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첸이 비서가 가져다준 보고서를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이윽고 세 번이나 정독한 첸이 보고서를 덮고 중얼거렸다.
“뭔가 벌어지고 있어.”
엘과 함께 세운 완벽한 계획.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포함하여 세운 계획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둘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이걸 어쩐다….”
로스차일드와 그들의 하수인 미츠미시.
이 둘의 움직임이 변수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첸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지이잉.
“누구지?”
처음 보는 번호.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헬로.”
-스티븐 첸?
“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당신의 아내를 데리고 있는 사람.
“어디서 장난 전화질이야?”
같잖은 협박이라고 생각한 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아내 소홍은 SC의 주요 인사로 분류된 지 오래였기에 데저트의 요원들에게 철통같은 경호를 받고 있었다.
수백 번의 실전을 거친 데저트다.
그런 요원들을 뚫고 소홍을 납치한다는 건 특수 부대 한 개 중대가 나서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난 전화라고 생각한 그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그때.
-첸!
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첸이 멈칫하며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다시금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확실히 소홍이 맞았다.
납치범이 전화를 받자 그가 목소리를 깔고 으르렁거렸다.
“너 누구냐.”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인질범도 있나 보군.
“지랄 말고 원하는 걸 말해.”
-전화로는 좀 그렇고 만나서 얘기하도록 하지.
“장소는?”
-정해지면 연락해 주겠다.
뚝.
끊겨 버린 전화.
첸이 집으로 가기 위해 뛰어나갔다.
소홍이 진실로 납치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첸의 눈앞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위이이잉.
삐용 삐용.
구급차와 경찰차들이 그가 사는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었고 주위에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파트를 지키는 경비원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위장한 데저트 요원들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첸이 정신없이 주위를 살펴볼 때, 그를 알아본 요원 하나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로 다가왔다.
경찰들과 구급대원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는 꿋꿋이 자신의 두 발로 걸었다.
털썩.
부상 때문에 힘에 겨웠는지 아니면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그가 첸의 앞에서 무릎 꿇었다.
“사모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요원의 말에 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눈앞의 요원 탓이랴.
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최선을 다한 걸 알고 있습니다. 일단, 몸부터 챙기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복수를 할 거 아닙니까?”
“…네.”
요원이 울컥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보며 첸이 마음을 굳게 먹었다.
놈들이 바라는 바는 뻔하다.
자신을 움직여 SC에 해를 입히려는 수작이다.
첸은 그런 놈들의 뜻을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최악의 경우, 소홍과 배 속의 아기를 포기해야 할지라도 말이다.
으득.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는 노릇.
첸은 이 난관을 해결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자, 그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
띵동.
SC의 주요 요인들만 쓰는 전용 메신저 앱에서 알림이 들어왔다.
아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는 앱이기에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소홍이 납치되었습니다. -첸]
“시팔.”
뭔 일이 생겨도 생길 거 같다더니.
우리가 틈을 보이지 않자, 고전적인 방법으로 우리 쪽을 흔들기로 한 모양이다.
‘로스차일드.’
놈들이 신사적인 방법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내 잘못이다.
‘일단 정보부터.’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기에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세계 최고의 천재 해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빅터에게로 말이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힘들 거 같아요.”
내 기대와 달리 빅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유일한 단서라고 준 전화번호는 이미 사망한 사람 명의로 개통된 번호예요. 그리고 알려 준 통화 시간 이후로는 아예 꺼져 있고요.”
“다시 전화가 오면?”
“그때라면 어떻게든 추적해 보겠지만, 우회 접속일 경우 최소 10분 이상 걸려요.”
역 추적 방식은 일을 저지른 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놈들이 10분이나 통화를 지속할 리가 없다.
“너무 길어. 다른 방법은?”
“시간을 줄일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두 가지가 필요해요.”
“뭔데?”
“슈퍼컴퓨터와 위성이요. 컴퓨터로 빠르게 추적하고 위성으로 장소를 찾는 거죠.”
난감했다.
남은 시간은 하루, 길어 봤자 이틀이다.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첸의 아내, 소홍과 배 속 아이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러시아와의 협조가 끊긴 지금, 하루 안에 빅터가 말한 두 가지를 구하는 것은 무리다.
“시팔.”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 봤자 뭐하고 힘을 가져 봤자 소용없게 느껴졌다.
‘내 사람 하나 못 지키는 것을.’
그렇게, 홀로 자책하자 빅터가 눈앞에서 괜히 미안해하는 것이 보였다.
“흥분해서 미안하다. 너 때문에 그런 건 아니야.”
“괜찮아요. 어디 빌릴 곳이라도 없을까요? 당장 구할 수 없다면 그게 최선일 거 같은데.”
맞는 말이다.
내가 못 구하면 남의 것을 빌리면 된다.
그런데 어디에서?
잠시 생각하던 나는 빅터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제리.’
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록 악연이지만, 서로 협력할 껀덕지는 많다.
돈과 권력, 그리고 무력까지.
놈이 필요로 하는 걸 채워 준다면 이번 일에 대한 협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제발 한국에 있어라.’
간절한 마음을 담에 제리에게 전화를 넣었다.
잠시 후.
-헬로. 엘.
놈이 전화를 받았다.
“한국이냐?”
-예, 한국입니다.
“잠깐 볼 수 있을까?”
-오, 천하의 엘이 찾아오시는 겁니까? 저. 따. 위. 를. 보. 러?
“그래.”
-그렇다면 남산 프린스 호텔로 오시죠.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충분히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일단 아쉬운 쪽은 나였기에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프린스 호텔 로비에 도착하자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놈이 보였다.
“이거, 영광입니다. 이렇게 저를 찾아주시고.”
“쓸데없는 말은 됐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지?”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제 놈이 계속 갑일 줄 알고 성질을 긁기 시작했다.
일단 한 번은 참았다.
첸의 가족들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말이다.
“장난치는 거 아냐.”
“저도 장난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지. 첸의 아내를 찾고 싶다.”
내 요구에 제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다시 좌천되기 싫습니다. 아니다. 한 번 좌천됐으니까 잘리려나?”
아무래도 저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좌천된 듯싶었다.
그렇다면 놈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수밖에.
“잘리게 되면 지금 연봉에 10배 주고 내가 고용하지.”
“제가 돈 때문에 일하는지 아십니까?”
“그럼 뭘 원하는 건데?”
“승진. 그것도 아주 빠른 고속 승진입니다.”
놈의 말에 곧바로 안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놈의 시선이 거기에 꽂힌 그대로 금액을 적기 시작했다.
0을 하나 적을 때마다 놈의 얼굴이 변하는 걸 보며 놈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1을 쓰고 펜을 놓았다.
“이 정도를 본부에 가져다주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지?”
내 물음에 제리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가지가 부족하군요.”
“뭔데?”
“엘과 CIA 간에 우호적인 관계.”
“그건 뭐라고 써 주면 되지?”
“그저 구두로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천하의 엘이 약속을 어길 리가 없을 테니까요.”
천만에, 얼마든지 어길 수 있다.
다만, 여태까지는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볼 수 있는 이득이 크지 않아서 지키면서 살았을 뿐.
하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기에 나는 그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약속하지.”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제리가 미리 준비해 왔는지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일단, 인질이 어딨는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다. CIA가 할 일이 없어도 첸의 아내 소홍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첸은 몰라도.
“다만,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뭔데?”
“첸 회장이 사는 아파트의 경비가 너무나도 쉽게 뚫렸습니다.”
“쉽게?”
“CCTV를 돌려 본 결과 습격한 적들의 숫자는 스무 명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데저트 요원들은 열 명이었습니다.”
“특수 부대 한 중대가 완전 무장을 하고 밀고 들어와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는 전력이기도 하고.”
“맞습니다. 그런데도 적들은 단 한 순간에 돌파했습니다. 그 말은 적들이 데저트를 압도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CIA의 어느 리스트를 뒤져 봐도 지구상에 그런 조직은 없습니다.”
제리의 설명에 온몸에서 닭살이 올라왔다.
‘설마?’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제리가 대신 결론을 내 줬다.
“예상하신 게 맞을 거 같군요. 저희는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젠장.”
배신이라니. 가장 믿고 싶지 않은 결론이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지만, 곧 관뒀다.
배신자보단 인질을 찾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정리하고 제리를 보며 말했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슈퍼컴퓨터와 위성.”
내 요구를 들은 제리가 웃으며 답을 줬다.
“좌천당하긴 했더라도 일단은 국장입니다. 얼마든지 사용 가능하죠.”
긍정의 답이었다.
***
남산에 위치한 프린스 호텔 지하.
처음 안 사실이지만, 바로 이곳이 CIA의 한국 지부였다.
나는 제리의 안내로 빅터를 데리고 이곳에 들어왔고 손을 푼 빅터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작할게요.”
끄덕.
제리가 현란하게 손을 놀려 CIA의 슈퍼컴퓨터에 접속했고 몇 가지 명령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언제 납치범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올지 모르기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제리가 처음 보는 슈퍼컴퓨터를 자유롭게 다루는 빅터를 보며 감탄하며 물었다.
“저런 천재는 어디서 구한 겁니까?”
“전생에 덕을 많이 쌓으면 구해져.”
순도 100%의 사실만 말한 거지만 제리는 내가 농담한 거라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시간이 애매했다.
일이 터지자마자 나는 데저트 요원들의 파견을 위해 최효석에게 연락했다.
최효석은 최정예의 팀을 짜서 그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내부의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내린 결정이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최효석에게는 데저트 내부의 단속을 부탁했을 거고 리우를 비롯한 한국팀을 파견했을 것이다.
‘무르기엔 시간이 없어.’
이젠 어쩔 수 없다.
그저 최대한 일찍 도착한 최효석이 첸의 아내, 소홍을 구해 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걸 위해서 이 고생을 하는 거기도 했다.
그렇게 대기한 지 반나절.
최효석으로부터 자신을 포함한 팀원 전부가 뉴욕 안가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들어왔고 나는 여태까지 알아낸 사실을 그에게 알려 줬다.
-빌어먹을.
그가 간단한 욕지거리를 하더니.
-일단 임무에 집중하겠다. 내부는 나중에 점검하지.
통화를 종료했다.
또다시 대기의 시간.
타이밍의 싸움이다.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니 꼼짝없이 대기하는 수밖에.
그렇게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소변용으로 가져온 양동이가 거의 다 차 갈 때쯤.
“들어왔어요!”
첸의 전화기에 신호가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