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미츠미시 그룹 사옥.
한때, 일본의 재계를 지배했던 이곳 꼭대기 층에 위치한 회장실에서 미츠미시 히데오와 질리언 로스차일드가 만나고 있었다.
“언제부터 가능합니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질리언의 질문에 히데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기대되는군요. 미츠미시가 다시 비상하는 그 날이.”
질리언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이거였다.
질리언이 준비한 한 수가.
일본이 한국을 공격하게끔 만든 질리언과 그의 아들 에드먼드.
그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고.
그런 폭락에 기대 많은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처럼, 질리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일본을 먹어 치우길 원했다.
때문에, 에드먼드와 부친 프랭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투자하여 직접 일본에 진출했다.
한때의 경제 대국이다. 인구도 1억이 넘는.
이런 국가를 얻을 수 있다면 투자 대비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경쟁자가 엘이라는 데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월가를 접수한 사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가문과 비슷한 크기의 부를 이룬 남자.
솔직히,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엘을 따라간 거고.
하지만, 손 놓고 포기하기엔 일본이란 먹잇감이 너무나도 탐났다.
그래서 미츠미시라는 비장의 한 수를 준비했다.
비록 지금은 숨죽이고 있지만, 명색이 일본 최고의 재벌 집단이다.
미츠미시 히데오와 그를 따르는 재벌들이 일어서기만 하면 단숨에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질리언은 많은 자금을 미츠미시 재벌에게 지원했다.
또한.
“추진하시던 일이 성과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예.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아직 여러 사람과 의견을 나눠 봐야 하겠지만, 운이 좋으면 올해 안에 통과될 수도 있을 겁니다.”
최근, 히데오는 정부 측 인사들을 회유하기 위해 밤낮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얼마 전,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에 존재하는 한국의 기업들을 한 방에 쫓아낼 수 있는 외국인 투자 법의 개정이 바로 그것이다.
골자는 중국과 같았다.
일본인이 50% 이상의 지분을 가져야만 영업을 할 수 있게 만든 법안.
이것만 통과되면 단숨에 밀어붙일 수 있게 된다.
“역시, 미츠미시 씨를 선택한 제 눈이 옳았습니다.”
“어이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질리언 님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알거지 신세가 되었을 겁니다.”
히데오의 겸양에 질리언이 비릿하게 웃었다.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기일이 잡히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대하죠.”
그렇게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헤어지려던 찰나.
쾅.
“회장님!”
회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비서 하나가 들어왔다.
“지금 중요한 손님과 같이 있는 거 안 보이나?!”
히데오가 날카롭게 물었지만, 비서는 다급한 얼굴로 TV만 가리킬 뿐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지금 TV에서….”
그 모습을 보던 질리언은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히데오의 집무실에 지금 들어온 사람은 말이 비서지 사실상, 히데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바.
그런 그가 이렇게나 놀랄 정도면 보통 소식이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TV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은 질리언과 히데오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SC 마켓이 달러 결제 시 20%의 추가 수수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관계자에 따르자면, 환전 수수료와 환율의 불확실성 때문에 어쩔 수 없으며….]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내일부터 달러를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질리언에게 가장 치명적인 한 수였다.
***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막대한 달러를 풀어 일본에 정착하려 했던 로팅실드였지만.
달러 자체를 부정하는 우리 쪽 정책에 그들은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무도 로팅실드 뱅크를 찾지 않았다.
물론, 질리언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화와 리비아 코인을 어떻게든 확보하여 영업을 재개하려 했다.
하지만.
원화의 발행은 이미 한계였고.
리비아 코인은 당연하게도 얻을 수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최효석을 통해 이런 얘기까지 들려왔다.
‘그놈 독하더라. 80달러짜리를 120달러까지 불렀어.’
어떻게든 돈 싸움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한 질리언이었다.
그렇게 버티지 못한 질리언은 결국 철수를 결정했다.
내가 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덕분에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끄응.”
SC 독주 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로팅실드가 우리의 경쟁자 역할을 해 주길 바랐던 와캬야마 총리와 그 휘하 내각 인사들과.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로팅실드가 떠나면 자신들의 차례라는 걸 알아서인지 내게 친한 척을 하는 미츠미시 히데오를 비롯한 일본의 재벌들.
마지막으로.
“…….”
바로 옆자리에 앉아 후련한 표정을 하는 질리언이 있었다.
“어라?”
“제가 분해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그야….”
그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화내고 억울해하는 패배자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온 자린데.
“저는 로스차일드의 가줍니다. 한 번의 실패로 감정이 격해지진 않죠.”
“아쉽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만남과 다르게 말투마저 원래의 예의 바른 그것으로 돌아왔다.
“패배를 인정해야만 새 출발을 할 수 있죠.”
무슨 소년 만화도 아니고.
“알았다. 인정하마.”
“엘에게 인정을 받는 날이 다 오는군요.”
질리언과의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명의 인원이 나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저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앞뒤를 전부 잘라먹은 질문에 와카야마가 당황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딱히 무슨 의도를 가지고 모신 건 아닙니다. 그저, 친분을 도모하고자….”
“쓸데없는 이유였군요.”
내각 인사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나와 질리언 사이에서 줄을 타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을 무시하고 왼편에 있는 재벌들을 보며 물었다.
“그쪽은요?”
잠시 멍해 있던 미츠미시 히데오가 내 물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사업적으로 의논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모두가 있는 이 자리에서 본론을 물을 줄 몰랐는지 당황한 듯 보였으나 히데오가 정신을 차리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투자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룹을 재건하고 싶은 겁니까?”
“맞습니다.”
한때, 일본 경제를 찬란하게 이끌었던 이들이 이런 부탁을 해 오다니.
이런 걸 보면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런 속도라면 SC의 경제가 일본에 자리 잡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손을 잡으면 그 속도를 빠르게 해 주겠다?”
“믿어만 주시면 개처럼 일하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또한, 그 기술력 또한 어디 가지 않았다.
당장 미츠미시와 토요타만 보더라도 직원들만 전부 해고했을 뿐, 가지고 있는 자산과 특허를 하나도 처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이들의 요청을 들어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요?”
자신들의 가업이 나 때문에 망한 걸 알고 있는 이들이다.
언제든 기회만 되면 배신을 시도할 게 뻔했다.
“계약서를 준비했습니다.”
히데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종이 하나를 내게 건넸고 나는 그걸 천천히 그리고 자세하게 살펴봤다.
정해진 액수를 투자하여 지분을 얻는 굉장히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계약서.
숫자 또한 우리 쪽에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마시고 그냥 파시죠?”
“네?”
히데오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어차피, 주식 시장도 전부 문 닫은 상태 아닙니까. 지분 쪼가리 얻어 봤자 어디에다가 팔 수도 없을 텐데. 적당히 쳐 드리겠으니 파시죠?”
사실, 지분 따위를 얻어 봤자 쓸모없다.
이들 재벌의 기업 가치는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특허 같은 경우에는 꽤 가치가 있겠으나 그 외 자산인 부동산은 진즉에 시세가 박살 났고.
가지고 있는 현금성 자산은 종이 쪼가리나 다름없는 엔화였다.
그런 놈들이 뭘 믿고 지분 투자를 권유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최소한 1원 한 장이라도 매출이 나와야 뭐라도 보고 투자할 것 아닌가.
하지만, 히데오는 기회를 잡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우리의 가업이니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우리니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같은 상투적인 설득부터.
투자만 해 준다면 재벌들이 가지고 있는 정계 인사들에 대한 약점까지도 제공하겠다는 폭탄 발언까지 했다.
당연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와카야마를 비롯한 내각 인사들이 발끈했고.
“없는 얘기 만들어서 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쪽에 있는 총무 대신만 하더라도 그동안 우리 쪽에서 수십억 엔은 받아 처먹었는데.”
재벌 인사들이 단호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수십 명이 서로 떠들다 보니 방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평화롭게 술을 마시는 질리언이 눈에 들어왔다.
지독한 새끼.
눈이 마주친 김에 나는 그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고.
우리 둘은 한적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말해 봐.”
“로팅실드 재팬을 인수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내가 왜? 어차피, 가만두면 망해 없어질 곳 아니야?”
사실, 로팅실드 재팬은 그동안 상당한 돈을 뿌려 왔다.
수만 명에 달하는 야쿠자들과 수백 만에 달하는 일본인들에게 대출을 해 줬는데.
그 액수가 자그마치 오백억 달러에 달한다.
게다가, SC 마켓을 따라 한 쇼핑몰을 일본 곳곳에 짓고 있었으니.
모든 것을 따져 봤을 때 로스차일드가 일본에 진출하면서 사용한 돈은 천억 달러에 가까웠다.
그리고 질리언이 원하는 인수 대금은 본전이겠지.
“엘이 인수하면 바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인수 비용을 아낄 수 있지.”
질리언이 피식 웃었다.
이놈이 왜 이러나 싶어 그에게 물었다.
“뭐가 웃기냐?”
“엘도 모르는 것이 있는지 처음 알아서 그렇습니다.”
모른다고? 뭘?
“엘, 저희가 왜 일본의 재벌들과 손을 잡았는지 아십니까?”
“…….”
“바로 놈들의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줄?”
목줄이라.
몇 가지 짐작이 되었다.
“지분? 은 아니겠구나. 주식 거래가 아예 안 되는 상황이니. 그렇다면 채권이겠네? 그것도 달러 채권?”
“네, 일본에 진출하기 전 매입해 놨죠.”
로스차일드답다.
사실, 나와 첸은 그걸 매입하려 했다.
어차피 가격이 헐값이기도 했고 가지고만 있으면 기술과 브랜드만 남은 일본의 기업들을 쉽게 접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쓸어 갔는지 시장에 나와 있는 매물이 하나도 없었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누가 로스차일드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음흉하고, 똑똑했다.
“어떻습니까? 이거까지 얹어 드리면.”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대신 액수는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
“저도 본전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가문이 이해할 수 있는 금액만 원할 뿐입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질리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을 붙잡았다.
일본이 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