳤지만 그 어디에서도 하벨 국왕의 흔적은 없었다.
에슬론 대륙의 동부 술탄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페파스 공국.
320년 전 술탄 제국의 제2왕자였던 페파스가 대공의 작위에 오르면서 공국령을 선포하고 지금껏 페파스 공국으로 흘러왔다.
페파스 공국은 크게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이렇게 5개 지역으로 나뉘며, 중부는 공왕의 왕성이 있고, 나머지 4곳은 후작들이 다스리고 있다.
공왕은 후작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하여 각 지역마다 백작을 3명씩 임명하여 주둔하게 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후작들이라고 해도 군사적인 문제만큼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3명의 백작들이 철저하게 견제를 하고 있기에 공왕의 명이 없이는 군사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고위 귀족인 백작까지의 작위는 공왕이 직접 내리지만 그 이하의 작위는 각 지역을 다스리는 후작들이 알아서 작위를 내릴 수 있는데 자작, 남작, 준남작, 기사까지였다.
페파스 공국은 술탄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공국이기에 술탄 제국은 공국에게 형제 나라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두 곳은 외교적으로 큰 문제없이 평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페파스 공국의 남부에서도 최남단 켈터스 남작령.
해안을 끼고 7개의 마을을 가진 작은 시골 영지로, 해안에서 8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작은 섬 두 개도 남작령에 포함되는데, 섬과 섬은 약 15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섬 중 두 개는 무인도였다.
블루문이 하늘에 떠 있는 자정.
두 개의 섬 중 오른쪽 섬 허공 한곳에 갑자기 엄청난 기운이 뭉치면서 공간이 이지러졌다.
투욱.
불안정했던 공간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무인도의 모래사장 한쪽에 떨어졌다.
웅크린 몸은 분명 사람이었다.
온몸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피가 섞인 끈적한 점액질이 묻어 있었다.
꿈틀.
엎어져 있던 사람의 몸이 한 차례 움직임을 보이면서 뒤집혔다.
얼굴과 온몸에 물집이 돋아나 있고 화상을 입은 상처들도 곳곳에 보였다.
“끄으으…….”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심한 상처에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 정체불명의 사람은 바로 스너비 왕국의 하벨 국왕이었다.
레드 드래곤 아나이스가 시전한, 죽음의 의지가 담긴 9클래스 절대용언 마법인 파워 워드 킬 마법에 적중되면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고, 바닷물에 이끌려 이렇게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되었다.
몸속에서 기이한 빛이 내뿜어지면서 심각했던 상처들이 스르륵 사라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모든 상처는 완전히 없어졌고, 기이하게 뿜어지던 빛도 사라졌다.
스으읏.
몸이 3미터 정도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우두둑 하고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피부 속에 바람이 들어간 건지 불룩 솟아오르는 호두알만 한 물집이 무려 수십 개였다.
또한 한동안 기이한 몸의 변화를 보인 그는 키가 커져 2미터 정도의 큰 신장으로 급성장했다.
그런 후 피부 속에서 끈적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불순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훌러덩.
이번에는 뱀이 허물을 벗듯 그는 몸의 허물을 벗었는데, 무려 세 번이나 벗고 나서야 멈추었다.
이것이 무인들이 말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과정이었고, 모든 과정이 끝이 나자 그는 바닥으로 스르르 내려왔다.
번쩍.
순간, 하벨의 눈이 떠지면서 안광이 3미터나 뻗어 나왔다. 하지만 그가 이내 눈꺼풀을 몇 번 껌벅거리자 기이한 빛의 안광은 사라져버렸다.
“크으… 여기가 어디지?”
자정이 한참 지난 새벽,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쏴아아… 철썩!
파도가 백사장에 밀려와 부서지더니 하얀 포말(泡沫)을 일으켰다.
“끄으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난 누구지?”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면서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머리만 아플 뿐,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듀크는 허리에 롱소드 한 자루를 메고는 용병길드 앞에 서 있다가 테이커 남작령에서 나온 자들과 함께 영지로 향했다.
테이커 남작령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17명으로, 영지에서 행정 일을 보던 행정원 한 명과 경무장한 복장의 영지병 10명, 나머지 6명은 짐수레 두 대를 몰고 갈 마부와 짐꾼들이었다.
짐수레 두 대에는 밀가루 포대와 농기구들이 실려 있었다.
이번에 테이커 남작령으로 전쟁용병을 자원한 용병들은 듀크를 포함해 38명으로, B급 용병은 그를 포함해 6명이고, 나머지 32명은 C급 용병들이었다.
도시 시마에서 테이커 남작령까지는 불과 도보로 하루 거리였기에 말을 타지 않고 이렇게 걸어서 가는 것이다.
듀크 옆으로 같은 B급의 용병인 찰스란 자가 다가왔다.
그는 몸집이 헤비급으로 파워가 상당할 것으로 보였다. 다만 한 가지 배가 조금 나와 둔해 보인다는 것이 흠이었다.
얼굴이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라 그는 다른 용병들과 쉽게 잘 어울렸다.
“이름이 듀크라 했지?”
“예, 맞습니다.”
“그렇게 추운날씨도 아닌데 왜 털 코트를 입었나?”
“습관이 되다 보니 이게 가장 편하더라구요.”
“혹시 아이스랜드인인가?”
“그렇게 보입니까?”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척 보기에 그래 보여서 말이야.”
“눈썰미가 있네요. 맞습니다.”
“어쩐지 그렇게 보이더라고… 그런데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전쟁용병으로는 왜 지원했나?”
“경험을 좀 쌓아보려구요.”
“허허… 자네 나이 땐 용병패를 받으면 다들 그러더군. 젊어서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가? 나중에 보자고, 듀크.”
몇 마디 나누던 찰스는 곧 흥미를 잃었는지 저쪽으로 가버렸다.
듀크도 특별하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묵묵히 앞을 향해 걸었다.
얼마 후 날이 저물자 그들은 적당한 곳에서 야영을 했다.
테이커 남작령이 코앞이었지만 급할 것 없다는 생각인지 다들 여유가 있었다.
6명의 마부와 짐꾼들이 짐수레를 한곳에 잘 세워 고삐를 나무에 묶고는 주변으로 흩어져 장작이 될 만한 나무를 구해 왔다.
한쪽에서는 도끼를 내리쳐 적당한 크기의 장작을 만들었고, 다른 쪽은 모닥불을 피워 그 위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부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용병들은 주변에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경계를 섰다.
인근에는 깊은 산도 없는 곳이라 몬스터가 나올 장소도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영지전을 하고 있는 트로백 남작령에서 기습해 올지도 모르기에 기습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따끈하고 구수한 수프를 먼저 먹고, 돼지고기 삶은 것과 각종 채소를 곁들인 식사를 했다.
주방장이 만든 요리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제법 요리 실력이 있는 자였다.
용병들은 식사를 마치고는 모닥불 주위로 흩어져 낮에 안면을 익힌 용병들과 잡담을 나누었고, 듀크는 소화도 시킬 겸 해서 대거 자히르를 검집에서 꺼내 깨끗한 천으로 날을 닦았다.
원래 대거 자히르는 신의 아티팩트이기에 날에 먼지가 묻지 않고 시리도록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정성스럽게 날을 닦았다. 칼을 자신의 몸같이 취급한다는 무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대거를 검집에 넣고, 이번에는 손잡이와 검집을 정성스럽게 닦아 배에 꽂았다.
한편 크리스라는 용병이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며 대거를 탐내고 있었다.
하지만 듀크는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눈과 얼음의 신 발보르의 권능을 흡수해 새로운 능력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시야가 미치는 거리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크크… 감히 이것을 탐내다니, 죽여 버릴까? 아냐, 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어.’
밤이 좀 더 깊어지자 모포를 깔고 그 위에 누워 배를 덮었다.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려고 했기에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크리스라는 용병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듀크에게로 접근했다.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배에 꽂혀 있는 대거 자히르를 잡으려고 했다가 듀크의 말에 멈칫했다.
“무슨 일이지? 나에게 볼일 있나?”
“아, 아니…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럼 가자.”
“응, 그래.”
날이 밝아오자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딱딱한 빵을 수프에 찍어 먹으며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는 다시 출발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그들은 마침내 테이커 남작령에 도착했다.
테이커 남작의 성은 아담한 크기였지만 해자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일단 성안으로 들어가 광장으로 향했는데,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는 용병들이 있었다. 60명이나 되는 그들과 듀크 일행 용병 38명을 합하니 98명이나 되었다.
얼마 후 다른 영지에서 모집한 용병 46명이 광장으로 들어 왔으며, 두 시간 후엔 79명의 용병들이 들어왔다.
성안 광장은 223명의 용병들로 가득 찼다.
행정관이 단상으로 걸어 나오더니 크게 외쳤다.
“40분 정도 있으면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전장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바로 전투에 투입될 수도 있으니 지금 미리 식사를 하십시오. 나중에는 시간이 없을 겁니다. 아참, 참고로 말해드립니다만 전장은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행정관의 말이 끝나자 한쪽에 서 있던 하녀들이 빵과 수프를 용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용병들은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되자 용병들은 2열종대로 줄을 서 성을 출발했다.
행정관의 말대로 그들은 도보로 약 한 시간 만에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도 전투가 있었는지 보병들과 전쟁용병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칼에는 피가 묻어 있거나 방울져 또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장을 살피는 듀크의 눈에 백마를 타고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귀족이 보였는데, 그가 아마도 테이커 남작인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는 갈색 말을 타고 있는 기사가 3명이나 있었으며, 그의 주위에는 기병 80여 명에 영지보병 2백여 명, 전쟁용병 150여 명이 보였다.
‘으음, 영지전이 14일째인 것 치고는 아직 많이 남아 있구나.’
이번에는 전방에 있는 트로백 남작령을 보았다. 그런데 그곳은 테이커 남작 쪽보다 두 배나 많아 보였다.
양 진영은 조금 전 전투를 치렀기에 잠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전쟁용병들이 도착하자 즉시 부관이 다가와 그들을 나누어 편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