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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 Luck-93화 (9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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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오크 왕국

“말을 타고 달리는 우리보다 먼저 와 있는 게 말이 돼?”

웅성웅성.

쿠르르르.

완만한 경사를 가진 바위 언덕이라 블론 상단은 어렵지 않게 언덕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한편 그는 바위 위에서 끓는 물에 생선뼈와 채소를 썰어서 집어넣고 밀가루 반죽을 한 것을 조금씩 뜯어 넣고 끓였다.

향신료와 소금을 조금 넣고 요리를 만들었는데, 마치 해물 수제비와 비슷한 요리가 만들어졌다.

블론 상단의 용병과 상단의 일꾼들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와 다시 만나게 되니 긴장하면서 동시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의문스러운 점은 말을 타고 이동한 블론 상단보다 말도 없이 걸어온 것 같은 그가 어떻게 먼저 와서 저렇게 요리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기에 그들은 그를 경계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야영준비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단 사람을 여전히 신경을 쓰지 않는 채 그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바위 위라서 그런지 주위 풍경이 좋았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차를 끓여서 마시고 난 후 책을 꺼내 읽다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갔다.

휘이이이.

제법 바람까지 불었지만 명상을 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는 모양이었다.

블론 상단의 사람들은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바위 위에 있는 자를 경계했다. 저렇게 있다가 갑자기 기습을 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블론 상단은 바위 언덕이라서 짐수레와 마차를 둥글게 세우고 나서 안쪽에 말을 잘 묶었다. 그런 다음 바닥에 모포를 깔고 휴식을 취했는데 일부 용병들은 아직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되어도 그는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용병들은 자꾸만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 자세의 변화가 없자 관심이 없어졌는지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어느새 어둠이 물러가고 먼동이 떠오르더니 금세 아침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해가 그에게 비추자 그제야 그는 눈을 뜨고 명상을 멈추었다

“으음, 벌써 날이 밝았구나. 모처럼 오랫동안 명상에 들었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스트레칭으로 굳어 있던 몸을 풀고 다시 자리에 편안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마법주머니 속에서 가죽 물주머니를 꺼내 물을 마시고 육포를 꼭꼭 씹어 먹으며 식사를 끝냈다.

파악.

가죽 물주머니를 마법주머니 속에 다시 집어넣고 옷매무시를 고친 그는 바위를 박차고 양손을 옆으로 펼쳐 글라이더처럼 날아 바위 언덕을 내려갔다.

굳어진 몸을 풀려고 처음 보는 이상한 동작을 할 때부터 용병들은 그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뛰어내리자 용병들은 깜짝 놀랐다.

“어엇, 저자가 뛰어내렸어.”

“높은 곳이라서 위험할 텐데…….”

슈아아아악.

그는 마치 새처럼 날아 먼 곳까지 이동했다. 지면과 가까워져 한 바퀴 공중제비를 하며 땅에 내려설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또다시 땅을 힘차게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용병들은 꿈같은 장면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이니 우리보다 먼저 올 수 있었구나.”

“우와… 마치 새 같아. 아주 멋졌어!”

땅에 내려온 그는 힘차게 발을 놀리면서 달려 나갔다.

파파파팍.

마치 말처럼 빠르게 달렸기 때문에 그의 등 뒤에는 흙먼지가 가득 일어났다. 지켜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지평선을 넘어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벨은 모처럼 한가해서 왕비인 올리비에와 점심을 같이하려고 했지만 시종장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대연회실로 향했다.

대연회실 문 앞까지 갔지만 안에서 들리는 기합소리 때문에 조용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왕비인 올리비에와 엘프 여전사 클라우디아가 편한 검은색 바지와 흰 블라우스를 입고 레이피어로 검술대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날을 세우지 않은 연습용 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채채챙.

경쾌한 쇳소리가 하벨의 귓가를 울렸다.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그는 한 폭의 미인도가 연상되었다.

두 미녀는 워낙 빼어난 미모인 데다 몸매도 늘씬해서 어느 한 군데 흠을 잡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멋진 검술까지 펼치니 그 모습에 하벨이 한없이 빠져든 것이다.

헉헉… 헉.

엘프 여전사 클라우디아는 엘프라서 그런지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올리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었고, 온몸도 땀에 흠뻑 젖었다. 이미 한 시간이 넘게 검술을 펼쳤기에 많이 지친 것이다.

숨소리까지 거칠게 내뱉던 올리비에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헉헉… 너무 힘들어, 오늘은 그만 해요.”

“그러세요. 이젠 검술이 많이 늘어서 기사와 대련해도 크게 밀리지 않겠어요.”

“정말 그 정도예요?”

“그럼요. 내가 왜 거짓을 하겠어요.”

“호호호… 기분이 좋네요.”

“올리비에!”

하벨의 목소리에 올리비에와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올리비에는 환한 얼굴로 물었다.

“아… 국왕폐하, 언제 오셨어요?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길?”

“하하하… 모처럼 시간이 나서 점심이라도 같이하려고 왔지요.”

“정말요? 좋아요.”

“사랑스러운 나의 올리비에! 땀을 많이 흘렸으니 샤워하고 왕성의 타워 전망대로 와요.”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올리비에가 샤워를 하기 위해 대연회실을 나가자 클라우디아가 다가왔다.

“국왕폐하, 오랜만에 뵈어요.”

“왕비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었구려.”

“예, 익혀두면 나쁠 게 없을 것 같아서…….”

“잘했구려. 안 그래도 내가 바빠서 신경을 많이 못 써주었는데 고맙소.”

“아니옵니다. 오늘 모처럼 국왕폐하를 뵈니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하하… 역시 클라우디아구려. 잘 모르겠지만 수련의 진전이 있었던 건 맞소. 그건 그렇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소.”

“저에게 말입니까?”

“그렇소. 풍요의 숲에서 엘프족 50명을 찾았소.”

“아, 그게… 정말이신가요?”

충격적인 소식에 클라우디아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하벨이 빨리 대답해주기를 기다렸다.

이런 클라우디아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크라운 왕국의 지방 영주령 세 곳에 흩어져 있던 어린 엘프와 노인 엘프 22명 그리고 러셀 왕국에 흩어져 있던 엘프 19명, 아비린 왕국에서 9명을 노예상에게 대금을 지급하고 사왔소.”

“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국왕폐하.”

“지금 노예상에서 산 엘프들이 왕국으로 향하고 있으니 늦어도 일주일 안에 모두 들어올 것이오.”

“그날이 기다려지네요.”

“엘프가 50명이나 되니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소.”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소, 클라우디아.”

“문제라니요?”

“수련하는 중에 엘프 여신의 눈물이 내 몸에 흡수되어버렸소.”

“예? 왜 그런 일이…….”

하벨은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오른손에 희미하지만 세계수 잎 문양의 황금색 문신을 클라우디아에게 보여주었다.

“나도 처음에는 얼떨떨해서 마법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소. 정말 미안하게 됐소.”

“…….”

너무 충격적이라 잠시 멍한 상태로 있던던 클라우디아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국왕폐하, 이것도 운명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클라우디아?”

“어차피 우리 풍요의 숲 엘프들이 그것을 오랜 세월 동안 보관하고 있었지만 비밀을 제대로 풀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국왕폐하의 몸에 흡수되었으니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의도한 일은 아니었건만… 정말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구려. 대신 클라우디아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이제까지의 은혜만 해도 충분해요.”

“아니오. 부족의 보물이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내가 이번에 풍요의 숲 부족이 다시 살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겠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왕성의 타워 전망대로 가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를 좀 더 나눕시다.”

“예. 알겠습니다, 국왕폐하.”

장소를 옮긴 하벨은 왕성의 타워 전망대에서 올리비에와 클라우디아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다.

일상적인 얘기에 이어 그들은 대연회장에서 나누었던 얘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풍요의 숲 부족이 전부 왕국으로 들어오면 수도 스너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르마(karma)섬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소.”

“카르마 섬 말씀이입니까?”

“그렇소. 클라우디아도 한번 가본 곳이지 않소.”

“그렇게 큰 섬에서 저희 부족이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냥 살 수 있도록 허락만 한다는 말이 아니오. 카르마 섬 하나를 아예 풍요의 숲 부족에게 줄 터이니 그곳에서 평화롭게 살라는 말이오.”

“정말 그렇게 큰 섬을 저희에게 내려주신다는 말씀이세요?”

“내가 풍요의 숲 부족의 보물을 본의 아니게 가져갔으니 그것에 합당한지는 모르지만 카르마 섬을 주려고 하는 것이오. 또한 나의 허락 없이 인간들이 그곳에는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왕명으로 선포할 것이오. 그리하여 카르마 섬은 풍요의 숲 부족만의 섬이 될 것이오.”

“축하해요, 클라우디아.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잘 참아주었어요. 카르마 섬은 앞으로 풍요의 숲 부족이 살아가기에 아주 큰 섬이니 부족이 번창할 수도 있겠어요.”

“올리비에 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카르마 섬은 야생말과 동물이 약간 살고 있을 뿐, 몬스터는 없어서 저희 부족 엘프들이 살아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상적인 낙원 같은 섬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섬에서 살게 되다니,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호호호… 클라우디아, 국왕폐하께서 하신 말씀이니 믿어도 될 거예요.”

클라우디아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것을 이해한다는 듯 하벨과 올리비에는 향기로운 차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던 그는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 앞에 나타나자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걸었다. 산으로 제법 들어가자 깨끗한 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계곡이 나왔다.

“땀과 먼지가 뒤범벅되었으니 깨끗하게 씻고 가야겠군.”

입고 있던 털 코트와 나머지 옷을 전부 벗고 물에 들어갔다.

아이스랜드처럼 추운 곳에서는 물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일이 없었지만, 이곳은 아이스랜드보다 따뜻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났다.

그는 시원한 물속에서 땀과 흙먼지, 묵은 때를 벗기는 재미에 한참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그를 숨어서 훔쳐보는 무리가 있었다.

칼과 도끼를 비롯해 철퇴까지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산적이 틀림없었다.

“두목님, 주위에는 저놈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잘 찾아봤어?”

“예, 저놈 혼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으음… 어쩔 수 없지. 저놈의 물건이라도 털어야 하니 너희 세 명이 가봐라.”

“예, 저희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상체를 낮추고 있던 세 명의 산적들이 일어나 그에게로 접근했지만 나머지 28명의 산적은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허락 없이 그의 털 코트를 훔쳐 한쪽에 내려놓으려던 한 산적이 코트를 이내 다시 들었다. 털 코트 주머니에 꽂아둔 대거의 끝 부분이 약간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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