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다.”
질리언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창고에 금은보화를 쌓아 놔 봤자 뭐 하겠는가.
가장 중요한 가업인 씨티 그룹과 골드만삭스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만약, 이대로 그 두 가업이 날아가면 월가에 미치는 영향력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빌더버그의 우두머리 행세도 하지 못한다.
어디 그뿐일까.
여태 했던 치팅에 가까운 투자도 하지 못한다.
시장을 주도하고 교란하여 다른 투자자들의 등골을 빼먹은 그런 투자 말이다.
즉, 가문의 부의 원천이 사라지게 되는 거다.
당연히 질리언이 격분하여 프랭크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럼 손을 놓고 있으란 말씀입니까?! 씨티가 날아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아시지 않습니까?!”
“안다. 아니까 가만두라는 것이다.”
“아시면서 가만히 두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격양된 질리언의 질문이 큰 소리를 냈지만, 프랭크는 여유로운 얼굴로 답을 줬다.
“네 말대로 가만히 손 놓고 있으면 안 되겠지. 아무 대책 없이 말이다.”
“...대책이 있는 겁니까?”
“이미 일은 터졌다. 7년 전을 생각하면 해결하기 위해 가문의 부를 절반쯤은 쏟아부어야 하겠지. 어쩌면 더 소모될 수도 있다. 저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까.”
“…….”
“한데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과연 이게 최선일까? 몇십 년간 모은 돈을 쏟아부어 막는 것뿐인 선택이?”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있다. 더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건 에드먼드가 설명해 줄 거다.”
질리언의 시선이 테이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에드먼드에게로 향했다.
에드먼드가 자신 있는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가문의 대소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저는 가장 먼저 엘을 조사했습니다.”
“계속 말해 봐라.”
“저는 그가 테라노스 건만 설계하진 않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분명 뭔가가 더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에드먼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러던 차 멜런가와 벤더벨트의 가주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누가 봐도 엘이 유력한 용의자였습니다.”
“…동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더군요. 대체 왜? 가주들의 목숨을 빼앗는 게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게 실버스타에서 매각한 CDO였습니다. 이게 잘못되면 월가에 또 한 번의 폭탄이 떨어지겠구나. 그리고 엘은 빌더버그에 혼란을 가지고 오기 위해 가주들을 죽였구나! 라고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제 예상은 맞아떨어졌습니다.”
“네 예상이 맞았구나. 한데 그게 이번 일의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질리언의 말을 들은 에드먼드가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CDO가 파산하기 전 모건은행과 AIG, 체이스은행에서 체결한 CDS들입니다. 전부는 아니어도 절반쯤의 손해는 메울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얻은 이익으로 가업을 지키겠다는 거냐?”
에드먼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계획은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씨티와 골드만삭스 두 곳을 파산하게 내버려 둘 겁니다. 아니, 정확히는 월가 전체가 파산하게 만들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빌더버그란 이름으로 사이좋게 갈라 먹는 거, 이제 지겹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백 년이나 갈라 먹었으면 각자도생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잿더미가 된 월가를 로스차일드의 이름으로 재건시킬 겁니다. 할아버님도 이 계획에 동의하셨구요.”
***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져만 갔다.
월가에 핵폭탄이 떨어졌고 트럼프의 백악관은 수습을 포기했다.
이렇게나 화끈하게 질러 버리다니.
공화당에 낸 10억 달러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려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나 급작스럽 게 흘러가는 이상.
“직접 움직여야 하겠군.”
미국으로 이동하는 건 어찌 보면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작전은 속도가 생명.
한국에서 일을 보는 것보다 미국으로 건너가는 게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방비는 해야겠지?”
며칠 후.
강화된 경호가 필요하다는 내 요청에 데저트의 부사장 윤현수가 직접 요원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그들 전체를 전용기에 꽉꽉 채워 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호텔로 향했다.
함께 온 요원들의 숫자가 50을 넘겨 아예 호텔 하나를 전부 빌렸다.
뉴욕에 오고서의 첫날.
“엘, 주무십니까?”
첸이 내 방에 찾아왔다. 아마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찾아온 듯 보였다.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역시나, 나와 상의할 서류 뭉치를 잔뜩 들고 온 첸이었다.
“어디부터 시작하실 생각입니까?”
“BOA(뱅크오브아메리카)가 어떨까 합니다만….”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가장 덩치가 크기도 하고 빌더버그 공동 소유기에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놈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
“그렇게 하시죠.”
“네, 그리고….”
첸이 말을 주저한다.
뭔가 부탁할 게 있는 모양.
이 사람은 항상 이렇다. 좋게 말하면 선을 항상 지키지만 나쁘게 본다면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7년이나 함께했으면 친구처럼 지낼 만도 하고 그랬다면 편하게 부탁할 법한데 말이다.
“첸, 이쯤 되면 부탁쯤은 편하게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7년이나 함께 싸워 온 전우 아닙니까?”
“…그럼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이번에 BOA를 인수하게 되면 제게 맡겨 주실 수 없을까 합니다.”
“맡는다는 게 어떤 뜻입니까? 경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첸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네, 직접 경영을 해 보고 싶습니다.”
뜬금없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 가는 부탁이다.
금융 가문에서 자란 첸이기에 거대 은행을 운영해 보고 싶은 욕심쯤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또한, 예전에 맡긴 중신 은행의 경우 제대로 운용하기 전 조각내어 팔아 버렸으니 욕망이 더 커질 수밖에.
“차라리 이건 어떻습니까? 첸도 함께 인수전에 참여하는 건.”
“네?”
“그동안 돈도 꽤 벌지 않으셨습니까? 이번 기회에 함께 투자하자는 겁니다.”
첸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머리는 감지 않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녀서 그렇지.
사실, 첸은 부자다.
아마 재산을 공개한다면 포브스지에 이름을 올릴 만큼 말이다.
몇 번의 수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나와 첸의 계약은 단순하다.
나는 여태까지 인베스트먼트가 낸 수익의 3%를 그에게 지급했다.
총자산 9천억 달러가 약간 넘는 인베스트먼트이기에 내가 첸에게 지급한 돈은 3백억 달러 수준이다.
또한, 그 돈을 받은 첸이 돈을 펑펑 써 재낀 것도 아니다. 그는 인베스트먼트의 투자에 함께 따라왔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의 자산이 최소 5백억 달러는 넘을 거라는 데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첸이 감격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제가 BOA의 지분을 취득하는 건데도요?”
“지분까지 박아 넣었으니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남의 지갑 훔쳐보면 안 되는 건 알지만, 함께 투자하는 만큼 얼마나 있는지는 알아야겠죠?”
“아…. 하하하.”
잠시간 어색한 웃음을 짓던 첸이 대답했다.
“9백억 정도 됩니다.”
대단한데?
“그럼 함께하시죠.”
“네!”
그렇게 첫 번째 타자를 정한 우리는 다음 날 오전 BOA의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그곳에 도착했다.
와글와글.
망하기 일보 직전인 은행.
조용하리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BOA는 입구부터 시끄러웠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이들과 마이크를 든 리포터가 모여 있었기 때문인데.
“BOA의 고객들이 맡겨 둔 돈을 찾지 못할까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 해 주실 말씀 있으실까요?”
기자 하나의 질문에 BOA의 CEO 브라이언 모이니핸이 대답했다.
“저희 BOA는 고객의 돈을 지키는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그 선택이 은행 창구를 막는 겁니까?”
“맞습니다. 뱅크런보다 뱅크스톱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행 업무를 정지시킨다고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을 텐데요?”
“아뇨. 근본적인 해결책이 됩니다. 시간을 벌었거든요.”
“시간이요?”
“네, 바로 저분이 우리 BOA를 인수할 시간이요.”
브라이언의 말에 기자들이 카메라를 돌린 건 물론 리포터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와 첸은 기가 찰 뿐이다.
하, 이 새끼 봐라?
기자들을 동원해서 BOA의 인수를 기정사실로 만들겠다?
거기다 손실까지 떠넘기고?
철저히 계획된 수작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기자를 불러 모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여기에 어울려 줄 이유 따윈 없기에 윤현수에게 눈짓했다.
“막으세요.”
척. 척.
주위를 지키던 수십 명의 요원이 인의 장막을 형성해 기자들을 막아 냈다.
그런 모습을 브라이언이 당황한 눈으로 쳐다봤다.
설마 이 정도의 인원을 데리고 올 줄 몰랐겠지.
“첸.”
“네.”
“약속 못 지킬 거 같은데요?”
“상관없습니다. 월가에 BOA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한 첸이 평온하게 답했다.
“가시죠.”
“네.”
우리는 곧바로 뒤로 돌아 왔던 방향 그대로 돌아갔다.
애처롭게 나를 부르는 브라이언을 내버려 둔 채 말이다.
***
오전에 계획한 BOA 방문을 취소하고 나와 첸은 이른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일정이 어긋나 할 일도 없었고 아침을 건너뛰어 허기도 졌기 때문.
호텔을 통째로 빌린 탓에 레스토랑에 있는 사람이라곤 우리 둘과 요원들뿐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오전에 있었던 황당한 일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 주었다.
그렇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니 요원들이 한 무리를 막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윤현수 부사장이 내게 다가와 상황을 설명했다.
“오전에 방문했던 BOA의 브라이언이 회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너저분한 새끼.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나를 찾아온 거다.
혼자 오기 무서워서 자신의 경호원들을 데리고 말이다.
“쫓아내세요.”
“네.”
윤현수가 요원들에게 내 지시를 전달했고 곧 소란이 잠잠해졌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띠리리리.
이번에는 휴대전화가 울렸다.
역시나 전화를 건 이는 브라이언이었다.
그냥 끊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얘기는 한번 들어 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첸의 의견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엘, 오해가 있었습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은….
“저급한 변명 따위는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본론만 말해.”
-인수 협상을 이어 가고 싶습니다.
“조건은?”
-그 부분은…. 만나서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1시간 뒤에 서류 챙겨서 올라와.”
-네! 감사합니다.
뚝.
“제가 나서서 처리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첸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이번만큼은 제가 하겠습니다. 요놈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싶거든요.”
“하하하.”
한 시간 후.
브라이언이 올라왔고 우리는 BOA의 인수 협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