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적들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
“본부. 제7 여단이다.”
-여기.
“10분 뒤, 모스크바 인근 집결지에 도착 예정이다.”
-칙칙, 알았다. 도착하는 대로 다시 보고하도록.
“Есаул”
러시아 육군 출신인 비고르가 능숙하게 본부와 통신을 주고받고선 내게 보고했다.
“완벽하게 속은 것 같습니다.”
“잘됐군요. 도착하는 대로 곧바로 작전에 돌입합시다.”
“알겠습니다.”
“크렘린으로 가시죠?”
“예, 장관님과 함께 갈 겁니다. 그곳에서 질긴 악연을 끝내려 합니다. 같이 가실 생각입니까?”
작전에 앞서 우리는 셋으로 팀을 나눴다.
크렘린궁으로 가 푸틴과 측근들을 잡는 팀과 방송국 및 주요 시설들을 점령하는 팀, 마지막으로 로스차일드를 공격하는 팀이다.
중요도로 따지자면 크렘린으로 가는 게 맞겠으나.
“아뇨, 그곳은 비고르와 바실이 맡아주세요. 저는 갈 곳이 있습니다.”
백 년의 세월 동안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남의 손에 복수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로스차일드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후.
“무운을 빌겠습니다.”
“비고르도요.”
집결지에 도착한 우리는 사전에 계획한 데로 모스크바 내부로 진입하여 곧바로 헤어졌다.
아직, 핵폭발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는지 별다른 소요는 없었지만.
“잠깐! 거기!”
곳곳에 총을 든 군인들이 의심스러운 이들을 잡고 검문을 진행했다.
-얼굴 보이지 않게 숙여.
아무리 러시아군의 군복을 입었어도 인종이 다르다.
당연히 얼굴이 보이면 금세 들통나는바.
최효석이 무전을 통해 요원들에게 주의를 시켰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워 시내를 가로지른 지 삼십여 분, 첫 번째 갈림길에 도착했다.
“우린 이쪽이다.”
주요 시설물의 장악을 맡은 최효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누가 누굴 걱정해? 걱정하지 마라.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도 살아 돌아올 테니까.”
그가 듬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그를 두고 나는 계속 나아갔고.
콰와앙!
나는 로스차일드의 저택을 마주했다.
***
시원한 폭발로 시작한 습격이다.
뭉그적거릴수록 놈들이 빠져나갈 시간만 제공하는 것일 터.
타타탕. 타탕.
우리는 앞에 있는 저택의 경비병들을 재빠르게 처리하며 나아갔다.
“리우! 왼쪽!”
왼쪽에 있는 저택 측문을 가리켰고 알아들은 리우가 요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뛰어갔다.
‘스읍.’
숨을 들이마시고 그들을 엄호했다.
타아앙!
들고 있는 소총에서 총성과 함께 메케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켁.
적 한 놈의 목이 꿰뚫리며 그대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적들 역시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도 잠시.
타타.타타탕.
놈들이 우리를 향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푹. 푹.
발치에 총탄이 땅에 박히기 시작했다.
“피해!”
적들이 저택 어디선가에서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이대로 서서 놈들을 맞서기엔 굉장히 위험하기에 엄폐물을 찾아 숨어들었다.
텅. 텅.
숨은 나무 동이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물에 가까운 요원들의 발이 묶였다.
하지만, 이 정도쯤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지금.”
나는 무전기를 통해 간단한 신호를 보냈고.
슈웅. 슈웅.
콰르릉! 꽈왕!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이 RPG를 통한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다 죽여!”
어느샌가 저택 내부로 잠입한 리우가 전투에 돌입했다.
당연히 밖을 견제하는 총탄 세례가 줄어든바.
“달려!”
저택을 향해 최대한 전속력으로 뛰었다.
물론, 희생이 없지는 않았다.
“컥!”
“끄윽.”
팔다리가 꿰뚫리는 요원들이 발생했고.
털썩.
머리와 가슴에 총알을 맞고 즉사하는 요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덜 다친다.!”
그딴 게 두려웠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우리는 목숨을 도외시하고 계속해서 달렸다.
마침내.
콰앙!
요원 하나가 던진 수류탄이 저택의 정문을 깨부쉈다.
동시에 돌입한 저택.
타탕. 탕.
“컥.”
“끄륵.”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요원들의 몸을 꿰뚫었다.
으득.
그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타타타탁.
바닥에 스치듯이 달려가.
콰직. 탕. 타탕. 꽉.
나이프와 권총으로 우리에게 총탄을 퍼부은 놈들을 해치웠다.
푸욱.
“끄르륵….”
목에 칼이 꿰뚫린 놈이 눈에 힘을 잃으며 쓰러졌다.
“클리어!”
선발대로 진입한 리우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꽈앙! 쾅!
우리 쪽에서 쏜 RPG가 저택을 다시 두들겼다.
“휴우.”
잠시 숨을 고르며 그 소리를 감상하다.
“리우, 저택을 포위해. 단 한 명도 빠져나가게 둬선 안 돼.”
“라져.”
폭격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요원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폐허가 된 2층.
그리고 그 폐허 속에 적들의 시체가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죽은 것은 아닐 터.
“수색해.”
나는 요원들에게 수색을 지시했다.
역시나 남아 있는 적이 있었는지 총성과 비명이 저택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렇게 층을 올라 마침내 마지막 장소인 서재로 보이는 곳의 문이 보였다.
두근두근.
얼마나 이 순간을 기대했는지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게 느껴졌다.
끼이익.
그렇게 기대감을 가지고 문을 열자.
“…역시 자네였군.”
프랭크 로스차일드가 나를 맞아주었다.
“혼자야?”
“나뿐이네.”
질리언과 에드먼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지?’
도망쳤나? 어떻게?
리우가 이미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데?
그런 의문을 가지고 프랭크를 바라봤다.
죽음의 위기를 느꼈는지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게 보였다.
“질리언과 할 얘기가 있는데 어디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을 거 같고.”
“…나로 끝내줬으면 좋겠군.”
“그럴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꼭 그렇게 끝을 봐야만 하나? 우리는 돈을 두고 경쟁을 한 거다. 서로의 목숨을 걸지는 않았어.”
“푸홧.”
갑자기 튀어나온 개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옥에 가면 당신 손에 죽은 이들이 똑같이 말해줄 거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프랭크가 침음성을 흘리며 애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겠네. 그러니 제발 가문의 명맥만은 끊지 말아 주게.”
암중에서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로스차일드다.
그중 가주로서 재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게 프랭크였고.
그런 그의 평생, 이렇게나 굴욕적으로 애원해본 적이나 있었을까?
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되지도 않는 연기로 시간을 끌 생각이면 소용없어.”
어차피, 그의 애원은 연기에 불과했으니까.
“당신을 인질로 잡고 협박한다 해도 질리언이 돌아올 리도 없을 테지.”
“…그렇다.”
“그럼 그냥 죽어라.”
타아앙!
머리통을 꿰뚫었다.
그의 명성을 생각했을 때 참으로 허무한 죽음.
“수색하세요.”
“네.”
나는 그런 프랭크의 시체를 두고 요원들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잠시 후.
“이쪽에 통로가 있습니다!”
요원의 외침에 뛰어가니 1층 한구석에 있는 창고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땅굴을 발견했다.
“젠장.”
철저하게 도망칠 구석을 만든 놈들.
마음먹고 쫓는다면 잡을 수 있겠지만.
‘시간이 없어.’
한창 전투 중일 비고르를 도와야 했기에 쫓을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 기회를 그냥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리우, 부탁해도 될까?”
“얼마든지.”
리우에게 추격을 부탁하고 요원들을 향해 외쳤다.
“크렘린으로 간다!”
그들이 굳은 눈빛으로 대신 답했다.
***
한편, 크렘린의 공략을 맡은 비고르는 죽을 맛이었다.
당연히 각오하고 있었다.
명색이 러시아의 차르가 기거하는 곳이니 절대 쉽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끄악!”
바실이 저렇게나 날뛸 줄 몰랐다.
정확히는, 몸을 아끼지 않고 적들을 상대해나갔다.
만약, 비고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의 뒤를 지켰다면 이미 죽어도 몇 번을 죽었을 정도로 말이다.
“바실! 너무 빠릅니다!”
함께 온 GRU 대원 중 절반 이상이 바닥에 쓰러진 터.
비고르가 바실에게 속도를 조절하자는 의견을 냈다.
“지금 해야 한다. 시간을 더 주면 푸틴이 도망갈 수도 있어!”
“그렇지만!”
“목숨을 아낄 때가 아니다. 빨리 따라와!”
바실이 그런 비고르의 의견을 무시하고 달려나갔다.
이미 죽음이 확정된 바실.
그가 무모한 돌파로 크렘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젠장!”
비고르가 욕을 내뱉으며 대원들을 이끌고 그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크렘린궁의 정문만을 남겨 놓았을 때.
두두두두.
멀리서 헬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런….”
누가 봐도 푸틴을 구출하기 위한 헬기의 등장에 바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대원들이 헬기를 향해 총을 난사했지만.
팅.팅.탕.
명색이 대통령이 탈 헬기라서 그런지 튼튼하기 그지없어 총알을 튕겨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던 바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이 없었다. 푸틴이 헬기를 타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
문제는.
“차라리 몸을 피하시는 게 옳습니다.”
현실적으로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다.
“비고르 네가 대원들을 데리고 후퇴해라. 나는 그를 쫓겠다.”
“바실!”
“나는 어차피 죽어. 그러니 마지막까지 해봐야 하지 않겠나?”
“안됩니다!”
비고르가 죽음을 각오한 바실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고르!”
“바실!”
그렇게 두 사람이 드잡이하던 중 헬기는 거의 다가왔다.
작전 실패를 예감했는지, 그 모습을 본 바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젠장.”
하지만, 그런 와중에 기적은 일어났다.
콰와앙!
어디선가 날아온 투사체가 헬기를 폭파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치칙, 바실, 비고르, 무사합니까?
그리고 들려오는 엘의 목소리.
바실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물론이지.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게. 푸틴을 잡아 오지.”
***
잠시 후.
크렘린궁에 입성한 나는.
“오랜만입니다. 각하.”
바실에게 붙잡힌 푸틴을 만날 수 있었다.
“너였군.”
“정확히는 바실이었죠.”
피식.
푸틴이 명백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네가 아니었다면 바실은 움직이지도 못했을 거다.”
“그는 강행했을 겁니다. 대신 실패했을지도 모르지만요.”
대화를 듣고 있던 바실이 푸틴에게 말했다.
“앞으로 몇 개월 살지 못합니다. 각하.”
그의 말에 푸틴이 웃으며 답했다.
“목숨을 내놓은 자들과 싸웠으니 질 수밖에. 패배를 인정한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날 죽일 셈인가?”
“그럴 리가요. 각하께서 돌아가신다면 군부가 미쳐 돌아갈 텐데 그런 악수를 둘 이유는 없습니다.”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진 바실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러시아군을 멈춰주십시오.”
“그거만 해주면 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국민의 심판을 받아주십시오. 각하의 욕망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그 심판이 내게 유리하다면?”
“제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지요.”
“얼마 살지도 못하는 목숨 받아서 뭐할까. 그냥 추방으로 하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푸틴은 끝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국민의 심판이란 말에 저토록 당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최효석 팀이 방송국을 점령.
푸틴과 그 측근들의 비리 자료와 러시아의 현 상황을 공개하자.
푸틴을 죽여라!
전쟁을 멈춰라.
크렘린궁으로 시민들이 몰려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던 푸틴이 고개를 떨군 건 당연했다.
“질곡의 시간을 벼락같이 멈춘다.”
바실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