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첸이 알려 온 대로 로팅실드는 일본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츠미시 재벌이 제공한 빌딩에 자리 잡고 일본 전역에 지점을 개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와카야마를 비롯한 내각 인사들은 양팔을 벌리고 환영했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일본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한텐 좋은 일이 아니지.’
다 차려 놓은 밥상이다.
엔화 폭락 때도 숟가락을 얻은 놈들을 여기까지 끼워 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는지 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임승차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죠.”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두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첸이 검지와 중지를 폈다.
“하나는 와카야마를 비롯한 정계 인사들을 포섭하여 그들이 제대로 된 영업을 펼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겁니다.”
뇌물을 줘서 방해한다라.
전통적이며 일반적인 방법이다.
고전이 명작이라는 말처럼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한 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안 됩니다. 우리 쪽이 그렇게 하면 상대 역시 똑같이 나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힘들 거고요.”
뇌물은 저쪽도 줄 수 있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겠군요. 정당하게 물리치는 수밖에요.”
골드만삭스와 씨티의 뒤에서 암약하던 로스차일드의 본체가 바로 로팅실드다.
당연히 쉽지는 않을 터.
하지만.
우리는 놈들을 쫓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미 우리를 통해 풀린 원화가 700조 원이 넘어갑니다. 이 정도면 엔화는 끝났다고 봐야 하고 놈들이 들어와도 쉽게 자리 잡기는 힘들 겁니다.”
놈들의 계획이야 뻔하다.
로팅실드 뱅크로 달러를 풀고.
지분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기업들을 진출시키는 것.
바로 우리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거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일본인들의 인식에 SC란 이름은 깊게 박혀 있기 때문.
SC 뱅크에서 돈을 가져다 쓰고 그걸 갚기 위해 SC와 손잡은 한국의 기업들이 제공한 일자리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급여는 지역 경제에 뿌려졌다.
시장에서 고등어 한 마리를 사도 원화로 결제하고 초등학생이 공책 하나를 사도 원화였다.
그래도 방심할 필요는 없는 노릇.
“첸, 경시청장하고 안면 있죠?”
“네, SC 마켓 보안 건으로 몇 번 봤습니다.”
“자리 한 번만 만들어 주세요.”
“네? 갑자기 왜….”
나는 그의 물음에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면 압니다. 약속 잡는 대로 연락해 주세요. 그때까지 잠 좀 자고 있겠습니다.”
***
무라야마 히로시.
관동을 지배하는 야쿠자 조직인 칸토 히슈미 연합의 직계, 무라야마파의 2대 두목이다.
또한, 칸토 히슈미 연합의 회장, 야마시로 토리마츠의 보좌 역을 맡은 만큼, 차기 회장으로 낙점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는 현재 부하들과 함께 어디론가 이동하며 생각했다.
‘놓칠 수 없는 기회.’
알 수 없는 곳에서 들어온 임무.
평소 같았으면 야쿠자의 자존심 운운하면서 단번에 뿌리쳤을 텐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보수로 내건 돈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10억 원이라.’
예전이라면 콧방귀를 낄 적은 돈이지만,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일본의 경제가 무너지면서 한때, 전국을 호령했던 야쿠자의 경제도 무너졌기 때문이다.
신주쿠 거리를 화려하게 밝히던 술집들도, 방송국에 큰 영향력을 끼치던 연예 기획사도 먹고사는 문제 앞에선 모두 부질없었다.
그렇게 무너진 연합의 경제력은 조직의 규모를 10분의 1 이하로 줄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나마도 초창기부터 함께한 간부들만 남은 것이다.
그러던 차에 들어온 10억 원의 선금은 가물에 단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완료 보수로 20억 원을 약속받았으니 그가 이 의뢰를 받아들인 건 당연했다.
그렇게 조직의 차를 타고 이동하던 히로시와 휘하 조직원들은 지바현 어느 빌딩 근처에 도착했다.
우르르.
다른 일조차 찾지 못하는 태생부터 야쿠자인 이들이 차에서 내리자 시민들이 움찔거리며 자리에서 피했다. 아니, 도망쳤다.
“비켜!”
간혹 자리를 피하지 않은 이들은 야쿠자들의 윽박지름에 도망쳤다.
그렇게 이들은 주변의 모든 이들을 물리치고 로팅실드 뱅크, 지바 지점의 문을 열었다.
싸아.
손님이 가득 들어차 있었던 은행 내부의 공기가 싸해짐과 동시에.
“나, 나중에 올게요.”
겁을 집어먹은 몇몇 손님들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을 떠났다.
그렇게 10여 분.
은행의 경비원이 몸을 덜덜 떨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 어떤 업무를 보시러 오셨는지….”
그러자, 히로시가 조직원 대신 대답했다.
“대출.”
“…네?”
“대출해 준다고 해서 왔소.”
“그, 그러면 저기 번호표부터 뽑아 주시겠습니까? 차례가 되면 불러줄 겁니다.”
“그렇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에 버튼을 누르고 번호가 써진 종이를 뽑았다.
“뭣들 하고 있어? 어서들 뽑지 않고.”
네!
야쿠자들이 줄을 서더니 번호표를 뽑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은행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두목인 히로시의 상담을 맡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계속 피할 수는 없었던바.
부지점장이 남자답게 나섰다.
“이쪽으로 오시죠.”
히로시가 성큼 다가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내렸고.
그의 민얼굴을 확인한 부지점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X 됐다.’
생각보다 험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부지점장의 염려와는 다르게 히로시는 조용히 신분증을 내밀었다.
“TV에서 보니 조건 없이 2,000불씩 빌려주는 거 같던데….”
“마, 맞습니다.”
“상환 기한도 없고 이자는 1%가 맞소?”
“넵!”
아니어도 바르다고 해야 하는 상황.
다행히 히로시의 질문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기에 부지점장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부탁드릴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그렇게 무라야마 히로시가 로팅실드 은행에서 2,000달러의 대출을 받음과 동시에.
와글와글.
주변에 있던 백여 명의 조직원들 역시 창구에 차례대로 줄을 서서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얼마나 바쁘던지 그들만 하더라도 종일 업무를 봤다.
그렇게 단 하루의 해프닝으로 일이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다음 날, 출근한 은행의 직원들은 문을 열기 전부터 길게 줄을 서 있는 야쿠자 무리를 발견했고 그날도 역시 이들을 상대로 업무를 진행하느라고 하루를 통째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건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게 지바 지점만의 일이 아니라 전국 모든 로팅실드 지점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데 있다.
로팅실드 뱅크가 본격적으로 진출한 지 일주일.
그동안 일반인들을 상대로 업무를 본 건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손님은 ‘정크’ 등급으로 분류되는 야쿠자일 뿐.
결국, 참다못한 질리언이 직접 움직였다.
***
“오호라, 이거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바지에 똥 지린 얼굴의 질리언이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피차 바쁜 사람들이니 용건만 간단히 하고 갈 길 가시죠?”
내 능청거림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저속한 수를 쓰시더군요.”
“무슨 수? 누가요?”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지금 로팅실드 재팬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엘의 사주라는 걸 알고 왔습니다.”
“이런! 누가 절 모함한 모양입니다? 저는 모르는 일이니 다시 한번 알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으득.
질리언이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떨며 분노를 참는 게 보였다.
솔직히.
‘재밌어.’
월가에서의 내 계획에 훼방을 놓았던 놈이다.
그런데 일본에서까지 숟가락을 들이미는 건 너무하지 않나.
재료를 사 온 것도 나고 음식을 만든 것도 난데.
하지만,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의 일본의 상황은 엘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 듣고만 계십시오.”
그가 서슬 퍼렇게 이야기했고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얼마든지 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 모든 일의 시초. 일본과 한국의 무역 분쟁은 저희가 뒤에서 조종한 일이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었죠.”
예상한 바였다.
이놈들이 아니었다면 당시 일본이 한국을 향해 도발할 이유가 없었거든.
그렇다고 그게 놈들의 지분을 인정해 줄 만한 이유가 되진 않는다.
“마이크론이 협상에 나선 것도 우리 쪽의 설득에 의한 겁니다.”
“대신, 시중가의 두 배에 달하는 값을 치러서 계약했습니다. 이왕 나섰으면 좀 싸게 매입할 수 있게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어쩐지 마이크론이 반도체 독점 계약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 같지 않더니만….
솔직히 이건 모르고 있었다.
물론, 질리언에게 말한 것처럼 두 배나 되는 시세로 계약을 맺은 거니 이것 역시 놈들의 지분을 인정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엔화 역시 저희 쪽이 참여했기에 급격한 하락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건 좀 선 넘었다.
“질리언.”
“…….”
“우리 말은 똑바로 합시다. 엔화 투자는 우리 쪽이 주도한 걸 로스차일드가 무임승차 한 겁니다. 애초에 그쪽 아니었으면 우리 쪽 수익률이 50%는 더 올랐을 겁니다.”
어디서 밥숟가락 올린 걸 잘했다고 뻗대고 있어?
“뉴욕에서 첸을 도와준 일이 고마워서 끼워 준 겁니다. 만약 그거 아니었다면 우리 쪽은 위치를 변경해서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모조리 녹여 버렸을 겁니다. 얻은 수익을 모두 포기해서라도요.”
“…여전히 독하시군요.”
“이제 알았습니까?”
“이래야 엘답기도 하네요.”
질리언의 눈빛이 바뀌었다.
“좋습니다. 제대로 한번 해보시죠.”
“얼마든지.”
피식.
놈의 선전포고에 간단한 웃음으로 답해 줬다.
질리언이 나를 노려보며 몸을 돌려 나가려던 차.
놈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런데 해볼 수나 있을까?”
놈이 다시 몸을 돌려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생각 좀 해 봐. 너는 네 가문이 미국 제일의 가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당연히 미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무적이라고 생각할 테고. 그게 금력이든 권력이든. 아니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극동에서는 어떨까? 여기서도 로스차일드의 이름값이 먹힐까?”
질리언이 내 질문에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으며 대답했다.
“미국의 영향력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미칩니다.”
“마치 네놈들이 미국 그 자체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래? 그런데 저번에는 왜 그렇게 당하셨나?”
내 도발에 놈의 기색이 사나워지며 말투가 바뀌었다.
“당신이 트럼프를 붙잡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알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처음부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
“운이 좋았다?”
“그래.”
“그런데 아직 미국 대통령 안 바뀌었는데?”
“방법이야 많지.”
“오호라, 자신 있어 보이는데?”
“트럼프를 끌어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 안 되면 우연한 사. 고. 로 위장하는 것도 방법이지.”
“케네디처럼?”
피식.
“유치한 도발을 하는군.”
비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질리언.
“글쎄? 과연 도발뿐일까?”
나는 그런 놈을 천천히 바라보며 책상 아래서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들으셨죠?”
-화이트 하우스 비서진을 소집해야겠습니다. 국가 반역으로 봐야 할지부터 따져 봐야겠어요.
질리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