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제니? 갑자기 여긴 왜….”
“리우가 일이 생겼다고 저보고 대신 가라던데요? 저거 광어회예요?”
요원들 빼면 아는 사람도 없는 놈이 갑자기 무슨 약속?
“맞습니다. 일단 들어오세요.”
“안 그래도 소주가 땡겼는데 잘됐네요.”
소파 테이블 앞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제니가 젓가락을 들고 광어회를 집어 먹었다.
“으음, 대광어인가 봐요?”
“단골 횟집에서 주문했습니다. 먹을 만하죠?”
“맛있어요. 뭐 해요? 술 식어요.”
그녀가 내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가요.”
누구랑 마시면 어떠냐. 쓸쓸하지만 않으면 되지.
그렇게 둘만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한 병, 두 병, 비워 갈 때쯤 취기가 올라왔는지 제니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횡설수설 주절거렸다.
“나 그냥 결혼해 버릴까 봐요.”
“출근만 한다면야….”
“또! 또! 이런다. 그리고 명색이 재벌가에 시집가는데 출근할 수 있겠어요? 보나 마나 루덴 쪽 일을 맡거나 아니면 제가 상속받을 지분으로 상현 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겠죠.”
“그건 좀 문제의 소지가 있겠는데요?”
말은 이렇게 해도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된다.
분명, 제니를 받아들인 루덴은 상현의 계열사들을 노릴 거다.
명분도 충분하겠다, 제니가 상속받을 지분 역시 만만치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죠? 이러니 내가 결혼 생각이 날 리가 없죠. 차라리 월가에서 일할 때가 나았어. 그때는 나만 보고 다가오는 남자들도 많았는데, 여기서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돈을 보고 다가오니까요.”
“어라? 월가에선 인기 많았나 봐요?”
“원래, 나 정도 외모에 경력이면 줄을 서요.”
“푸핫.”
제니의 뻔뻔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어머, 지금 안 믿는 거예요?!”
“설마요. 제가 월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제니 정도면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이십 대 중반 같아 보이게 만드는 깨끗한 피부, 상대방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커다란 눈, 오밀조밀한 콧날과 입술까지.
몸매 역시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글래머였다.
게다가, 능력 역시 누구보다 뛰어나니 팔방미인이 따로 없다.
“그나저나 결혼할 생각은 있나 봐요?”
직접적인 내 질문에 제니가 한숨을 크게 쉬며 답했다.
“휴우, 아버지께서 저 결혼해서 잘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시는 게 문제죠.”
“하긴, 이 회장님 건강이 좋진 않으시죠.”
원 역사대로라면 오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이강진 회장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여러 가지 요인을 배제했다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하늘이 정해 준다는 말처럼 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만 있었다.
“일단, 마시죠. 내일 본가로 돌아가기로 했으니까 당분간 이렇게 둘이 술 마시긴 힘들 거예요.”
“오, 가출 청산입니까?”
“그냥. 문득 생각이 들더라고요. 얼마나 살지 모르는 아버지하고 한 시간이라도 더 붙어 있는 게 효도라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마 이 회장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렇게 술자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일본에서 숨 가쁜 일 년을 보냈겠다, 술도 마실 만큼 마셨으니 바로 잠에 빠져들 거로 생각했지만.
‘잠이 안 오는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결혼이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속박당하는 게 싫어서가 아니다.
그저 누구와 함께하게 된다면, 복수에 온전히 신경 쏟기가 힘들어서였다.
‘전 회차였다면 그 사람의 안전도 신경 써야 했겠지.’
지금이야 양지에서 활동하기에 상관없지만, 테러 집단의 수장으로 활동했던 전 회차는 달랐다.
힘을 키우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죽이고, 불리하면 가족을 납치하여 협박하는 일을 수도 없이 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 역시 수도 없이 희생되었다.
그런 와중에 가정을 이룬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적들의 가족에게 위해를 입힌 만큼 적들 역시 똑같이 나올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상관없으려나?”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다.
위협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얼마 전, 첸에게 일어난 일만 보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쪽에서 시작된 위협이니 말이다.
하지만, 전 회차와 이번 회차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바로 양지에서 활동하는 것과 음지에서 활동하는 것의 차이다.
물론, 수틀리면 무력을 사용하긴 했으나 전처럼 적이라고 모두 죽이지도 않았고.
적들의 가족을 납치하는 강수를 사용한 것도 매우 적었다.
즉, 어느 정도 싸움의 룰을 지키고 있었다.
지구상의 이너서클들은 몇 군데 남아 있지만, 내 적이라고 할 만한 곳은 이제 로스차일드뿐.
돈으로 싸우는 그들이라면 가족을 만들어도 위험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피식.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혼은 뭐 혼자 하나?
누가 있어야 하지.
‘잠이나 자자.’
그렇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음 날.
“바래다주실 거죠?”
눈을 뜨니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니가 보였다.
“…리우 없습니까?”
“아침에 줄리아하고 놀이공원 간다고 나갔어요.”
“일 층에 가면 요원들이 있을 겁니다. 얘기해 놓을 테니….”
“저는 준비 끝났으니까 빨리 씻고 나오세요.”
제니가 방긋 웃으며 내 말을 잘랐다.
“…….”
“뭐 해요. 빨리 준비 안 하고.”
“나가셔야 준비할 거 아닙니까? 저 속옷 차림입니다.”
“뭐, 뭐 어때요. 전우나 다름없는 사이끼리.”
말은 저렇게 해도 부끄러웠는지 제니의 귀가 빨개지는 게 보였다.
“엘이 부끄러워하는 거 같으니 나가서 기다릴게요. 다 되면 전화해 주시고요.”
그렇게 간단히 씻은 후, 옷을 입으려던 찰나.
쾅!
제니가 들어왔다.
이제 막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던 나는 황당함에 그녀에게 따지려고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를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진 듯 보였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아, 아버지가 쓰러지셨대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어디랍니까?!”
“강북 상현 병원이요.”
“갑시다.”
그렇게 제니와 나는 병원으로 이동했다.
일 년 만에 시동을 걸어 보는 스포츠카가 다행히도 제 성능을 발휘해 줘서 우리는 십 분도 채 걸리지 않고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니가 경황이 없었는지 몸을 벌벌 떨며 병원을 두리번거리기만 했고 나는 접수대에 다가갔다.
“이강진 회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누구시죠?”
날카로운 간호사의 물음에 나는 명함을 건넸다.
그제야 간호사가 작은 종이에 이강진 회장의 위치와 병명을 적어 줬다.
[3층, 수술실. 심근경색 수술을 받고 있어요.]
끄덕.
간호사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제니의 손을 잡고 수술실로 향했다.
도착하니 최우현 부회장과 몇몇 수행원이 보였다.
“부회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회장님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 평창동에 방문했다가 서재에서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습니다.”
“쓰러지신 지 얼마나 되신지는 모르십니까?”
“의사 말로는 십 분 이하라고 했는데 자세한 건 결과가 나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심장이 멈춘 채로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면 그 누가 와도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나왔을 테니 말이다.
덜덜덜.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몸을 떨고 있는 제니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흐끅!”
“이럴 때일수록 마음 단단히 먹어야죠.”
“그,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국내에서 최고의 의사만 데려다 놓은 병원 아닙니까? 회장님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걸 알고 나서 세계 최고의 심장 전문의를 데리고 오기도 했고요.”
내 설명을 들은 제니가 그제야 진정됐는지 또렷한 눈으로 나를 마주 봤다.
“고마워요.”
“일단 기다려 보시죠. 수술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으니.”
“네.”
그렇게 수술실 앞에서 기다린 지 두 시간.
덜컹.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나왔다.
최우현과 제니가 재빨리 일어섰고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하셨고 응급 처치가 잘되어 있어 위급한 상황은 넘겼습니다.”
휴우.
제니가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그럼 언제 일어나실 수 있나요?”
“체력이 회복되셔야 일어나실 겁니다. 다만, 그동안 휠체어를 탈 만큼 체력이 약화하신 상태라 지켜봐야 압니다.”
“일어나시긴 하시는 거죠?”
“지금으로써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알겠어요. 고생하셨어요.”
의사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으실 겁니다. 저승사자가 와도 호통을 치고 쫓아내실 분이 아닙니까.”
“저 역시 아버지를 믿어요.”
최우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강진 회장.
지금은 구속된 전 대통령, 이창우가 내게 돈을 요구한 날에 처음 만났다.
전생의 악연이었던 이재현의 아버지인 만큼 어떻게 보면 그 역시 악연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내게 선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내가 도움을 주는 쪽이었다.
이재현의 마수에 빠져 죽을 뻔한 걸 내가 직접 구해 줬고.
백문에 의해 상현 전자의 경영권이 위협받았을 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좋아서였다.
비즈니스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그가 내게 받기만 한 건 아니다.
내가 뭘 해야 할 때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가끔은 무리를 해서라도 나를 도와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가진 전부인 상현 그룹 전체를 내게 넘겨줬다.
지분이야 제니에게 상속되겠지만, 이강진 회장은 제니의 동의를 받아 앞으로의 모든 의결권을 내게 일임했다.
내게 돈보다는 힘이 필요한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이강진 회장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까.
“회장님께서 들으시면 좋아하시겠군요. 안 그래도 아들 같다고 하셨는데.”
“사위 같다고는 안 하셨고요?”
“그거야 이 회장님이 거절하셨으니까.”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 이강진 회장이 병원 침대에 실려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제니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침대 난간을 붙잡고 함께 걸었다.
최우현이 그런 모습을 보고 조용히 알려 왔다.
“일단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일이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제니가 물으면 알려 주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최우현 부회장까지 떠나고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평소 좋아하는 담밴데도 입맛이 씁쓸했다.
“휴우.”
이강진 회장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우현 부회장은 그대로 은퇴하려 할까?
누구에게 상현을 맡기지?
이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털어 버렸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순수하게 인정하자.
그는 세상에 몇 없는 내 편이라는 걸.
그렇게 마음을 다시 먹고 병실로 내려갔다.
“제니.”
제니가 초췌한 얼굴로 병실 앞에 앉아 있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제가 있을 테니 들어가세요.”
“아닙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뭐라도 마시죠. 커피 괜찮아요?”
“좋아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그녀에게 건네주고 옆에 앉았다.
“미안해요. 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제가 너무 바보 같은 모습만 보여 줬네요.”
“아닙니다. 당황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죠.”
내 위로에도 제니가 말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라서 그래요.”
“어머니 말씀하시는 거죠?”
“네, 이제는 누굴 잃는 경험은 다신 하기 싫거든요. 특히, 제가 아무것도 못 해 준 상태에서는요.”
“이해합니다.”
“아버지는 금방 일어나시겠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천하의 이강진 회장입니다. 조금 기다리면 벌떡 일어나실 겁니다.”
“믿을게요.”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안정을 되찾았는지 제니가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결심했어요.”
“뭘요?”
“아버지께서 일어나시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여 드리기로요.”
당황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모든 걸 이룬 사람이에요.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없죠. 그런 아버지 인생에 이루지 못한 무언가가 되기 싫어요.”
“이 회장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제가 아는 그분은 제니의 행복만을 바라실 겁니다.”
내 충고에 제니가 방긋 웃었다.
“옛날 사람이잖아요. 가정을 이뤄야 행복해지는 줄 아는.”
그녀의 결정은 확고해 보였다.
“그리고 루덴 그룹 첫째 손자가 그렇게 잘생겼다는데, 혹시 알아요? 살다 보면 정말 좋아질지요.”
이러한 그녀의 말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거 같았다.
그녀를 이대로 보내도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