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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오크 왕국
그제야 그는 고개를 돌려 마차를 쳐다보았다.
그 마차는 블론 상단주의 딸인 제니퍼와 하녀 릴리가 타고 있던 마차였는데, 하녀 릴리가 그를 부른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아가씨께서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으시는데요?”
“도시 시마(Cyma)까지 갑니다.”
“여기서 하루를 더 가야 나오는 곳이니 마차로 같이 가자고 하시는데요?”
“글쎄요. 전 이대로가 편한데요.”
“숙녀의 정중한 청을 거절하는 것은 남자의 예의가 아니라는데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죠.”
이렇게 해서 그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은 여자 두 명만 타고 가는 마차여서 그런지 깨끗하면서도 실내장식과 벽이 모두 분홍빛이라 화사해 보였으며, 은은한 장미향이 나는 듯 향기로웠다.
그는 아름다운 제니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들었다.
‘엄마도 저렇게 예쁘고 좋은 냄새가 났었어.’
“이것 보세요. 이봐요!”
릴리의 조금 커진 목소리에 그는 놀라 생각에서 깨어났다.
‘허… 무척 당혹스럽게 하는 하녀군.’
“아가씨께서 이름이 어떻게 되시냐고 물으시잖아요.”
“아… 미안합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듀크라고 합니다.”
“미들네임과 성이 없는 걸 보니 평민이세요?”
제니퍼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물었고 듀크는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이스랜드에서 살다가 이번에 제국을 여행하러 왔거든요.”
“아… 어쩐지 입은 옷이 털 코트라서 신분이 궁금했어요.”
“그렇군요. 이름이?”
“미들네임은 아드리온 폰 제니퍼라고 하는데 그냥 제니퍼라고 불러요. 이쪽은 제 하녀인 릴리에요.”
“귀족이시군요. 아무튼 같이 가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가씨의 아버님은 남작님이세요. 블론 상단을 운영하시죠.”
“아… 그렇습니까? 보리스 마을에서 옷을 몇 벌 사다가 짐을 싣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루 만에 마차를 타고 보리스 마을을 출발했다고 하지만 듀크 씨는 말도 없이 빠르게 이곳까지 왔더군요.”
“예, 제가 좀 걸음이 빨라서요.”
“아무리 그래도 말이나 마차보다는…….”
“릴리야 그만 됐어. 심문하는 것처럼 왜 그래?”
“아가씨, 이상하잖아요. 게다가 야영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짐도 하나 없잖아요!”
“마법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다 보니 짐이 없어 보이는 겁니다.”
“아… 그래서 짐이 보이지 않았군요.”
듀크는 품속에서 보석 상자를 하나 꺼냈다. 호기심에 제니퍼와 릴리가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뚜껑을 열자 향기로운 과일 향이 퍼져 나왔다. 노랑, 파랑, 빨강, 녹색 이렇게 네 가지 색의 구슬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달콤한 것이니 한번 드셔보시죠.”
“이게 뭔가요?”
“제가 만든 간식인데, 캔디라는 겁니다.”
“캔디?”
“예, 과일즙을 넣고 만들었기 때문에 향과 맛이 달콤한 게 아주 좋습니다.”
하녀 릴리가 먼저 노란 캔디를 집어서 맛을 보더니 놀라운 듯 눈이 커지면서 말했다.
“아가씨, 정말 달콤하고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그럼 나는 빨간색으로 줘.”
그것은 체리 향이 나는 캔디였다.
“어머, 정말 달콤하고 맛있네요.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다 하셨어요?”
“그건 저만의 노하우이니 비밀입니다만… 몇 개 드릴 테니 심심할 때 드세요.”
처음에는 낯선 사람을 왜 마차에 태우려고 하는지 이해를 못 하고 불쾌하게 생각하던 하녀 릴리였지만, 달콤한 캔디 때문에 점점 듀크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듀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해보니 잘 생긴 얼굴에 키도 컸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추어주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또한 평민이지만 무식하지도 않고 재주가 참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 밖에서 호위를 하는 용병들처럼 지저분해서 지독한 냄새도 나지 않았고 깨끗했기에 더욱 호감이 갔던 것이다. 성격이 까다로운 제니퍼 아가씨가 저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남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릴리였다.
그만큼 듀크는 단순히 호감이 가는 정도가 아니고 매력이 넘쳐흐르는 남자였다.
“오크다! 오크가 나타났다!”
“마차를 보호해. 어서!”
갑자기 용병들의 외침이 들렸고. 블론 상단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마차의 창문을 열어 상황을 살피던 하녀 릴리는 눈이 두 배로 커지면서 놀랐다.
각종 무기를 손에 든 오크 1백 마리가 저쪽에서 블론 상단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오크가 50마리 미만이지만 이번에는 1백 마리가 달려들었다. 용병 50명으로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용병들은 무척 긴장했다.
“취익… 인간들의 상단이다. 공격하라… 취익.”
채채챙, 파팍.
용병들도 제법 싸움에 단련되어 있었지만 그 수가 두 배나 되는 힘이 좋은 오크 전사들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 보니 전투는 점점 용병들이 밀리는 상황으로 흐르고 있었다. 벌써 말에서 떨어져 쓰러진 용병들도 있었다.
“좀 더 힘을 내라.”
“취익… 인간을 모두 죽여라, 취익.”
그나마 말을 타고 있었기에 용병들은 오크들에게 조금씩 밀리긴 했지만 버티고 있었다. 결국 용병들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오크 10여 마리가 쓰러졌지만 용병들은 벌써 절반이 넘는 30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그때 용병들에게 숨은 병기가 나타났다. 용병에게는 복병이 될 것이고 오크들에게는 화가 될 것이었다. 바로 듀크가 마차에서 내려 오크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급품의 바스타드 소드였지만 검날에 검기를 실어서 공격했기에 오크들은 너무나 쉽게 몸이 두 동강이 나면서 쓰러졌다. 오크들이 아무리 칼로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 칼까지도 몸과 함께 두 동강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케에엑, 까울.
털썩.
듀크의 바스타드 소드에 베이면서 비명을 지른 오크들은 우수수 쓰러졌다. 절반이 넘는 약 60마리의 오크들이 쓰러지자 그제야 상황 파악을 했는지 나머지 오크들이 도망을 쳤다.
듀크는 끝까지 오크들을 추격해서 전멸시킬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는 싶지 않았다.
“고맙소.”
“별것 아니었습니다. 빨리 정리를 하고 이동하는 게 좋겠군요.”
“알겠소. 서둘러서 이곳을 정리하고 떠나야 한다. 서둘러!”
용병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리하는 속도가 빨라졌고, 상단의 일꾼들도 거들었다. 듀크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제니퍼와 릴리는 반갑게 듀크를 맞아주었다. 오크들 때문에 자신들이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듀크의 활약 덕분에 그들은 무사할 수 있었고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기에 듀크가 더욱 반가운 제니퍼와 릴리였다. 역시 말문을 먼저 연 것은 하녀 릴리였다.
“듀크 님,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검술을 익히셨어요?”
“언제 그렇게 검술을 익히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릴리가 묻자 그는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제니퍼가 한마디를 하자 듀크는 그제야 대답을 했다.
“오크들이 약해서 별것 아니었습니다.”
“용병들도 어쩌지 못하던 오크들인데 듀크 님이 강한 거죠. 그렇죠, 아가씨?”
“으응, 네 말이 맞아. 정말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기분이 좋은데요.”
제니퍼의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더 사랑스럽게 보이는 듀크였다.
“출발한다. 출발!”
쿠르르르.
신속하게 주변을 정리한 용병들은 마차와 짐수레를 움직여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바람의 계곡에서 태어난 하프오크 켈란(Kellan)은 다른 오크들보다 성장이 느려서 체구가 작았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강력한 오크 전사가 되라고 ‘강력한’이라는 뜻이 들어있는 ‘켈란’으로 이름을 지었다.
오크와 인간의 여성에게서 혼혈로 태어난 하프오크 켈란은 비록 다른 오크들보다 체구가 작았지만 머리는 어머니를 닮아 좋은 편이었다.
바람의 계곡 오크 부족은 450마리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즉, 다른 부족이 1천에서 2천 마리의 오크들이 있는 것에 비해 바람의 계곡 오크 부족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부족이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켈란은 바람의 계곡에 있는 수백 미터 높이의 암벽동굴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그곳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5백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지 않았던 7서클 대마법사의 던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마나를 느끼는 능력을 갖추고 있던 켈란은 그곳에서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고, 10년 만에 6서클 마스터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7서클에 오르기는 쉽지가 않았다. 깨달음이 없이는 7서클에 오를 수 없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수련을 중단해야 했다.
하지만 켈란에게는 7서클 대마법사의 마법수식과 각종 공식이 있었기에 그것들을 머릿속에 외워두는 것으로 일단 만족해야 했다.
부족 단위로 내려왔더니 예전에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오크 전사 250명에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 오크 80마리, 아직 전사의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오크 70마리와 늙은 오크 50마리가 있었다.
“취익… 예전과 나아진 게 없어. 내가 부족장이 되어 부족을 발전시켜야만 해, 취익.”
켈란은 즉시 오크 부족장과의 대결을 요청했다. 몸집이 두 배 반이나 차이가 나는 부족장과 싸운다는 것에 다른 오크들은 켈란을 비웃었다.
부족에서 가장 힘이 세고 전투 경험이 많으며, 몸집 또한 큰 부족장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켈란이 간단하게 마법으로 부족장을 제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