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병원에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이강진 회장이 일어날 때까지 제니와 함께 있으려 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자신의 개인 사정 때문에 회사 일에 지장을 줄 수 없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털썩.
‘피곤하네.’
온종일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강진 회장이 쓰러지고 나서 제니의 심경 변화가 신경 쓰였다.
그렇게 침대에 쓰러져 쥐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랜만에 SC 사옥으로 향했다.
이제는 경비 팀장이 된 보안 요원이 나를 반겼고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이 내게 인사를 했다.
그들을 지나쳐 신종민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신 부회장, 지금 있어요?”
“방금 나가셨습니다.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의 비서가 전화기를 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안에서 기다릴 테니까 연락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언제 봐도 딱 부러지는 여성이다.
SC 초창기부터 신종민의 곁을 십 년 이상 지킨 베테랑 중의 베테랑.
생각해 보니 십 년 동안 수백 번을 봤는데도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런 게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이나 직원들의 얼굴, 그들의 삶 같은 것들 말이다.
예전이라면 쓸데없다고 생각해서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좀 누워 있어야겠다.’
그렇게 소파에 누워 기다리자 신종민이 들어왔다.
“미리 기별이라도 주시지요. 그럼 기다렸을 텐데요.”
“일하는 사람 방해할 필요 있습니까. 그냥 소파에 누워 편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신종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제가 아는 회장님은 절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소파에 누워 계시는 모습을 보니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다르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치열하게 싸워 와서인지 항상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고 싶어도 놓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날카롭게 바라봤다.
아무리 약한 상대라도 적들은 철저하게 파멸시켰다.
협상이란 단어만큼 내 인생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언제였을까? 그런 날카로움이 사라진 게.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렸다.
일 년 전, 그러니까 일본에서 철수하려던 질리언과 협상을 했을 때, 위화감이 들었던 것도 같다.
과거였다면 과연 그와 협상을 했을까?
그럴 리가.
아무리 어려운 길로 돌아간다고 해도 절대 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좋아했겠지.
내가 먹은 엿보다 상대가 먹은 엿이 더 크다고.
‘긴장감이 풀어졌나 보군.’
그렇게 살짝 심각해지던 차.
“좋아 보입니다.”
신종민이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했다.
“네?”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그동안 회장님을 볼 때마다 위태롭게 보였습니다. 마치,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처럼요.”
“…그래요?”
“네, 사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진심이 섞여서인지 신종민의 말이 깊게 박혔다.
피식.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이번 생에는 성공한 거 같네요.”
신종민이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모르십니까?”
“네? 뭘요?”
“회장님은 생각보다 많은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내가 뭘 했다고.
“공식 석상에 자리를 비추지 않아 대중들이 못 알아볼 뿐이지 SC의 이신후 하면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통합니다.”
“어떤 미친놈들이….”
“그야 한국을 잘 살게 해 줬으니까요. 경제만 살려도 역대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는데, 일개 기업가가 한국 전체의 GDP를 반 배나 끌어 올렸으니 말 다 한 거죠.”
“그거야 내가 일본을 손에 넣기 위해서 한국 기업들을 이용했을 뿐인데요?”
“과정과 이유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일본의 돈을 빼앗아 한국을 살린, 영웅으로 보일 겁니다.”
“하. 하.”
이렇게 들으니 무슨 애국 투사처럼 보이긴 하네.
“어쨌든, 앞으로도 좀 느슨하게 살아 주셨으면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고요.”
더 말하면 정신이 나갈 거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는 길에 신종민을 찾은 이유를 깨달을 정도로 정신없이 말이다.
‘맞다. 이강진 회장의 상태를 전달해 줘야 했는데.’
나중에 하자.
어차피 일어날 사람이니까.
생각난 김에 제니가 있는 병원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혼자 들어갈 테니 근처에서 식사라도 하고 계세요.”
“그래도….”
“다른 곳도 아니고 상현 병원입니다. 이 회장님 경호팀도 있으니 보안은 확실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중환자실 앞에 위화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경호 요원들을 병원 밖으로 보내고 병실로 올라가는 길.
갑자기 신종민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부드러워졌다고?’
인정하자.
좋아 보인다고 하지 않나.
이제 겨우 삼십이 조금 넘은 나이다.
천천히 묵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도 죽기 전에 목적을 달성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피식.
재밌게 느껴졌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여유를 느끼는 지금이.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후 제니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아….’
새로운 감정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저 여자를 놓치기 싫다는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
“오늘 출근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갔다 왔습니다.”
“벌써요?”
그녀가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쳐다봤다.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요?”
“조금 쉬려고요.”
“나 참, 저 보고 싶으셔서 일찍 퇴근하신 거죠? 그것 봐요. 내 매력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니까.”
“…그런가 봅니다.”
멍하니 중얼거린 내 말에 제니가 당황함을 보였다.
“뭐, 뭐래!”
팡! 팡!
그녀가 내 어깨를 치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식사 안 하셨죠?”
“네.”
“저도 아직이니 같이 밥 먹으러 가요.”
“괜찮겠습니까? 이 회장님께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셨는데….”
“바이털 사인도 돌아왔다 하고 수치도 정상적이라고 의사가 그랬어요.”
그렇게 그녀와 함께 향한 곳은 병원 앞 곰탕집.
살짝 이른 시간임에도 맛집인지 식당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가까스로 빈자리에 앉자 제니가 손을 들고 주문을 넣었다.
“특곰탕 두 개요!”
주문을 마친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여기 깍두기가 그렇게 맛있다더라고요.”
“그건 또 언제 알아보셨습니까?”
“아까 배고파서 밥 먹을 곳 없냐고 물었더니 담당 의사가 말해 줬어요.”
“그럼 정확하겠네요.”
잠시 후.
음식이 나왔고 맛을 본 우리는 깜짝 놀랐다.
“맛있네요….”
“그렇죠? 여기 깍두기 국물 좀 넣어서 드셔 보세요.”
제니가 내 곰탕에 깍두기 국물을 부었다.
평소 깔끔하게 먹는 걸 좋아하는 나였기에 말리고 싶었으나 오늘만큼은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더 맛있어졌네요.”
“그쵸? 역시 국밥은 깍두기 국물을 부어 먹어야 한다니까요.”
그렇게 식사가 거의 끝나 가려던 차.
제니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어라? 여보세요?”
쾌활하게 전화를 받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짐작이 갔다.
“회장님께서 일어나셨답니까?!”
“네! 방금 눈을 뜨셔서 저를 찾고 있대요.”
“바로 가시죠.”
그렇게 제니와 함께 이 회장의 병실을 향해 뛰었다.
“아버지는요?!”
“정신을 완전히 찾으셨습니다.”
덜컹.
의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제니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
제니의 외침에 이강진 회장이 웃음을 보였다.
“이것아. 이 아비 쓸쓸하게 한 달이나 집을 나가면 어떡해.”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알면 됐어.”
이강진 회장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못난 모습을 보였구먼.”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이고 좋은데요.”
“으흐흐, 이래서 자네가 좋아. 편견 없이 나를 봐 주거든. 내 퇴원하거든 술 한잔 대접하지.”
“그러시려면 먼저 일어나셔야죠.”
“걱정하지 말게. 빨리 털고 일어날 테니까.”
이강진 회장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제니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아버지, 저 결혼하기로 했어요. 제 결혼식에 오시려면 빨리 건강을 찾으셔야 해요.”
“그게 정말이더냐? 당연하지. 내 하루빨리 일어나마.”
이강진 회장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퇴원 첫 일정이 루덴 신 회장을 만나 보는 게 되겠구나.”
제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또다시 마음이 갑갑해지는 게 느껴졌고.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강진 회장이 반문했다.
“엘?”
제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이런.’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갈등이 벌어졌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사랑 같은 인간적 감정 자체를 알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딱 하나는 확실했다.
제니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는 건 왠지 싫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제니, 루덴 그룹 장자와 만나 본 적 있습니까?”
“아, 아뇨.”
“회장님께서는요?”
“한 번 있네. 가문 내에서 인정을 받는, 후계자로서 이견이 없는 인재지.”
“저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이 회장이 힘이 없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피식 웃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고개를 들어 제니를 바라봤다.
“제니는 만족합니까?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결혼해야 하는데?”
“…….”
그녀가 대답 대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제니와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결혼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십 년 가까이 함께한 사이니만큼 서로 모르는 것도 없었을뿐더러.
이 회장이 죽기 전 손주를 안겨 줘야겠다는 제니의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빠른 진행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바뀐 것은 없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사옥에 출근했고, 신종민과 함께 SC의 미래를 고민했고 첸과 함께 월가를 움직였으며, 최효석에게 연락해 리비아에서 채굴하는 원유 수급량을 조절했다.
아! 딱 하나 바뀐 게 있었다.
나를 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여직원들은 뭐랄까.
나를 뭉클하며 애틋한 눈으로 바라봤고.
대부분의 남자 직원들은 굉장히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게 얼마나 심했는지 평소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였음에도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특히, 일 층 보안 팀장의 경우 나를 볼 때마다 슬픈 눈으로 게이트를 열어 주더니 어느 날 이렇게 중얼거렸다.
“회장님께서 뭐가 부족하셔서….”
불쌍해하지 말라고.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된 당신마저 그러면 불안해지니까.
이런 모두의 우려 속에.
나와 제니는 소수의 인원만을 초대한 결혼식을 끝마쳤다.
“축하드립니다.”
신혼여행차 방문한 뉴욕 공항에 도착하자 첸과 소홍이 우리를 마중 나온 게 보였다.
“직접 나오실 필요는 없는데.”
“드디어 상한가가 끝난 엘을 마중 나오는데 직접 와야죠.”
첸이 소홍의 눈치를 슬쩍 보고 조용히 말했다.
“가시죠.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선물이요? 뭡니까?”
“흐흐, 가 보시면 압니다.”
잠시 후.
첸이 준비한 선물을 본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크기의 저택이 우리를 반겼기 때문.
“한국에선 결혼 선물로 집을 준다면서요? 그래서 저도 준비해 봤습니다.”
역시,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새로 지어진 커다란 저택에 들어온 제니와 나는 대망의 첫날 밤을 매우 성공적으로 보냈다.
다음 날, 허리 통증 때문에 제니가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 말이다.
“짐승.”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그녀가 나를 흘겨봤다.
그 뒤로 우리는 뉴욕에서 사흘 동안 월가와 뉴욕의 명소들을 돌아다녔다.
특히, 첸이 이끄는 은행에 방문한 제니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바로 여기가 절 해고한 임원의 사무실이었어요.”
“여기! 여기가 제 자리였다고요.”
“보고하기 위해 이 복도를 걸을 때면 언제나 가슴 졸였어요. 사장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 나를 괴롭힐지 몰라서요.”
이렇게 말이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마칠 때쯤.
-미국이라면서요?
트럼프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에 전화를 건 걸 보니 무언가 부탁할 게 있는 모양.
“신혼여행 중입니다.”
나는 듣지도 않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저녁 식사에 초대를….
“죄송하지만, 제가 요새 다이어트 때문에 저녁을 먹지 않습니다.”
-그럼 차라도….
“그건 카페인 때문에요.”
약간의 실랑이에 트럼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본론을 이야기했다.
-유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데이사르 내부에서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