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오늘 그 말씀을 하기 위해 모이라고 하신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제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거 아닙니까?”
어이없어하는 내 대답에 김지훈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끄럽습니다. 머리 좀 굴린 걸로 이렇게까지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다니.”
머리 좀 굴렸다?
그렇게만 표현하기엔 너무 대단하지 않은가.
‘궁예?’
저 나이까지 그룹을 이끌면 관심법까지 쓸 수 있는 건가?
“그저, 이 회장님의 발자취를 읽었을 뿐입니다.”
“발자취요?”
“과거는 미래를 반영한다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과거가 떠올랐다.
‘나를 조사한 거군.’
김지훈 회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흥미가 일어나서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전혀 불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과거를 조사해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가 궁금하군요.”
“입도 심심한데 일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 형님도 오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좋습니다.”
김지훈 회장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그를 살폈다.
전혀 비범한 구석이 없는 평범한 70대의 노인. 언뜻 보면 동네 복덕방 어르신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 김지훈 회장이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왜 그런 결론을 도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했다.
“한때, 이 회장님의 거취가 재계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남자가 ST 그룹을 인수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그리고 서브프라임 사태에 맞춰 전 재산을 모두 투자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것도 폭락장에요.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시켰죠.”
김지훈 회장이 흥미진진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 뒤로부턴 승승장구하셨더군요. 석탄 선물, 위안화, 엔화, 부동산 등 종목을 가리지 않으셨더군요. 그런 기록을 몇 번이나 살펴본 저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론이라면?”
“이 회장님은 상승보단 폭락에서 기회를 잡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
“그 폭락 대부분은 이 회장님이 직접 만들어 낸 폭락이고요. 아닙니까?”
“…놀랍군요.”
내가 감탄하자 그가 더욱 신나 하며 말했다.
“그룹의 정보망을 가동해 알아본 결과, 일본은 지금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다만, 엔화라는 기축통화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뿐이죠. 그리고 이 회장님은 그 엔화를 무너뜨릴 비책을 가지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정확했다. 일본은 지금껏 엄청난 국채를 발행해 왔다.
그리고 그 국채의 상당 부분을 엔화를 찍어 내어 막고 있었다.
물론, 국채를 사들인 쪽에선 황당하기 그지없는 행위다.
기껏 국채를 매입했는데 엔화의 가치가 떨어져 버려 수익이 줄어드니 말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국채는 꽤 인기가 있었다.
엔화 자체가 금 다음의 안전 자산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머지않아 깨질 거다.
그 엔화의 보증 수표인 일본 경제의 파멸이 머지않았으니까.
김지훈 회장 역시 이런 사실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계획의 핵심을 이렇게 날카롭게 짚지는 못했을 테니까.
“정답입니다.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요.”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만 예상한 건 아닐 테니까요.”
“누가 또 있습니까?”
그때, 뒤에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날세.”
바로 이강진 회장이었다.
최우현 부회장이 밀고 있는 휠체어를 탄 그가 입을 비틀며 말했다.
“나도 그 정도 통밥은 되거든.”
그 모습을 본 김지훈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언제부터 친했다고 마중이야?”
말은 저렇게 했지만 싫지는 않은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시죠. 유 마담 솜씨가 전보다 나아진 거 같습니다. 안주가 아주 맛있어요.”
“그래?”
최우현이 이 회장을 부축하여 안쪽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내게 눈인사를 하고 별채를 빠져나갔다.
이 회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덕분에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겠구먼.”
“마지막이라뇨. 이렇게나 정정하신데.”
“내가 내 몸을 모를까.”
그가 눈을 돌려 김 회장을 바라봤다.
“어떤가? 이리 만나 보니.”
“형님께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이유를 알 거 같습니다.”
“겨우?”
들려오는 반문에 김 회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무서웠습니다.”
“그치?”
“네, 십 년 뒤, 늦어도 이십 년, 세계의 왕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계의 왕? 내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이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얘기가 맞아.”
“저는 군림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서운 거지. 욕심 없이 이만큼이나 이뤄 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욕심을 가지게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로스차일드만 깨부수면 끝이다.
거기까지만 이루고 더는 누굴 죽이는 것도,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하지 않을 거다.
그저 빨리 끝내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런 내 바람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자네가 싫다 해도 세상이 가만두지 않을 걸세.”
“저를 말입니까?”
“그래.”
“모든 게 끝나면 산속으로 들어가서 농사나 짓고 살 겁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요.”
“크흐흐, 해 보게. 소용없을 테지만.”
“그건 그때가 돼 봐야 알겠죠.”
더는 같은 주제로 말하기 싫어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두 분께서 제가 부른 이유를 짐작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설명하기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에잉, 나를 뭘로 보고.”
“이하 동문입니다.”
피식.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비슷한 연배와 위치, 분명 평생을 경쟁자로 살았을 텐데, 오래된 친구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관건은 돈입니다. 얼마나 투자하실 생각입니까?”
“그거야 투자의 성공 확률과 예상 수익이….”
이 회장의 반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공 확률은 100%입니다. 수익률은 뚜껑을 열어 봐야 알겠지만, 최소 300% 이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
두 노인이 놀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 속에서 나는 홀로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두 사람에게 충분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한 번의 결정으로 그룹의 명운이 갈리는 만큼 수십 번을 생각해도 모자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은 김 회장에 의해 먼저 깨어졌다.
“아까 제가 준비를 마쳤다고 했죠?”
“네.”
“아무래도 실언을 한 거 같습니다.”
“이번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아쉽기는 하지만 상관은 없다.
지금 첸이 준비한 실탄만 하더라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김 회장은 그런 내 생각과는 전혀 반대되는 말을 했다.
“아뇨, 함께할 겁니다. 돈 버는 일인데 무조건해야죠. 대신 판을 좀 키워 보려 합니다.”
“…판을 키운다면요?”
“원래 그룹의 가용 자금인 9억 불을 준비했습니다만, 지금 이 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저희 일가와 GL 그룹이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려고 합니다. 자세한 건 따져 봐야 하겠지만, 300억 불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혹여라도 제가 실수하면 어쩌시려고….”
“알거지밖에 더 되겠습니까? 다만 안 그러길 바라야죠.”
그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고 반대쪽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00억. 나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걸세.”
둘이 합쳐서 700억 달러.
생각보다 큰 액수에 놀라고 있을 때 이 회장의 말이 들려왔다.
“내 껀 다 잃어도 돼. 어차피 물려줄 사람도 없거든.”
“아이고, 잃으면 죽여 버릴 거 같은 표정으로 그런 말씀 해 봤자 안 속습니다.”
“걸렸구먼.”
“그리고 물려줄 사람이 왜 없습니까? 엄연히 따님이 있는데요.”
“싫다 않나.”
“일단, 물려주면….”
“받자마자 기부한다더군.”
“푸핫. 콜록콜록.”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사레가 들렸다.
이 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좋겠으이. 물려줄 아들이 있어서.”
“허허, 대신 최 부회장이 있지 않습니까.”
“나 죽으면 떠날 사람이야.”
이 회장이 나를 은근히 바라봤다.
눈에서 어떤 열망이 보이는 게 나를 아직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싫습니다.”
물론, 간단한 거절로 그의 열망을 짓밟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일본의 숨통을 끓을 비책이 뭔가?”
“있습니다. 그런 게.”
“어허,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시린 무릎 부여잡고 왔는데 이 늙은이를 이리 우롱해서 쓰겠나?”
잠시 웃다 이 회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미국입니다.”
“미국?”
“네, 미국에서 일본을 압박할 겁니다.”
김 회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이라면 일본의 절대적인 우방이 아닙니까?”
“세상에 절대적인 게 있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만….”
“다신 써먹을 수 없는 패를 썼습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요.”
월가의 은행들로 협박하는 건 더는 써먹을 수 없는 패다.
미 정부에 바보들만 모여 있지 않고서야 충분히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어야 한다.
그런 사정을 짐작했는지 앞에 있는 두 사람이 경건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다시 없을 수익을 얻을 겁니다.”
매우 자신 있게 말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요.”
***
화정각에서의 만남이 끝나고 며칠 뒤.
상현과 GL에서 각각 310억과 400억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왔다.
이를 확인한 첸이 메시지를 보내 왔다.
[입금 확인했습니다. 그나저나 남의 돈 불려주는데 수수료를 좀 떼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는 이 정도 금액에 놀라지도 않는 첸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움직였다.
[JP모건과 BOA의 회장, 스티븐 첸, 일본은 곧 몰락할 것이고 자사의 은행은 고객의 돈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 투자한 돈을 모두 회수할 것.]
[BOA의 부사장, 에런 스미스, 모두가 엔화 폭락에 투자해야 할 때.]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물론, 반박 기사가 쏟아지긴 했지만, 글쎄?
모든 일이 끝나면 세상은 첸과 첸이 이끄는 두 은행을 추앙하게 될 것이다.
첸은 월가의 오라클이고 JP모건과 BOA는 고객의 돈을 끝까지 지켜 낸 은행이라고.
며칠 뒤.
[지금 곧 기자회견을 시작합니다.]
트럼프에게서 기다리던 연락이 들어왔다.
저번 소동 이후로 잠시 소원했던 관계는 풀린 지 오래다.
그는 내 돈을 요구하고 나는 그의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왕 하는 거 화끈하게 부탁드립니다.]
잠시 기다리자 CNN 뉴스에서 백악관 브리핑 룸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트럼프가 커다란 덩치를 이끌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기자 회견장으로 들어왔다.
찰칵. 찰칵.
그를 향해 사정없이 터지는 플래시,
[이거 눈이 부셔서 회견을 못 하겠군요. 돌아가서 선글라스라도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그의 농담에 기자 회견장에 즐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부는 금일부터 동맹국 간의 무역 분쟁을 일삼고 있는 일본에 경제 제재 조처합니다. 이건 무역과 금융에 제한된 조치이며 군사적 동맹은 유지됩니다.]
트럼프의 입에서 폭탄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