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간이침대에 누워 슬쩍 눈을 뜨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신종민이 보였다.
“아, 벌써 그렇게 됐군요. 자느라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가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본격적으로 해 보시니 만만치 않죠?”
“인정하겠습니다.”
일본의 국채 시장 붕괴 후, 쏟아진 일 더미에 나는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은 내가 신종민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루 열두 시간, 쉬는 시간 하나 없이 꽉 채워서 하는 업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퇴근하는 시간도 아까워 이렇게 간이침대에 누워 잠을 잤을까.
나는 신종민을 바라보며 마음먹었다.
‘혹시라도 GL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겠어.’
절대 놔주지 않으리라.
평생 곁에 두고 부려 먹어야지.
앞서 걷던 신종민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오한이….”
“몸이 좀 허해지셨나 봅니다. 바쁘더라도 규칙적인 운동과 식단은 필수입니다.”
“네, 아무래도 관리 좀 해야겠습니다.”
잠시 후.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한 우리는 청와대에 도착했다.
청와대가 주최한 경제인 만찬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대기실에 도착하니 전과 마찬가지로 그룹의 회장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고! 신 부회장. 이게 얼마 만이야!”
송양의 장 회장이 죽은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뛰어와 신종민을 반겼다.
“반년만이군요.”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 번이 없나. 우리가 남도 아니고.”
“다음부턴 신경 쓰겠습니다. 장 회장님 말씀대로 남이 아니니까요.”
“허허, 내가 이래서 신 부회장을 좋아한다니까. 척하면 척 아닌가.”
그렇게 온갖 오버액션을 하던 장 회장이 이번에는 나를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그것도 매우 공손하게.
“잘 계셨습니까.”
“뭐.”
성의 없는 대답에 그의 눈가가 꿈틀거렸지만, 이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조금 이따 만찬 회장에서 뵙겠습니다.”
장 회장이 자리를 옮겼다.
신종민이 영문 모른 채 서 있는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철강 때문에 저렇습니다.”
“아하.”
그렇다면 말이 된다.
지금 철강 공급은 중국의 내전으로 인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한참이나 말이다.
그리고 한국 제철을 인수한 SC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소를 소유한바.
자동차를 비롯한 제조업 기업들에게 절대 갑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명색이 송양도 별도리가 없나 보네요.”
“당장 저희가 판매 중지 하면 내일부터 공장 문을 닫아야 하니까요.”
신종민과 함께 간단한 의견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차.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만찬회가 시작되니 참석하신 귀빈 여러분께서는 각자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우르르.
만찬 회장에 들어서자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내가 앉은 곳에는 상현의 최우현 부회장과 GL의 김지훈 회장, 그리고 그의 아들 김호선이 자리 잡았다.
아마, 그룹 간의 관계를 고려한 자리인 듯 보였다.
그렇게 모두가 착석하자.
“사위 왔는가?”
김지훈 회장이 신종민을 반겼다.
“…예.”
“푸홧.”
생각지도 못한 사위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웃음소리가 나자 주위 테이블에서 우리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회장님, 체통을 좀….”
“아아, 미안합니다. 너무 재밌어서 그만.”
“사위 말이 맞네. 오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엄숙해야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사위 편을 드는 겁니까?”
“과년한 딸년 시집 보내는데 못 할 게 또 무엇인가? 따른 놈들이 채가기 전에 얼른 침 발라 놔야지.”
편히 말을 놓는 관계가 된 김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잠시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 지나고.
“대통령님 들어오십니다.”
이지석이 만찬 회장으로 들어왔다.
경제인 만찬회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이지석은 경제인들에게 고용과 투자의 확대를.
반대로 경제인들은 이지석에게 각종 규제의 철폐를 주문했다.
최대한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완곡하게 돌려서 말한 건 기본이다.
그렇게 종료된 만찬회.
평소라면, 곧바로 돌아갔을 그룹 회장들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한 달 전, 일본은 엔화를 찍어 내어 채권을 막는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다.
기축 통화국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급한 불을 끄는 대신, 전 세계의 신뢰를 잃었다.
엔화는 더는 안전 자산으로 분류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신뢰도의 하락은 셀 재팬(Sell Japan) 현상을 일으켰다.
막대한 달러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며 환율이 요동쳤다.
엔화의 가치는 빠르게 떨어졌다.
일전 중국이 겪은 외환 위기와 비슷한 전개를 보이는 것 같지만, 여기에 한 가지 악재가 더해졌다.
그동안 엄청나게 찍어 낸 엔화 때문에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일본인들은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돈을 뭉치로 들고 다녔다.
전단에는 티슈 대신 만 엔짜리 지폐를 붙여서 뿌렸다.
화폐가 제 기능을 상실하자 몇몇 일본인들은 동전을 녹여 괴를 만들었다.
고물의 가격이 돈의 값어치를 상회하기 때문이다.
엔화 풋 옵션과 파생 상품에 투자한 돈이 복사된 건 당연했다.
수익률이 단번에 300%가 넘어갔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세계 경제에는 크나큰 악재라는 거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구매력을 가진 국가가 경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인데.
특히, 대일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로선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었다.
이에 그룹 회장들은 나를 비롯한 상현과 GL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투자하기 위해 만찬회장에 남았다.
이번 대일 투자가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데.
‘김지훈 회장이 소문을 잘 내 줬지.’
모든 건 내가 의도한 바였다.
잠시 후, 이지석이 눈치껏 빠져 주자 그들은 모두 우리 테이블로 걸어왔다.
“상현에선 어떤 방식으로 투자하실 계획입니까?”
효진의 우일영이랬던가?
횡령으로 감옥을 두 번이나 다녀와서 그런지 말투에 거침이 없었다.
남의 투자 기법을 공짜로 얻으려는 심보가 참.
“심보가 고약하네요. 남의 직원들이 머리통 터져 가며 생각해 낸 포트폴리오를 공짜로 얻으려고 하다니.”
혼잣말이지만 모두가 알아듣게 말했다. 우일영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어흠, 죄송합니다. 급해서 그만….”
“알았으면 저기 구석에 찌그러져 계시죠.”
“…….”
그가 주먹을 꽉 쥐고 물러났다.
그럴 수밖에.
재벌 회장들이 어디서 이런 취급을 받아 볼 리 없을 테니까.
만인에게 평등한 나 정도는 돼야 이런 취급을 해 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분위기가 싸해지자 최우현이 나섰다.
“자자, 이러지들 마시고 앉으시죠. 무릎들 시릴 나이가 아닙니까?”
그의 농담 덕분에 분위기가 살짝이나마 풀어졌다.
회장들이 자리에 앉자 반대로 이번에는 최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경제 연구소 하나쯤은 가지고 계실 테니 일본의 사태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짐작하실 테고….”
최우현이 넉살 좋게 말하자 맨 앞에 앉은 노인이 말을 받았다.
재계의 상남자라고 불리는 고화 그룹의 김진영 회장이었다.
“그거야 알고 있소. 우리가 원하는 건.”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에게 돈을 맡기기 위해 찾아온 거요. 그게 안 된다면 소스라도 듣고 싶소.”
참, 이런 거 보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같은 용건이지만 어디 맡겨 놨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 우일영은 밉상이 되고.
저렇게 당당하고 예의 있게 물어보는 김진영은 호감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게 그를 공짜로 도와줄 필요는 만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최우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일차 투자는 이미 마무리되어 수익을 정산 중이고 이차 투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앞으로의 투자 정보가 노출되는 만큼 투자 소스는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그럼 상현과 GL의 경우처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최우현이 나를 슬쩍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이신후 회장의 인정을 받은 분들만 가능합니다.”
최우현의 말이 끝나자 김진영이 크게 웃었다. 당연하다는 대답이었다.
“허허허,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무릇 무리에 들어가려면 오야의 허락을 받는 게 당연한 것을.”
김진영이 호쾌하게 동의했고 이런 반응은 다른 회장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틀린 말이 아니야. 남의 전략을 함부로 들춰 볼 수는 없지.”
“어디 조건이나 한번 들어 봅시다.”
웅성웅성.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
나는 의자를 들고 회장들의 시선 앞쪽에 자리 잡고 앉은 뒤 그들을 마주 보았다.
“처음 뵙는 분이 많으시군요.”
간단한 인사에 김진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거야 이 회장이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소. 우리같이 돈 없는 사람들을 너무 무시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소.”
하하.
그의 말 한마디에 회장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심지어 나도 웃었다.
재벌들을 돈 없는 사람 취급하다니.
역시 재계의 일 빠따라 불리는 그다웠다.
한결 밝아진 분위기에 질문 공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까 인정을 받아야만 도와준다고 하셨는데 그 조건이 뭡니까?”
“성의를 보여 투자하시면 됩니다.”
“정해진 액수가 있습니까?”
“절대적인 액수가 아닙니다. 각자 그룹들의 규모가 다른데 천편일률적인 금액을 투자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 대답에 회장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예를 들자면, 여기 계신 김지훈 회장님께선 그룹의 가용 자금은 물론이고 가문의 재산 상당 부분을 투자하셨습니다.”
설명을 들은 회장들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력을 다한 투자를 하라는 뜻이구려.”
“정확합니다.”
각각 수천, 수만의 직원들을 책임지는 회장들이다.
영민하지 않을 리가 없기에 이 정도만 설명해도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일은 다음 주 금요일까집니다. 그 이후로는 제가 일본에 넘어가야 하기에 기일이 넘어가면 투자받지 않겠습니다.”
***
만찬회가 끝나고 우리는 평창동, 김지훈 회장의 자택으로 이동했다.
저번 투자의 정산을 위해서였다.
“수익률은 490%입니다. 상현이 400억 달러, GL이 310억을 투자했으니 1,960억과 1,519억이 되었고 최종 금액에 15%를 저희 수수료로 가져가기로 했으니 1,666억과 1,291억을 정산하겠습니다. 내일 중으로 각자 만드신 BOA의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대충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숫자로 들으니 엄청나군.”
“맞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이 숫자를 들으시면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실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마움을 표했다.
“저희도 수수료 받고 하는 일이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내 반응에 두 사람이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 회장님 덕에 큰돈을 벌었으니 고맙지 않을 리가 없지요.”
“맞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까.”
두 사람이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마치, 나를 도와 재투자를 해야 할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오버하지 않으셔도 두 그룹에는 기회를 드리려 했습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한 말이 나오자 그들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 김에 술 한잔 어떤가?”
김지훈 회장이 서재 한구석에서 위스키를 꺼내며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꽤 즐거웠다.
신종민은 은근슬쩍 자리에 낀 김하선에게 꼼짝하지 못했고.
김호선과 김지훈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던 중 최우현이 궁금한 게 생겼다는 듯이 내게 물었고.
“그런데 이번 일본 투자는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나는 전부터 첸과 상의한 바를 말해 주었다.
“은행을 세울 겁니다. 일본을 모두 먹어 치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