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청와대가 연락한 이유는 역시나 일본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지석은 본격적인 대책 수립에 앞서 나와 상의를 하려 했는데.
그와 상의하던 나는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이지석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 나라, 게다가 역사적으로도 감시의 눈길을 거두면 안 되는 곳이 일본이다.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닌 상현의 최우현이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다.
그랬다면 최소 장관급에게 연락이 들어갔을 터.
그런데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지석은 오늘에야 일이 터진 걸 알았다고 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갑자기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지석도, 그 뒤에 있는 비서실장도 말이다.
그리고.
‘저 그림.’
전에는 없는 그림이다.
예술에 조예가 없는 내가 봐도 값어치가 높다는 걸 알 만한 그림이다.
평소, 검소하기로 유명한 이지석을 생각해 봤을 때, 이 방에 있는 게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이지석이 웃으며 말했다.
“박지호 화백의 작품입니다.”
예술에 아무 관심이 없는 나 같은 놈도 알 정도로 유명한 화가다.
당연히 값어치 역시 보통이 아닐 거다.
“어디서 들어온 겁니까?”
“박지호 화백 본인이 청와대에 기증했습니다. 꼭 제 집무실에 걸어 놓아 달라고요.”
“…그렇군요.”
다른 곳도 아니고 대통령실에 걸리는 그림이다.
당연히, 들어올 때 모든 검사를 마치는 거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림이 설치되고 나서 수작질을 했다면?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의심이 꼬리를 물면 끝없이 일어나는 법이다.
최소한 뭐라도 하나 잡고 난 뒤에 뒤져 보는 게 옳기에 그림에 대한 의심은 접어 두기로 했다.
그렇게 이지석과 이번 일에 대한 상의를 계속했다.
“당사자인 SC와 상현, GL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일단,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대책을 세우셨는지 알려 주십시오. 정부 차원에서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제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민간 차원에서 대응할 테니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함께 헤쳐 나가자고 한 건 회장님 아니셨습니까?”
“지금은 괜찮습니다. 힘들어도 우리끼리 극복하겠습니다.”
이지석은 믿지만, 청와대는 믿을 수 없다.
지금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이지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비서실장이 발끈했다.
“이 회장님! 지금 이 문제가 재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지석이 손을 들어 올려 비서실장을 제지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사안이 사안인지라 비서실장이 흥분한 거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지석이 사과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비서실장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반도체 산업을 위시한 전자 산업은 대한민국의 동력입니다. 세계 어느 정부도 자국의 성장 동력이 삐걱거리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거부해도 강제로라도 개입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조용히 도움을 받으라는 말도 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프락치가 없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다시 모여 상의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다시 한번 완곡히 거절의 뜻을 밝히자.
“청와대를 믿지 못하시는 거 같군요.”
노련한 정치인이 된 그가 핵심을 짚어 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내 동의에 비서실장이 다시 한번 발끈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만하게.”
그를 진정시킨 이지석이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틀 뒤, 엠바고가 풀립니다. 그때까지 우리끼리 대책을 강구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는 저희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청와대를 나서고 이틀 뒤.
일본이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청와대에서 걸어 놓은 엠바고가 풀린 것이다.
또한, 그 시간 동안 대책을 세우기로 했던 청와대는 연락이 없었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다.
정권 내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응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내가 나서서 해 줄 건 없다. 아니 뭐라도 해 줘선 안 된다.
아무리 이지석이 내 도움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하더라도 내가 개입하는 순간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쉬울 건 없다.’
이렇게 되면 국가적인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
조금 힘은 들겠지만,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충 정리하고 나서려던 찰나.
지이잉.
전화기가 울렸다. 액정을 보니 최우현 부회장이었다.
“예, 부회장님.”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일본 놈들이 기어이 일을 내는군요.
“어차피 예상하던 일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막상 다가오니 심란해서 말입니다.
최우현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영자란 원래 이렇다. 앞길이 가시밭길인지 꽃길인지 모른 채 수만의 무게를 지고 걸어 나가야 하니까.
특히, 이번 일처럼 그룹의 사운이 걸려 있을 때는 무거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최우현에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을 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건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겁니다.”
***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주, 보이시.
18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이 작은 도시에 첸이 방문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움직였다.
수행원들과 함께 움직인 첸이 향한 곳은 바로 마이크론.
몇 없는 미국의 반도체 생산 기업이자 점유율 기준 5위에 안착해 있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강자다.
“휴우.”
첸이 한숨을 쉬며 마이크론의 본사 건물을 바라봤다.
솔직히 귀찮았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일까지 떠맡는다는 게.
‘그래도 엘의 부탁이니까.’
마음을 다잡은 그가 정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안쪽에 있던 마이크론의 CEO, 산제이 메로트라가 첸을 맞이했다.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스티븐 첸입니다.”
두 사람이 악수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다만 시선의 온도가 달랐다.
첸은 메로트라를 날카롭게 훑었지만 메로트라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첸을 바라봤다.
“올라가시죠. 좋은 홍차를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사장실로 올라가 홍차를 맛본 첸은 깜짝 놀랐다.
‘맛있다.’
준비한 홍차가 평소 차를 싫어해 입에도 대지 않는 첸을 사로잡을 만큼 깊은 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어떠십니까?”
“향이 굉장히 깊군요. 맛있습니다.”
“제 고향에서 가져오는 겁니다.”
“고향이 어딥니까?”
“인도의 칸푸르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10살까지 살았죠.”
“…놀랍군요.”
첸이 감탄했다. 홍차가 인도산이라는 사실에 감탄한 것이 아니다.
인도인이 이만한 위치까지 오른 것에 감탄한 것이다.
아무리 미국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지만.
그건 백인들이나 해당하는 말이다.
타국 출신 유색 인종, 특히 아시안에게 성공의 문은 굉장히 좁았다.
첸만 하더라도 골드만삭스 재직 당시 엄청나게 많은 차별을 당했다.
실적을 쌓을 기회, 실무를 경험할 기회 등 모든 경우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기회만 부여되었다.
그런 차별들을 뚫고 이렇게나 성공한 메로트라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이 샘솟았다.
“저야말로 스티븐의 활약을 지켜보며 감탄했습니다. 아시안이 JP모건과 BOA의 회장이라니요.”
“진짜 대단한 사람은 엘이지 제가 아닙니다.”
“그 역시 대단한 사람입니다.”
메로트라가 앞에 있는 홍차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경영자로 보면 스티븐이 더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글쎄?’
과연 엘을 겪게 되면 저런 말이 나올까?
첸이 피식 웃었다. 메로트라는 엘의 진가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영? 사람을 다루는 게 경영이다.
그리고 엘은 그 누구보다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
신종민은 한국의 SC 오션을 아시아 최고의 중공업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최효석은 리비아란 한 국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제니가 맡은 SC 벤처는 미국 증권가에서 말이 나올 만큼 탁월한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모두가 십 년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또한, 지금 이 자리만 봐도 그렇다.
엘이 자신을 콕 집어 보낸 협상 자리, 도무지 이유를 몰랐지만.
메로트라가 자신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지 않은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상대방의 심리까지 분석하다니. 그것도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말이다.
부르르.
첸의 팔에서 닭살이 돋았다.
“그나저나 칩셋을 구매하려고 찾아오셨다고요?”
대충 인사치레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메로트라가 본론을 꺼냈다.
“맞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월가의 은행에서 반도체 칩셋을 구매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가격이 오를 걸 대비해 투자하려 하는 겁니까?”
마이크론의 CEO인 만큼, 메로트라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소재 강국 일본이 한국으로의 반도체 소재에 대해 수출을 금지했다.
그 말인즉슨, 생산이 주춤할 수밖에 없고 이는 반도체의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메로트라는 바로 이 점을 들어 첸에게 의도를 물었다.
“투자가 아닙니다.”
“그럼 대체….”
“마이크론은 이유를 알아야만 판매합니까?”
첸이 날카롭게 질문했고 메로트라가 그제야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월가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운 점령자다.
그런 사람을 고향 후배 보듯이 협상에 나섰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행태인가.
“물론 아니죠. 이유야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좋은 가격에 많은 물건을 판매하면 됩니다.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지금 칩셋 가격이 많이 내려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으로 소재 수출을 금지시켰습니다. 월가를 책임지시는 분이니 수요 공급의 원칙을 모를 리 없겠죠?”
“글쎄요? 과연 기대만큼 상승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중국이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대만까지 생각하면 셋으로 갈라진 거죠. 수요가 많이 하락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도 오를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밀고 밀리는 가격 협상.
첸은 수요의 하락으로 가격 변동이 없을 거라 주장했고 메로트라는 공급의 하락으로 가격이 오를 거라 주장했다.
그렇게 약간 긴 가격 협상이 계속되었고 메로트라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시세에 17%를 얹는 건 어떻겠습니까?”
시세에 17%를 추가하는 조건.
나쁜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첸은 그런 메로트라의 조건에 고개를 저었다.
엘이 지시한 게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고정값으로 계약하라고 했다.’
엘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다.
그런 그가 고정값으로 계약하라고 한 건 앞으로 반도체의 가격이 치솟는다는 뜻이다.
“지금 D램 가격이 4달러가 약간 안 되지요?”
“맞습니다.”
“앞으로 어디까지 오를 거라 예상하십니까?”
“…6달러 20센트까지 보고 있습니다.”
마이크론 기획실에서 예측한 가격은 5달러 후반.
하지만, 노련한 CEO인 메로트라는 순발력을 발휘해 가격을 올렸다.
“마이크론에서 생산하는 모든 품목에 대해 현 시세의 50%를 더하겠습니다. D램같은 경우 6달러 쯤 되겠군요.”
메로트라가 테이블 밑에 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수량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량입니다.”
“네?”
“마이크론에서 생산되는 모든 반도체를 구매하겠습니다.”
잠시 후.
첸과 계약을 마친 메로트라가 만세를 불렀다.
1년간 생산하는 모든 칩셋을 6달러란 금액에 계약했다.
마이크론 창립 역사상 최고의 계약이 될 거라 생각한 메로트라가 내년에 받을 인센티브를 예상하며 다시 한번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메로트라는 몰랐다.
자신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이 계약으로 인해 모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