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상황은 계속해서 어려워졌다.
이제 EU의 회원국들은 영국을 이번 학살의 배후로 완전히 단정 지었다.
올해 당선된 보리스 총리가 연일 부정했으나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언론은 계속해서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고.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는 이탈리아 정부는 조작된 증거들을 가지고 기자 회견을 열었다.
“여기 이 사진들을 보십시오. 영국의 사주를 받은 용병들이 학살을 벌인 현장입니다.”
기자들이 탄성을 지르며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서는 수많은 성인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의 시체까지도 보였다.
“…참혹하군요.”
“맞습니다. 이 참혹한 현장이 영국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국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처럼 아프리카 전체를 식민지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사전 조치로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무력으로 핍박한 것입니다.”
기자 회견장에 있던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만 터져 나왔다.
우리는 분명 백인들로 이루어진 PMC들과 전투를 벌였는데 화면에는 흑인의 시체만 보였으니 말이다.
조작된 증거다.
‘시체들을 가져왔겠지.’
진짜 학살을 저질러서.
그리고.
이런 불길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학살을 저지른 PMC는 리비아의 데저트라는 단체입니다. 그리고 데저트의 사장인 최효석은 한국에서 SC 그룹의 회장 이신후의 개인 경호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유럽의 언론들은 최효석과 내 얼굴을 화면에 띄웠다.
마치 범죄자를 지정하는 듯한 놈들의 태도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웬만한 정보 단체 뺨치는 정보력을 가진 언론사의 사주들이다.
SC와 월가 최대의 금융 그룹인 SCBA의 관계를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이건 누군가가 언론사들의 목줄을 꽉 붙잡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난리 났겠는데?”
최효석이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SC 오션은 한국 산업 전반을 지배하다시피한 대기업이다. 게다가 대만 TSMC의 실소유주이기도 하고.
당연히 SC란 브랜드는 한국 국민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회장인 내가 학살과 관련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왔으니 조용히 지나갈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종민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여의도에서 SC에 관해 청문회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청문회라….
여론이 여론이니만큼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만.
“이건 너무 배은망덕한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여의도 국회의원 중 절반은 우리 쪽 도움을 받았다.
여론이 안 좋아지자마자 신종민을 불러 청문회를 한다니.
아무리 철새같이 행동하는 국회의원들이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지석 대통령은요?”
-지금 상황에선 제가 따로 연락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어 이현준 고문에게 부탁했습니다.
이지석은 내 진정한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외부인이다.
아들인 이현준이 연락을 한다면 그가 배신할 리가 없다.
괜히 배신했다가 하나뿐인 아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흔적도 없이 실종되는 걸 보기는 싫을 테니까.
“일단, 그렇게 진행하는 것으로 하죠. 일전에 말씀드린 원유 매입은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3일 동안 준비한 자금의 17%를 소모했을 만큼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속도를 조금 더 올리세요. 자칫하면 SC가 테러 단체로 지정될 수 있습니다.”
-…테러 단체 말입니까? 설마?
“최악을 가정하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고요.”
-아, 알겠습니다.
휴우….
지랄도 풍년이다.
이렇게 핀치에 몰린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밖에 나가 담배를 꼬나무니 최효석이 따라 나왔다.
“나도 하나 줘라.”
그에게 라이터와 담뱃갑을 통째로 건넸다.
“뭐야?”
“끊으려고요.”
“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게 덧없게 느껴져서?”
“지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다.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
총을 쏘거나 칼로 쑤셔서 죽인 게 아니다.
내가 힘을 얻기 위해 자행한 많은 것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당장 일본을 손에 넣기 위해 내가 한 짓으로 일본의 자살률이 2,000%가 넘게 상승했다.
두 번에 걸친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을 내전의 구렁텅이로 몰아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왠지 내 인생에서 뭐 하나라도 빼야 할 것 같았다.
그중 가장 만만한 게 담배였고.
‘자기만족이지만.’
그렇게 마지막 담배를 최효석과 즐겼다.
“D-DAY는?”
“첸이 연락을 주면요.”
“흐흐, 네가 고려 가드에 찾아와서 함께하자고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세상을 불태울지 몰랐는데.”
최효석이 10년이 훌쩍 지난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게요. 어느새 이렇게 돼 버렸네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번 일, 너무 자책하지 마라. 데저트 요원들은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 않아.”
“알고 있어요.”
“그래.”
그가 나를 위로하더니 담배를 튕겨 불을 껐다.
“들어간다. 내일 보자.”
들어가는 그를 두고 석양을 바라봤다.
그날따라 붉은빛 노을이 마치 핏빛처럼 보였다.
***
“푸흐흐.”
질리언이 서재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것도 그 혼자만이 있는 것도 아닌 가문의 가신들이 대부분이 있는 자리에서.
평소라면 남에게 절대 보이지 않았을 경박한 모습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드디어 엘을 파멸시킬 수 있겠군요.”
엘의 파멸이 결정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타난 이후 가문은 계속해서 패배했다.
가장 먼저 서브프라임 사태로 가장 큰 가업이었던 골드만삭스의 절반이 사라졌다.
테라노스 때는 어땠는가?
2,000억 달러에 가까운 손실을 보았다.
당시 증거를 찾지 못해 죄를 묻지 못했지만, 엘이 모든 걸 계획했다는 심증은 충분했다.
그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졌다.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와중에 엘의 조종을 받는 트럼프는 절대 지원이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잠깐이지만, 가문이 결딴나는 줄 알았을 정도로 자금이 말랐다.
만약, 프랭크가 숨겨진 자금을 공개하지 않았더라면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이것 때문에 질리언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하마터면 가주의 직위를 잃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치욕을 잊을 수 있게 됐다.
“맞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에서 엘을 비롯한 SC 전체를 테러 단체로 규정할 거니 이제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것입니다.”
질리언 자신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으니까.
“엘이 그 정도로 포기할까요?”
질리언의 물음에 소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엘이 겨우 이 정도로 항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닙니다. 해서 몇 가지를 더하려 합니다.”
조지 소로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 쪽 의원들을 움직여 한국을 테러 배후국으로 몰아갈 겁니다. 한국 정부가 SC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요.”
“오호.”
“두 번째가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기대되는군요.”
“어젯밤, 일본 총리와 협의를 마쳤습니다. 일본에 있는 SC의 모든 자산을 동결하여 회수할 겁니다.”
“국제법상 불가능할 텐데요?”
“그들은 지금 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질리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본의 경제 주도권은 SC로 넘어간 지 오래.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국제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소로스가 구미가 당길 만한 의견을 냈다.
“도와준다면 일본 SC가 가진 자산 절반을 우리에게 양도한다고 했습니다.”
소로스의 말에 질리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책이었다.
6,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가진 SC 뱅크와 산하 기업들의 절반을 넘겨받는다니.
여태까지의 손해를 모두 메우고도 남았다.
“역시 조지답네요. 그렇게 진행하시죠.”
로스차일드가 저택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
같은 시각, SCBA의 회장실에서 첸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타타타탁. 타탁. 딸깍.
자금 이동이 끝나자마자 원유를 집중적으로 매입하기 위한 준비였다.
그렇게 준비를 모두 마친 첸이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SC 인베스트먼트의 자금 1조 2천억 달러로 현물을 매입하고.
SCBA의 7천억 달러는 선물을 매입.
SC 뱅크의 자금 3천억 달러는 파생 상품에 투자한다.
총 2조 2천억 달러의 자금이 움직이는 사상 초유의 투자.
생각대로만 된다면 원유 가격은 하늘 높이 치솟을 예정이었다.
‘40, 50%?’
적당한 숫자를 생각하던 첸이 고개를 저었다.
‘200%가 넘게 오를 수도 있다.’
그는 과연 이게 맞는 것일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이익은 없지만, 손해 역시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원윳값을 급상승시키는 건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세계 경제가 모조리 후퇴할 수도 있는 문제다.
많은 사람이 재산을 잃고 직장을 잃을 수 있으며 기업의 연쇄 부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국가 부도 역시도 생각해야 한다.’
원유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는 최고의 호경기를 맞이할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국가는 혹독한 겨울을 보낼 가능성이 크고.
‘으음….’
처음이었다.
엘과 함께한 걸 후회하는 마음이 든 건.
전 세계 수억 명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한다는 부담감이 첸의 전신을 짓눌렀다.
‘아니야.’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첸이 또다시 계획을 점검했다.
그렇게 뉴욕의 밤이 지나갔다.
***
-자금 이동이 완료됐습니다. 바로 시작합니까?
“물론입니다.”
기다리던 소식.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일을 시작하기 앞서서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자금 중 일부를 제가 독자적으로 운용하고 싶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첸의 요구.
“이유는요?”
-더 많은 수익을 위해섭니다. 우리의 계획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오백억 달러 정도면 됩니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나는 첸을 믿는다.
그의 실력, 인품, 나를 절대 배신할 리 없다는 것까지도.
그렇기에 그의 요구를 작게나마 들어주었다.
첸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최효석을 호출했다.
“작전 시간을 잡아 주세요. 신 부회장에게 연락해서 요원들 탈출 경로도 자세하게 짜 보시고요.”
“그래.”
그가 나가고 홀로 남은 나는 의자에 몸을 뉘었다.
“휴우.”
최근 들어 종종 머리가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이런 중요한 선택을 하는 날이면 더더욱.
“이번에 자살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모든 걸 건 싸움을 앞둬서 그런지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지면 모든 걸 잃는다.
가지고 있는 자금은 동결될 것이고.
나와 SC의 모든 인물을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다시는 사회에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제니의 신변도 위험할 수도 있다.
그만큼 적들은 자비 없이 우리를 물어뜯을 테니까.
그렇게 며칠 뒤.
마침내, 결전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