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예, 그렇게 처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도쿄 앞바다에서 침몰한 유조선의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신종민이 연락을 취해 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중에 이상한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본사에는 언제 방문하십니까?
“내일이요. 오늘은 제니 눈치가 보여서 나가기가 좀….”
이제는 같은 유부남이 되어 버린 신종민이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이 답했다.
-하긴, 3개월이나 나가 계셨으니….
그렇게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가니 이강진 회장이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재밌는 거라도 있습니까?”
“다를 게 있겠나. 항상 하는 얘기만 나오지. 나라가 힘들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래도 매일같이 읽지 않으십니까.”
“나야 옛날 사람이니 이거라도 읽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거든. 그리고.”
그가 재미있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자네가 벌이는 일이 워낙 쫄깃해야지. 내 돈 걸린 게 아닌데도 심장이 벌렁벌렁해.”
그렇게 잠시간의 담소를 나누던 차, 첸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호텔에 가겠다는 걸 이강진 회장이 찾아온 객을 그냥 보내는 법은 없다며 억지로 집에 들여서 그런지 살짝 불편한 모습이었다.
“오, 첸 회장. 일어났는가?”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어르신.”
처음 봤음에도 이강진 회장은 첸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니까 처음 본 외부인을 집에 들이기도 했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사위의 부하 중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신 부회장의 능력도 대단합니다.”
“그야 당연하지. 수십만 명을 이끄는 이가 평범할 리가 있나? 당연히 비범할 수밖에. 하지만, 첸 회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네.”
“어째섭니까?”
“수십만을 이끌 만한 사람은 세상을 뒤져 보면 두 손가락이 넘게 찾을 수 있지만, 첸 회장처럼 수조 달러를 실수 없이 움직일 만한 사람은 한 손가락만큼도 없거든.”
누가 더 능력 있냐의 관점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냐의 관점.
그런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그의 생각이 맞다.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는 세계 곳곳에 존재하지만, 첸과 같이 수조 달러를 움직이는 사람은 전 우리와 로스차일드 딱 두 곳에서만 볼 수 있으니까.
중요한 인물인 첸이 내려오자 때마침 주방에서 앞치마를 입은 제니가 나왔다.
“다들 식사하세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가진 티 타임.
테이블 가운데 차를 두고 우리 셋은 일 얘기를 시작했다.
“장인어른이 나서 주셨으면 합니다.”
“나 같은 뒷방 늙은이가 나선다고 자네에게 도움이 될까?”
“아직 재계의 영향력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장인어른께서 나서 주시면 다른 그룹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내가 그에게 부탁하는 건 일종의 내부 단속이다.
로스차일드가 국내 그룹들의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모으고 있는 이때.
놈들은 분명 그룹의 수뇌부들과 접촉할 거고.
‘배신을 종용하겠지.’
분명 넘어갈 그룹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도 전방위적으로.
그렇기에 나는 이강진 회장에게 내부 단속을 부탁했다.
그가 가진 영향력이면 그 시간을 최대한 늦출 수 있기에.
“흐음…. 고민해 보겠네.”
말은 저렇게 해도 몸이 들썩이는 걸 보니 백 프로 나설 것 같았다.
“신 부회장과 김지훈 회장이 도울 겁니다. 너무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급한 건 해결했고.
“첸은 가족들과 인베스트먼트의 모두를 한국으로 부르세요. 이곳에서 로스차일드를 상대할 겁니다.”
***
다음 날이 돼서 나와 첸은 SC 오션의 사옥으로 출근했다.
도착하자마자 첸은 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이 일할 장소를 마련하기 시작했고.
“어서 오십시오.”
나는 곧장 신종민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들어온 걸 확인한 그가 자연스럽게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인베스트먼트가 돌아온다고요?”
“아무래도 지금의 미국은 위험하니까요.”
이번 뉴욕행에서 난 요원들 다섯이 죽는 참담한 일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인베스트먼트와 첸의 이동을 결심하게 했고.
“그나저나, 유조선 건은 잘 처리되었습니까?”
“아, 예. 이번에 새로 임명된 모리타 총리가 능글맞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뒷말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합의했습니다.”
“잘됐군요.”
후룩.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물었다.
“범인은 밝혀졌습니까?”
“아직입니다. 선원 전부와 일가친척 계좌까지 전부 살펴봤는데 딱히 걸리는 건 없었습니다.”
“국내 계좌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소용없을 겁니다. 제가 로팅실드의 직원을 매수했어도 현금이나 해외 차명 계좌를 이용했지 한국 계좌를 이용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거 사옥에만 박혀 있다 보니까 머리가 굳은 느낌입니다.”
신종민이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회장님께서 힌트를 주셨으니 방법을 달리해서 조사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예?”
“이미 정보의 스폐셜리스트가 조사하고 있거든요.”
“정보의 스폐셜 리스트?”
신종민이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 날.
소공동 루덴호텔, 1층 로비에서 나는 제리와 접선했다.
커피를 시켜 놓고 기다리던 그가 내 앞에 서류철을 내밀었다.
“총 두 명입니다. 하나는 부선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비팀이었습니다.”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다.
정비팀이 유조선 내부에서 대미지를 주고 부선장이 더욱 악화시키는.
“처리도 가능할까?”
내 질문에 제리가 고개를 저었다.
“가능은 하지만, 웬만하면 안 믿으시는 게 좋습니다. 따라온 요원들 대부분이 무력이 부족한 이들뿐이거든요.”
당연한 얘기지만.
제리는 자신의 부하 전부를 데리고 이적하지 못했다.
CIA의 남아 있겠다고 뜻을 밝힌 이들이 꽤 많았기 때문인데.
그들 대부분이 목숨이 노려지는 것을 알면서도 남아 있을 만큼 무력적인 부분에 자신이 있는 이들이었다.
반면, 그만큼 넘어온 이들의 무력은 아쉬웠고.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제리가 내 눈치를 봤다. 자신들의 값어치가 하락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냥 물어본 것뿐이니까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아, 네.”
무력이야 충분하다.
특히, 총기류 반입이 힘든 한국에서의 데저트는 열 배의 숫자도 감당할 수 있다.
특히.
‘리우가 있으니까.’
제리가 내민 서류철을 집으며 물었다.
“러시아 쪽은 진전 없나?”
“아직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푸틴이 관여된 만큼 자세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돌려 말했지만, 난이도가 있으니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빠르게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바실과 비고르의 행방을 찾는 작업이었다.
제리가 어려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야 러시아란 변수를 컨트롤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제리와의 접선 이후, 우리는 로스차일드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집중했다.
일본에서의 일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정계와 SC 뱅크의 검은 커넥션에 관한 일은 일본 현지에서 고용한 임원 하나가 뒤집어썼다.
워낙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검찰에 출두했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그와 별개로 와카야마에 대한 보복은 확실히 했다.
물론, 첸과 약속한 대로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책임은 일본 국민들이 지게 되었다.
먼저 SC와 함께 진출한 그룹들이 극단적으로 신규 채용을 줄였다.
심지어, 내 뜻을 잘못 알아들은 몇몇은 아예 일본인 직원들의 절반을 해고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덕분에 당장 일본인들의 삶은 팍팍해져만 갔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 났고 경기는 극단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언론사를 통해 소문을 흘렸다.
와카야마가 제기한 검은 의혹 때문에 당신들의 삶이 어려워진 거라고.
그가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결국, 와카야마는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돌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한 이들에게 정의는 유치한 감정일 뿐이니까.
그와 동시에 나는 리우를 시켜 로스차일드의 사주를 받아 유조선을 침몰시킨 두 놈을 잡아들였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심문.
로스차일드와 연관된 증거를 잡기 위함이었는데.
“아무것도 없어. 일을 의뢰한 놈의 이름도 몰라.”
당연하게도 증거 따윈 찾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당장 눈앞에 있는 돈에 회까닥 돌았는데 증거를 남겨 놓을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처리해.”
그렇다고 있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리우에게 이들의 처리를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이강진 회장은 그룹 회장들을 불러 엄포를 놓았다.
SC와 상현, GL이 로팅실드와 대립하는 것을 알렸고.
그들의 손을 잡는 그룹이 나올 경우 온 힘을 다해 무너뜨리겠다는 엄포였다.
당연히, 공격적인 발언에 재벌가들은 반발했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엄포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디에 투자를 받든 간에 우리가 참견할 건덕지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돈이 깡패라고 그들은 쉽사리 로팅실드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눈치를 보고 움직이겠다는 뜻이었다.
우리 역시 하나만 걸려 봐라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테슬라, 송양 자동차 그룹에 기술 투자.]
[로팅실드 그룹, 송양 자동차 그룹과 투자 협약, 전기차 생산에 3년간 300억 달러.]
가장 먼저 송양 자동차가 배신의 문고리를 열었다.
사실, 배신이라고 할 것도 없다.
SC 뱅크와 마켓이 성공적으로 일본에 진출했을 때.
10대 그룹에서 송양만을 빼고 일을 진행했으니까.
덕분에 재계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송양이 어떻게 되는지가 초유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이건 우리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참견하기엔 명분이 없었고.
가만히 두기엔 다른 그룹들의 본보기를 세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금부터 조이시죠.”
덕분에 신종민과 나는 사옥에서 열띤 토론을 나눴다.
“그래 봤자 로팅실드 뱅크에서 자금을 조달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일단 자금을 조인 후에 적대적 인수 합병으로….”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차.
“다들 바쁘시구먼.”
이강진 회장이 난입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오랜만일세.”
신종민이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마친 이강진 회장이 나를 돌아봤다.
“사위는 어떻게 생각하나?”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명색이 이강진이가 나섰는데도 이런 개무시를 하다니, 가만히 둘 순 없지.”
“그래서, 논의 중이었습니다. 일단 자금을 조이고 순환 출자 고리를 끊어….”
내 의견을 듣는 이강진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따위 소인배를 상대하는 데 뭣 하러 큰돈을 쓰나.”
“어떤 고견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려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남의 손을 빌려 오면 될 일이지. 이번 일은 내게 맡겨 두게나.”
영문 모를 이강진 회장의 말.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일주일이 지나자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송양 자동차 그룹, 6천억 대 탈세 혐의.]
[급발진 의혹, 송양 자동차의 8개 모델. 사실로 밝혀져. 익명의 제보자가 내부 자료 제공.]
[시사 폭로! 급발진에 대한 자동차 제조사의 대처.]
탈세에 급발진까지 역어 세트로 조지는 이강진 회장.
게다가.
[장호철 회장, 뇌물 수수 혐의! 이호창 전 대통령에게 거액 건네.]
전 정권에서 있었던 일까지 나왔다.
“언제 이런 자료를 모았는지….”
나와 첸은 이례적으로 수갑을 차고 검찰청에 끌려가는 장호철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이지석 대통령, 임기내에 순환출차 고리 끊겠다! 가장 먼저 대상에 오른건 순양자동차?]
살아있는 정권의 으름장에 그룹들은 몸을 사렸다.
그렇게 국내 문제까지 모두 해결했으니 이제 남은 건.
“당했으니 반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갚아 주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