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일본, 한국에 추가적인 조치 예고.]
우리 쪽의 강경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더욱 강하게 나왔다.
이때다 싶었는지 일본의 극우 단체들은 이런 분위기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며 혐한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지민당은 그런 움직임에 불을 붙였다.
소속 국회의원들이 극우 단체가 벌이는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일본산 물품들에 대해 불매 운동이 진행 중이란 소식이 퍼지면서 이러한 시위는 갈수록 확산되어만 갔다.
일종의 악순환이 생긴 것이다.
‘그래 봤자, 지들 손해지.’
이번 일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나다.
마이크론의 모든 생산량을 떠맡았고 GL과 상현이 버틸 수 있도록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주문을 넣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행하여 노리는 바는 하나였다.
세상 모든 반도체를 내 손에 틀어쥐는 것.
‘쌀이나 다름없지.’
이제는 식량과 석유와 같은 필수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 물건을 틀어쥐자, 세계 각국은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나를 비롯한 최우현과 GL의 김 회장에게 반도체 생산을 하라며 설득했다.
특히, 제조업 강국인 독일을 포함한 몇몇 국가에서는 소재 공급을 자신들이 책임지고 해 줄 테니 제발 공장을 돌리라며 이지석에게 외교 사절까지 보낼 정도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경청한 뒤, 딱 한마디만 해 줬다.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공장의 재가동은 없을 거라고.
그제야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린 각국은 외교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연일 일본에 대한 비판을 쏟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자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업들에 세무 조사를 실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백기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한국에 대해 극단적인 여론을 형성한 게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혐한 여론과 더불어 극단적으로 지지율을 상승시킨 자민당이다.
이제 와서 백기 들고 물러난다면 어떤 후폭풍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즉, 싸우자니 괴롭고 후퇴하자니 불가능한,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쪽도 괴롭지 않은 건 아니다.
한국제철을 인수한 뒤 철강 사업을 크게 키운 오션은 일본으로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제철 부문의 매출이 반으로 줄었다.
그나마 중국의 내전으로 철강 수요가 뛰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적자를 감수해야 했을 거다.
반면, 미리 자사에서 사용할 반도체를 쟁여 놓은 상현과 GL은 상황이 괜찮았다.
반도체 부족으로 인해 GE 같은 경쟁 상대들의 생산량이 극단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였다.
일본과의 마찰이 생긴 지 삼 개월.
환율은 치솟아 올랐고 물가는 빠르게 올라갔다.
그로 인해 실질 소득이 줄어들어 경기 지수가 IMF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마음 같아선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이라도 동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진 참아야 하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일본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아껴 놔야 했다.
그렇게 버티는 것으로 결론을 내던 차.
미국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것도 약간의 악연인 인연이 말이다.
“그러네.”
찾아온 손님은 바로 CIA의 제리.
영국에서 아토즈사의 직원들을 납치하여 나와 부딪친 놈이다.
“웬일이야? CIA의 팀장 나부랭이가.”
“크흠, 승진했습니다. 이제는 대외 조정 국장이죠.”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부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제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중국에 개입하기 위해 최근 신설된 부서입니다. 최근 당신이 보내 준 대원들이 저희를 도와주었죠.”
“그렇군. 자, 그런 대단한 곳의 국장 나부랭이가 이곳까진 웬일이지?”
내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꿋꿋이 할 말을 계속했다.
“덕분에 저희 요원들이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영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알면 됐어.”
“하하.”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제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찾아온 이유는?”
내 독촉에 그가 빠르게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경고?”
“네, 어쩌면 엘의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경곱니다.”
내 목숨을 노린다라.
새삼스럽게.
“해 보라지.”
“엘,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한둘일까? 여태 내 목숨을 노린 놈들이.”
내 말에 제리가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도 알 것이다.
나를 방해하는 놈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당장 그 자신도 된통 당한 적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중국의 경우 국가 주석이 암살당했으니 말이다.
잠시 침묵하던 제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NCS(미국 안전보장 회의)에서 말이 나왔습니다. 지금 엘의 움직임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요.”
“계속해 봐.”
“엘이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이들입니다. 안보에 관해선 NCS가 가진 권한이 대통령을 넘어서는 부분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글쎄? JP모건과 BOA가 리비아로 소재지를 옮겨도 그럴 수 있을까?”
나를 적대하면 월가를 결딴내겠다는 협박에 제리가 입을 다물었다.
당연했다.
금융이 모든 산업을 지배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게 바로 월가의 대형 은행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 JP모건과 BOA가 월가에서 빠져나간다면 재앙이나 다름없다.
“가서 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심부름꾼 시키지 말고 직접 하라고.”
“…알겠습니다.”
경고를 가장한 메신저에게 축객령을 내린 지 한 시간.
-NCS의 총책임자, 마이클 더글라스입니다.
심부름을 시킨 쪽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얘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저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요?”
-작은 오해가 있는 거 같군요. 우리는 당신을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안보를 우선시하는 것뿐이죠….
“저는 그 안보를 위협하는 잠재적인 적이고요.”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반도체 때문이 맞습니까?”
-정확합니다. 당신이 반도체 수량을 틀어쥔 덕에 미국의 방산 산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곧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일입니다.
“일본이 먼저 시작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미국이 안보를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군요. 포기하는 수밖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을 잘못 이해했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립니까? 저는 미국을 포기한다는 소리였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이클이라고 하셨나요? 조만간 JP모건과 BOA가 타국으로 본사를 이전한다는 기사를 보시게 될 겁니다. 기대하고 계세요.”
-엘? 엘!
뚝.
전화기의 전원을 꺼 버렸다.
안보?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안보를 핑계로 한 단순한 협박이다.
죽이려면 진즉 요원들을 파견했겠지 예고를 뭐 하러 하겠는가.
‘트럼프도 알고 있었겠지.’
명색이 대통령이다. 그런 그가 NCS의 움직임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이토록 강경하게 나온다는 건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나로 인해 중상을 입은 미국 경제다.
그걸 겨우 회복세로 돌려놨는데 이제는 제조업이 흔들리니 미칠 노릇일 거다.
하지만.
그래도 백악관의 사기꾼에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깐부라고 생각했는데.’
***
BOA의 회장실.
소파에 앉은 첸이 오연하게 앞에 있는 중년 여성을 바라봤다.
“저도 죽이시지 뭐 하러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스티븐, 오해예요. 저희는 단순히 말로만….”
쾅!
평소 화를 내는 법이 없던 첸이 테이블을 발로 찼다.
“하! 말로만요? 그럼, SC의 수장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한 사실이 없다는 겁니까?”
“…….”
첸이 앞에 있는 부통령, 로렌스에게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없으니 돌아가세요.”
“…첸.”
“뭐 하십니까? 안 일어나시고? 명색이 부통령이어서 참고 있는 겁니다. 계속 버티시면 경비를 불러서 끌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반목한다고 이익이 되는 게 있나요? 차라리….”
“저기요. 부통령님, 저는 평생 돈만 생각하며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돈보다 중하게 여기는 게 바로 엘입니다. 당신들은 그런 엘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했고요. 제 말이 틀립니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럼 결론 났군요. JP모건과 BOA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로 리비아로 본사를 이전합니다. 막아 보시려면 해 보세요. 두 은행을 갈가리 찢어서 해외로 매각해 버리면 되니까요.”
첸의 말을 들은 로렌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허세가 아니다.
다른 이들은 어쩔지 몰라도 눈앞에 있는 스티븐 첸과 한국에 있는 엘은 진짜 저지를 사람이다.
부통령으로서 그들의 행보를 확인하고서 낸 그녀의 결론이다.
결국, 어떻게든 앞에 있는 남자를 설득해야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엘을 설득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뭔가 명분이라도 있어야지 설득하지 않겠는가.
보상? 돈으로?
로스차일드와 맞먹는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엘이다.
포브스지에서 조사한 것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미 정부에서 파악한 내용이니 정확하다.
그런 사람에게 돈을 줄 테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건 자존심을 뭉개는 일밖에 되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법으로 강제할 수도 없다.
JP모건과 BOA의 본사 이전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물론, 막으려면 막겠지만 첸의 마지막 말이 걸린다.
‘갈가리 찢어서 해외로 매각한다?’
상상도 하기 싫다.
두 은행이 가지고 있는 미국 기업들의 지분이 타국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즉, 미국의 알토란 같은 기업에 하이에나 같은 외국 자본들이 침투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생각하던 로렌스는 결정했다.
솔직하게 나가기로 말이다.
“스티븐, 그래요. 인정할게요. 저희가 엘을 협박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건 아니지 않나요? 단순히 말로 주고받은 싸움이 이렇게까지 비화되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혹시 압니까? 저도 말로만 이러는지.”
첸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미 정부 주도로 엘이 공격당했으면 지금쯤 백악관은 JP모건과 BOA를 비롯해 수많은 미국 기업들의 파산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방법이야 많으니까요.”
“그건 범죄예요. 몇백 년 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될 수 있어요.”
“당신들이 한 건 범죄가 아니고요? 제게 감옥은 무서운 곳이 아닙니다. 엘이 없는 세상에 미련도 없고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이해해 줄 겁니다.”
로렌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목을 내놓고 처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녀의 제안에 첸이 자세를 바로 앉았다.
“엘과 저는 일본의 항복을 원합니다. 과거 태평양 전쟁에서처럼 무조건적인 항복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