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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예지력을 얻다
하벨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왕자님. 미처 신분을 몰라 뵈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비린 왕국의 귀족분이 아닌 것 같군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대한 왕국의 클로버 폰 하벨 백작입니다.”
“아… 역시 귀족이었군요. 셔든, 주변을 정리하라 이르세요.”
“예, 왕자님. 병사들과 적들의 시신까지 모두 한곳으로 모아라. 서둘러라!”
셔든이 기병들에게 명령하자 3왕자인 스왈브리 폰 브린츠가 다시 하벨에게 말했다.
“대한 왕국? 그 왕국은 어디에 있죠, 하벨 경?”
“에슬론 대륙의 서편 대해양을 건너면 콜리니아 대륙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도 최북단으로 올라가면 사시사철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동토의 땅이 나옵니다, 왕자님.”
“아, 콜리니아 대륙에서 건너 오셨군요?”
“예, 왕자님. 최북단에 있는 그곳이 바로 대한 왕국이며 소왕국입니다.”
“그런 먼 곳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처음부터 이곳까지 오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행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저는 콜리니아 대륙을 여행하다가 최남단까지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우연히 상단의 배에 타고 왕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해적들에게 배가 공격받아 배가 침몰하게 되었고 마침 부서진 나무를 붙잡은 저는 파도에 떠 밀려가던 중에 작은 섬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왕자님. 그 섬에서 한 달가량을 연명하다가 그곳으로 식수를 보충하려고 해적들이 들렀고 저는 해적선에 숨어들었는데, 대해양을 한 달 정도 향해 중이던 해적선이 그만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되었으며 깨어나 보니 에슬론 대륙의 어느 해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4개월간을 여행 중인데, 마침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가 왕자님이 위험에 처하게 되어 도와드리게 된 것이죠.”
“아, 두 대륙을 여행하다니 정말 대단한 여행이군요.”
“조금 전 싸울 때 보니 마법도 사용하시는 것 같던데…….”
“예, 마법도 조금 익혔습니다. 그래도 저에게는 이 석궁이 주력 무기입니다, 왕자님.”
“음… 연속으로 발사되는 석궁이라니, 정말 대단한 무기였어요.”
“감사합니다, 왕자님.”
“왕자님, 죽은 적들을 살펴보았지만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병사들과 같이 화장하려 하는데 허락해주십시오, 왕자님.”
“그렇게 하세요, 셔든 경.”
“예. 알겠습니다, 왕자님.”
활활활!
죽은 병사들과 적들의 시신은 거세게 일어난 불길에 연기를 내뿜으면서 잘도 타올랐고 하벨은 기병들이 수거해온 화살을 받아 피를 닦아내고는 다시 석궁에 화살을 장착하고 있었다.
셔든 대장과 브린츠 왕자는 그런 하벨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살펴보고 있었다.
“아, 화살이 석궁에 장착되는군요, 하벨 경.”
“그렇습니다, 왕자님. 이 석궁 속에는 이렇게 보시는 바와 같이 화살을 보관할 수 있는 마법 공간이 있어 아주 유용하며, 언제든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음… 이런 석궁이 있었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왕자님.”
“그래요. 셔든 경, 이런 석궁이 있다는 것은 나도 처음 알았어요.”
3백여 발이나 되는 화살을 모두 석궁에 집어넣은 하벨은 등에 메고 있던 마법 주머니에 석궁을 집어넣었다.
“하벨 경, 그 자루도 마법 주머니인가요?”
“예, 왕자님. 그렇습니다.”
“아… 어쩐지 야영 물건이 없어 보인다고 했더니 그 속에 들어 있겠군요?”
“예, 왕자님. 이 마법 주머니 속에는 야영에 필요한 물품과 식량, 식수가 들어 있어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어요. 어지간한 물건들은 모두 마법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으니 말만 있으면 언제 어디로든 쉽게 이동이 가능하겠어요. 안 그런가, 셔든 경?”
“그렇습니다. 왕자님, 이제 어느 정도 이곳도 정리가 된 것 같으니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향하셔야겠습니다.”
“하벨 경도 같이 마차를 타고 가죠.”
“음… 알겠습니다, 왕자님.”
브린츠 왕자와 하벨, 셔든이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수도 크라운으로 향했고 주변을 기병들이 호위했다.
수도 크라운의 외성문을 통과한 마차는 계속 이동해 왕궁으로 들어왔지만 왕자가 타고 있어서 손쉽게 그곳을 통과했고 왕궁 앞에 멈추었다.
브린츠 왕자와 셔든, 하벨은 마차에서 내려 왕궁의 거대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의 복도는 넓고도 높았는데, 벽면에는 각종 조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으며 무척 호화로웠다.
복도를 한참이나 휘돌아 걸어간 곳에는 황금색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국왕친위대원 20명이 서 있었다.
그들 앞에는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는데 그의 앞에서 멈춘 브린츠 왕자는 말했다.
“하나스론 시종장, 아바마마께서는 안에 계시오?”
“예, 3왕자저하. 안 그래도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어서 드시옵소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브린츠 왕자가 국왕친위대원들을 따라 문이 열려진 곳으로 사라지자 하나스론 시종장은 셔든과 하벨을 복도의 옆에 있는 룸으로 안내했다.
“셔든 님, 일행께서는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나스론 시종장님.”
대기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 시녀가 쿠키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두 잔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벨 님, 왕궁에서만 맛볼 수 있는 최상급 에델스 차이니 드셔보십시오.”
“예, 그러죠.”
후루룩!
“차가 정말 향기롭고 좋군요.”
“그럴 겁니다. 저도 최상급의 에델스 차는 몇 번 마셔보지 못했으니까요.”
두 사람이 차를 다 마셨을 때 하나스론 시종장이 다시 대기실로 들어왔다.
“두 분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뒤돌아서 먼저 앞으로 걸어가는 시종장을 따라 하벨과 셔든이 뒤따라 걸어갔다.
넓은 홀 안에는 왕과 왕비를 비롯해 고위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스왈브리 폰 파에이슨 국왕은 3왕자인 브린츠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는 하벨의 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속으로 깊이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예사 인물이 아니로구나.’
앞장 선 시종장이 국왕과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하벨과 셔든도 따라서 멈추었다.
시종장이 옆으로 물러나자 셔든도 마찬가지로 물러났다.
“국왕폐하이시니, 예를 올리시지요.”
시종장의 말에 하벨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최대한으로 숙여서 예를 표했다.
“콜리니아 대륙의 대한 왕국 클로버 폰 하벨 백작이 국왕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허허허… 어서 오시오, 하벨 경. 내 왕자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들었어요. 정말 고맙소.”
“아니옵니다, 폐하. 위험에 처하신 왕자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허허허… 하벨 경은 역시 왕자에게서 듣던 대로 겸손하구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때, 브린츠 3왕자가 한마디 했다.
“폐하, 하벨 경이 정착을 원한다 하옵니다.”
“오오… 그것이 사실인가, 하벨 경?”
“예, 폐하. 사실 배로 대해양을 건너 콜리니아 대륙으로 간다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에 에슬론 대륙에서 정착을 하려 합니다.”
“그럼, 하벨 경에게는 에슬론 대륙에 친인척이 있소?”
“없습니다, 폐하. 대륙의 어디를 가든지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보니 이곳 아비린 왕국에 정착했으면 하옵니다.”
“허허… 역시 그렇구려. 신료들과 의논해, 하벨 경의 작위가 백작이었고 또한 왕자를 위기에서 구해준 공이 있으니 아비린 왕국에서도 똑같이 그대로 백작으로 인정하며 작위에 걸맞은 영지를 하사하려 하는데 수도 인근에서는 적당한 영지가 없으니 지방 영지라도 괜찮겠소?”
“작위만 인정해주셔도 되는데 영지까지 내려주신다고 하시니 지방 영지라도 상관없습니다, 폐하.”
“허허허… 그렇다면 왕국의 서부 해안에 있는 스너비 영지를 하사하노라.”
“감사하옵니다, 폐하.”
“하벨 백작은 그만 물러가도 좋소.”
“예, 폐하.”
하벨은 시종장의 뒤를 따라 홀을 벗어났다.
이계로 와서 아무 데도 적이 없던 하벨, 박현빈이 드디어 아비린 왕국의 정식 귀족이 된 것이다.
그날 밤, 하벨 백작을 위한 국왕의 연회가 주최되어 왕국의 귀족들이 많이 참석했다.
하벨은 홀 안에 있는 귀족들 수백 명 중에서 고위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백작 급부터 살펴보았다.
그들은 홀에서 조금씩 따로 떨어져 서 있었는데 크게 셋으로 뭉쳐 있었다.
아비린 왕국의 권력은 그 세 파로 나뉘어져 있기에 그런 것이다.
권력은 국왕파와 귀족파, 중도파로 먼저 국왕파를 살펴보면 이렇다.
국왕의 장인인 베다 후작을 주축으로 왕국의 고위 귀족들이 세력의 약 30퍼센트를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귀족파의 수장은 헤스페 공작으로 40퍼센트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도파는 포에니 공작으로 역시 30퍼센트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
하벨은 어쨌든 3왕자를 위기에서 구해주었기에 귀족들이 보기에 표면적으로는 국왕파이다.
그러나 아직은 어느 파에도 귀속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벨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여러 귀족들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수십 명의 고위 귀족들이 힐끔거리면서 하벨을 쳐다보자 하벨은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으음… 가시방석이 따로 없군.’
그때, 하벨은 등 뒤에서 갑자기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뒤돌아보았다.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누구신지?”
“네오르 드 올리비에라 합니다.”
“그, 그렇습니까, 레이디?”
“츄이 자작이 저의 아버지 되십니다, 백작님.”
“그렇군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숙녀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그래요, 백작님. 저와 춤 한번 추시겠어요?”
“예, 그러죠.”
곡에 맞추어 하벨과 올리비에는 양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인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한번 뵈었는데 기억하세요?”
“그렇습니까? 저는 통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러실 거예요. 그럼 킬파브 상단하면 생각이 나세요, 백작님?”
“킬파브 상단이요? 아… 수도 크라운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때 그 귀족 일행 말이군요.”
“그래요, 이제 생각이 나세요?”
“예, 그러고 보니 그 귀족 일행의 마차에서 내리던 아름다운 숙녀의 얼굴이… 맞군요.”
“호호… 그날 밤이 새도록 검술을 연습하시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제가 아직 검술에 미숙하다 보니 지금도 노력 중이거든요.”
하벨과 올리비에가 간간이 웃고 친숙하게 대화를 하면서 춤을 추었다.
주위에 있던 귀족 자제들 눈에서는 질투와 당혹의 불꽃이 튀었다.
사교계에서 올리비에의 미모와 콧대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이라 더욱 놀랍기만 했다.
“백작님, 이번에 폐하로부터 하사 받으신 영지가 서부 해안에 있는 스너비 영지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그건 왜?”
“아, 다름이 아니라 백작님의 영지 옆에 아버님 영지가 있어서요.”
“호오? 그렇습니까? 이런 우연이…….”
“앞으로 백작님께서 다스리게 될 스너비 영지는 왠지 믿음이 가는군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한 가지 일에 열정을 다 바치시는 모습을 보니 미루어 짐작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하하하…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군요.”
“하벨 백작, 무엇이 그리 좋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말에 하벨과 올리비에는 흠칫 놀라면서 뒤돌아섰다.
흰 재킷에 황금실이 잘 장식된 옷을 입은 3왕자 스왈브리 폰 브린츠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 왕자전하.”
“하하하… 하벨 백작,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하벨 백작이 아닙니까?”
“왕자전하, 그래도 저는 아직 왕국에 완전하게 정착이 된 상태가 아니기에 두렵습니다.”
“하하하… 그럴 필요 없어요, 하벨 백작. 올리비에도 오랜만이구나.”
“이번에 큰일을 당하셨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왕자전하.”
“하하하… 그랬지. 하지만 하벨 백작이 도와주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단다.”
“하하하.”
“호호호.”
3왕자와 하벨 백작, 올리비에는 한곳에서 즐거이 대화를 나누었다.
주변의 귀족들은 그 모습을 은근히 지켜보았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질투의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