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싫습니다.”
GL 가의 둘째 딸. 김하선의 프로필을 본 신종민의 대답이었다.
“아니 왜요?”
“일이 너무 바빠서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요새는 휴일도 꼬박꼬박 챙기시지 않나요?”
예전이라면 바쁘다는 신종민의 말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은 아니다.
SC의 모든 업무를 전산화하기도 했고 인력이 충분해 신종민의 부담이 많이 줄었다.
그 덕에 신종민은 여유를 찾았다.
주 7일 근무가 6일, 6일 근무가 5일로 줄었음은 물론 여름에 따박따박 휴가까지 챙길 정도로 말이다.
“휴일은 오롯이 저를 위해 써야 합니다. 평일 내내 고생하면서 일했는데 그 정도는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인드면 평생 혼자 사셔야 할 겁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신종민이 회장실을 나섰다.
나도 비혼주의자지만 이 사람은 더했다.
나야 젊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38세, 결혼 적령기를 한참이나 지나친 그의 나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직업은 SC오션의 부회장에 연봉은 전년 기준 220억이었다.
학력이야 하버드 출신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외모 역시 준수하다.
180이 약간 안되는 키에 지적인 외모, 유일한 약점인 과로로 인한 피부트러블은 최근 극복했다.
이런 완벽한 신랑감이 회사에 처박혀 일만 하다니.
이건 국가적으로 손해가 아닌가. 안 그래도 저출산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신 행장님, 오랜만입니다.”
본인을 공략하지 못하면 그의 가족들을 공략하는 수밖에.
그렇게 신영하 은행장에게 신종민의 설득을 부탁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덜컹.
신종민이 돌아왔다.
그것도 굉장히 화가 난 얼굴로.
“아니, 제 개인사를 아버지한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아, 그거요? 예전에 좋은 혼처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셔서 말씀드렸습니다.”
“덕분에 황금 같은 주말을 날려 먹게 생겼습니다.”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여태 애인하나 만들지 않은 신 부회장 탓이지.”
“그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나를 보던 신종민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시잖아요?”
단순히 신종민의 결혼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 GL과의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카이닉스는 GL이 아닌 KS의 소유였다. 원 역사대로라면 앞으로도 쭉 KS의 소유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회차는 달랐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2년 전에 KS가 카이닉스를 GL에 매각해버린 것이다.
당시 미국에 있던 터라 따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한국에선 난리가 났다.
우리는 물론 상현, 송양, GL이 치열한 인수전을 펼쳤고 승자는 GL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 제철을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력이 없었고 송양은 자금이 부족했으며 상현은 독과점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또한, 카이닉스의 탄생이 GL에서 건립한 반도체 공장에서 시작한 것도 한몫했다고 들었다.
힘들게 카이닉스를 인수한 GL은 막대한 돈을 R&D와 설비증설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2년.
카이닉스는 비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현에 이어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점유율 2위를 차지했고 막대한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개월 되지 않아 일본에서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같은 필수적인 소재 수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재고는 바닥을 보였고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공장이 멈추어 설 게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수출하지 않는다?
이건 엄청난 부담에 될 수밖에 없다.
물론, GL은 우리 계획에 동참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GL에 막대한 금액의 주문을 넣는 것으로 보조했다.
하지만, 계속 버틸 수 있을까?
일 년이 되고 이 년이 될 때까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당장 눈앞에 수천억이 왔다 갔다 하면 눈이 획 돌아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배신은 그 어느 때보다 뼈아플 수밖에 없다.
상현 전자, GL카이닉스, 그리고 TSMC까지.
그 누구도 일본에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아야만 항복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혼담이 들어왔다.
자고로 정략결혼만큼 동맹을 굳건히 만드는 것도 없는 법.
절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재밌잖아.’
약간은, 아니 매우 아주 즐거웠다.
평소 딱딱하기만 한 신종민을 놀려 먹는 일이 이렇게나 재밌을지 몰랐다.
“차라리 회장님께서 나가시는 게….”
신종민이 하다 하다 안 되겠는지 대타로 나를 지목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쪽에서 신 부회장을 딱! 지목했는데요?”
“끄으응.”
“게다가 저보다 연상이고요.”
김하선의 나이 34세.
일찍 짝을 맺어주는 재벌가의 가풍을 생각했을 땐 적령기가 한참은 지났다.
“그리고 보니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네요.”
“그거 다 낭설입니다.”
“이미 행장님도 알게 되었는데 그냥 나가시죠? 아마 지금쯤 행장님이 GL의 김회장님께 전화 넣고 계실 겁니다. 아까 연락한다고 했거든요.”
끝내기 KO.
결국, 신종민이 포기했다.
집안끼리 이야기가 오고 갔으니 이젠 무를 수 없다고 느낀 것이다.
“알았습니다. 만나보겠습니다. 대신, 마음에 안 들면 그 뒤는 없습니다.”
“당연하죠.”
뒤가 없을 리가 없다.
김하선을 만난 신종민은 그녀에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거다.
왜냐고?
‘이쁘니까.’
자고로 이쁘면 장땡 아니겠는가.
***
상현의 20개가 넘는 계열사를 총괄하는 그룹의 회장실.
국가권력의 정점인 공간이 청와대라면.
자본시장의 정점인 공간은 이 방이었다.
그런 상징적인 장소를 만든 사람은 상현 그룹의 창업주이고 그 자리를 이강진 회장이 물려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강진 회장을 20년 넘게 보필한 최우현 부회장이 회장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예예, 아무쪼록 한 번만 도와주시면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넵, 들어가십시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최우현이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빌어먹을 새끼, 여태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만데.”
그가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던졌다.
통화 상대는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다.
불화수소 재고가 바닥을 보였으니 국가 차원의 도움이라도 받기 위해 연락했다.
문제는, 상대방이 비협조적이라는 거다.
일본과의 관계가 어떻고 저쩌고.
지금 일본을 자극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일단 한번 알아보겠다.
이번 통화에서 얻은 답변이었다.
최우현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앉았다.
“토착 왜구 새끼.”
이강진 회장이 일선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
아니, 건강상 문제가 없었다면 감히 이러지는 못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말부터였다.
상현이란 이름의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했을 때가.
그가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부터 말이다.
정·재계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이강진 회장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해.’
이강진 회장이 그렇게 되고 SC에 추월당한 지가 오래니 얼마든지 저럴 수 있다.
그래도.
‘가만둘 순 없지.’
보여 줘야겠다.
우리 아직 안 죽었다고.
상현은 건재하다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짓던 최우현이 책상 옆 호출 벨을 눌렀다.
“전략실, 전부 내 방으로.”
잠시 후.
하나같이 기세가 있는 남자들이 최우현의 앞에 섰다.
30대 40대 가릴 것 없이 빳빳한 정장을 입은 남자들에게 최우현이 지시했다.
“산자부 장관, 바꿔줘야 할 때가 됐어. 이번 사태만 마무리되면 곧바로 옷 벗길 수 있게 탈탈 털어. 먼지 하나라도 나오면 언론에 터뜨리고.”
“예.”
최우현의 지시에 한 사람이 나섰다. 전략실장이었다. 최우현이 전략실장으로 있었을 때 부실장을 맡았던 남자다.
“그리고, 여의도 한번 훑어봐. 말 안 듣는 놈, 그중에서 갱생이 어려울 것 같은 놈들 추려서 명단 만들어. 이번 기회에 수첩 좀 써먹어야겠다.”
“…후폭풍이 클 거라고 봅니다.”
최우현이 말하는 수첩은 그동안 돈 먹인 정치인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는 자료를 뜻했다.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후폭풍이 거셀 수밖에 없고 전략실장은 이 점을 지적했다.
“징역 한 번 더 살고 나오지 뭐.”
“안됩니다! 차라리 제가….”
“농담이야. 그렇게까진 써먹을 생각 없다. 그냥 협박해서 기강 좀 세워보려고 하는 거다. 예전처럼 들이박고 시작하진 않아.”
전략실장이 그제야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최우현이 그런 전략실장을 보고 피식 웃더니 질문을 던졌다.
“알아보라고 했던 건?”
“미국과 독일, 영국 쪽을 훑고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협상에 들어가겠다?”
“네, 남는 재고라도 싹싹 긁어오려고 합니다.”
빠르고 꼼꼼한 일 처리.
최우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고뿐만 아니라 다른 쪽에 계약된 수량도 건드려봐. 안된다고 하면 위약금에다 얼마 더 쳐준다고 제시해봐. 혹시 아냐? 어디 하나 걸려들지.”
“예, 알겠습니다.”
“나가서 일들 봐. 끝나고 소주 한잔하고 싶은 놈들은 전화하고.”
금요일 오후다.
당연히 전화할 놈들이 있을 리 없지만, 한번 던져 봤다.
기러기 아빠 3년 차인 최효석은 외로웠다.
***
신종민의 소개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며칠 뒤.
모처럼 업무가 없는 날을 맞이했다.
간단히 씻고 믹스 커피를 한 잔 타 먹기 위해 물을 끓이던 차.
덜컹.
“하이.”
리우가 들어왔다.
“왜 왔냐?”
“게임 좀 하려고.”
리우가 능숙하게 TV와 게임기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
내가 어이없이 보고 있자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패드를 들어 올렸다.
“한 판 할래?”
“그 전에, 여기까지 와서 게임을 하는 이유가 있냐?”
“집에 TV가 없어서.”
“있잖아. 효석 형님이 쓰던 거.”
리우는 현재 줄리아와 함께 이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다.
원래 최효석이 살던 곳이지만 그가 리비아로 떠난 뒤 리우가 차지했다.
“줄리아가 애니메이션 보고 있어.”
“…그래서 여기로 왔다?”
“응.”
이놈을 어쩌면 좋냐.
“안 할 거야?”
리우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게임 로딩이 끝났는지 TV에서 익숙한 격투 게임의 로고가 보였다.
“점심 내기?”
“미산각?”
“좋지.”
리우가 내민 패드를 잡았다.
삼십 분 뒤.
“으허!”
패배한 리우가 울부짖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도 참 많이 바뀌었다.
줄리아가 살아있어서일까?
살인에 미친 싸이코패스가 지금은 사람처럼 화낼 줄 알고 분해할 줄 안다.
가끔가다 치는 사고의 수위도 많이 낮아졌다.
“삼선짬뽕. 깐풍기 추가하는 거 잊지 말고.”
“악독한 싸장.”
“꼬우면 이기든가.”
내가 잘해서 이긴 건 아니다. 솔직히 실력만 보면 리우가 나보다 낫다.
그런데도 내가 이긴 이유는.
게임 패드 때문이다.
시베리아 불곰과 같은 덩치를 가진 리우의 손가락이 워낙 두꺼워 버튼을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리우가 억울한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줄리아 불러온다.”
그렇게 점심 먹을 준비를 하던 차.
지이이잉.
주머니에 넣어뒀던 전화기가 울렸다.
청와대였다.
‘올 게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