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약속도 잡지 않고 대뜸 찾아온 손님, 딱히 만날 이유가 없지만.
상대가 손정의라면 쫓아낼 수야 없다.
ARM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어도 일본 재계의 큰손 아닌가.
나쁜 감정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도 나누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에 비서에게 안으로 들이라고 전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SC의 이신훕니다.”
“약속도 잡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사안이 급해서 그만.”
“괜찮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생각 외로 그는 깍듯한 예의를 보였다.
그런 그에게 자리를 권한 후 비서를 통해 차를 준비시켰다.
자리에 앉은 손정의의 표정을 살폈다.
ARM 인수를 실패한 것도 모자라 슈퍼셀의 매각이 물 건너갔음에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가 대뜸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이번 기회에 많이 배웠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더군요.”
“…….”
“또, 놀랐습니다. 빠른 판단, 과감한 행동력, 이 회장님의 성공 비결을 엿본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손정의가 앞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며칠간, 회장님의 과거를 조사해 봤습니다. 그룹이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서요.”
“소득은 있었습니까?”
“확신은 없지만, 심증이 있는? 그런 행적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례로 이 회장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것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회장님께선 세계 공통의 규칙인 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계십니다.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지?
“예를 들면요?”
내 질문에 손정의가 내가 잊고 있던 과거를 꺼내 들었다.
“몇 년 전, SC 오션이 호주의 석탄 회사들과 공급 계약을 맺은 걸 발견했습니다. 대금을 선지급으로 주는 대신 위약금을 아주 세게 걸었더군요. 대금의 3~4배 정도로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 뉴캐슬항에 불이 났습니다. 당연하게도 석탄 공급은 중단되었고 그들은 SC 오션에게 막대한 위약금을 지급했습니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미친 듯한 통찰력.
마치 이강진 회장과 마주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뉴캐슬항에 불을 지른 게 저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그냥 제 가정일 뿐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호가 그런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죠.”
“흥미로운 ‘가정’이었습니다.”
“이 회장님께 흥미를 불러일으키다니, 이거 노력한 보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단순히 잡담만 나누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내 질문에 그가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범죄자한테 말입니까?”
“하하, 그냥 가정이라니까요.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일단, 말씀 주십시오. 들어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혹시 일본의 상황을 알고 계시는지요.”
일본의 상황이라….
지난 대지진 이후 일본의 경제는 쭉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엔저 현상으로 물가가 치솟아 경기는 무너지고 그로 인해 실업률은 치솟았으며 기업들은 힘들어하는.
전형적인 장기 불황.
물론 원 역사도 이와 똑같이 흘러갔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다른 요소가 두 개나 존재했다.
일본의 금융계를 지탱하는 한 축인 미츠미시 은행의 강탈, 그리고 인베스트먼트의 극단적인 엔저 현상이었다.
특히, 이 극단적인 엔저 현상은 아베 내각이 계획한 모든 경제 정책을 부정했다.
엔화를 찍어 내 경기를 부양한다.
새로운 내각은 아베노 믹스라는 꽤 간단한 논리의 경제 정책을 펼치려 했지만, 극단적인 엔저 현상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 정부에서도 어떻게든 엔화의 가치 하락을 막으려고 했지만, 딱히 방법을 찾지 못했고.
시장 개입을 전혀 하지 못한 채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대충 알고 있습니다. 많이 힘들다면서요?”
“그래서 말입니다. 혹시 저와 동업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동업 말입니까?”
손정의가 가져온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하더니 내게 설명했다.
그의 제안은 꽤 괜찮아 보였다.
바닥까지 떨어진 일본 기업들의 주식을 매입해 추후 차익을 실현하는.
안정적이며 수익률 또한 괜찮아 보이는 투자.
거기다 몇 가지 불법적인 일이 더해지면 마법 같은 예상 수익률이 기대되었다.
문제는.
‘너무 오래 걸려.’
시간이다.
지금이야 협력자 취급을 받고 있지만, 내 계획대로라면 트럼프가 당선되고 나서 일 년 후엔 제2의 모기지 론 사태가 터진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빌더버그 놈들 역시 알아챌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던진 건 폭탄이었다는 것을.
세계 최고의 가문이라는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나와 내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자금을 몇 년씩이나 묶어 둘 순 없기에 거절의 뜻을 밝혔다.
“아쉽지만, 저희는 장기 투자를 진행할 여건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아쉽습니다. 이 회장님과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해 보시죠. 그때는 제가 찾아뵈러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거절을 하고 손정의를 돌려보내려던 찰나.
‘써먹을 수 있겠는데?’
생각만 해 놓고 포기한 계획이 떠올랐다.
빌더버그 놈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은 물론 단타로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계획 말이다.
“혹시, 단기 투자를 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단기 투자요?”
***
손정의가 돌아간 후 나는 리비아로 전용기를 보내 첸을 데려왔다.
“자금 상황을 좀 알아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자료를 뽑아 드리겠습니다.”
첸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해 서류 한 장을 프린트했다.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요약한 서류였다.
인베스트먼트의 총자금은 약 9천억 달러.
그중 3천억은 리비아에, 나머지는 실버스타와 미국과 유럽 쪽 우량주에 투자되어 있었다.
“백억 달러 정도 사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틀 정도면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세탁이 필요합니다.”
“세탁이요?”
세탁이란 말에 첸이 눈을 빛냈다.
“네, 확실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게요.”
“흐음, 손실 처리가 가장 확실할 것 같습니다. 다만 얼마간 원금 손실이 날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대신, 시간이 중요합니다. 한 달, 아니 보름 이내로 처리되었으면 합니다.”
“빠듯하겠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첸이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된다는 뜻이다.
만약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으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테니 말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맡겨 주십쇼.”
첸에게 자금 세탁을 지시하고 곧장 미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손정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내일이면 투자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알아보고 사인까지 해 달라던데요?
“알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금액을 ‘사기’당하는 게 포인트라는 것을요.
“정확하십니다.”
간단한 대화를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몸을 돌려 리우를 바라보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호텔에서 하루 자고 난 뒤 나와 요원들은 뉴욕시를 떠나 뉴올리언스 구석에 있는 한 야산에 도착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오래된 크라이슬러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임무를 완수한 리우가 몰고 오는 차였다.
털썩.
차에서 내린 리우가 트렁크에서 남자 하나를 꺼내 내 앞으로 던졌다.
던져진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기겁하며 외쳤다.
“뭐, 뭐야! 당신들! 내가 누군 줄 알아?”
“알지. 월스트리트 저널의 존 케레이루잖아?”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존이 기겁하는 게 보였다.
“그 여자가 시켰나? 자신이 벌이고 있는 사기극을 감추기 위해서.”
“누구? 엘리자베스 홈즈를 말하는 건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착각한 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 그 여자랑은 아무 관계 없으니.”
“거짓말! 그렇다면 왜 나를 납치한 거지?”
“제안하기 위해서지.”
“제안?”
“네가 테라노스를 취재하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테라노스가 주장하는 모든 것이 사기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걸 어떻게….”
“어디 보자, 지금쯤이면 취재가 거의 끝났겠군.”
존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겠지.
“나를 감시했던 건가?”
“뭐…. 그렇다고 해 두지.”
“원하는 게 사건 은폐냐? 미안하지만 나를 죽여도 소용없어. 오히려 사건만 커질걸? 내가 테라노스를 취재하고 있던 걸 내 동료들이 알고 있어.”
“죽여도 멈추지 않겠다? 기자 정신이 투철한데?”
존이 이를 악물고 대답한다.
“그래, 나를 죽여도 사건은 세상에 밝혀질 거다. 알아들어? 홈즈 그년의 사기가 드러날 거라고.”
짝. 짝. 짝.
훌륭한 기자 정신.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손뼉을 마주쳤다.
존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안다.
전 회차에서 빌더버그의 비리 정보를 내게 넘기던 정보원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래서 죽이는 대신 이렇게 귀찮은 방식을 택했다.
반면 그런 줄 모르는 존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화낼 필요 없어. 진심으로 감탄해서 박수를 친 거거든. 그나저나.”
“…….”
“네가 진실을 공표하면 투자자들, 그러니까 뭣도 모르고 테라노스의 주식을 산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그럼 어쩌라는 거냐. 그냥 두면 피해자가 눈덩이같이 불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적어도 일반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방법이 있다면?”
존이 믿기지 않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씨익.
“들어 볼 마음이 생겼군.”
“물론이다. 내가 취재를 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 중 하나가 피해자였으니까.”
나는 이 투철한 기자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보도를 3개월만 미뤄 달라는 거지?”
“맞아.”
“그렇게만 하면 피해자들을 최대한 구제하겠다는 거라는 거고.”
“그래. 전부는 아닐지는 몰라도 일반인들의 피해는 최대한 막아 주지.”
“알았다. 그렇게 하지. 대신 약속한 건 꼭 지켜라.”
“걱정하지 마. 나는 홈즈 같은 사기꾼이 아니거든.”
내 말에 피식 웃은 존이 야산을 내려갔다.
***
내가 존에게 던진 제안은 3개월간 보도를 늦춰 주는 대신 일반 투자자들의 피해를 줄여 주겠다는 거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쉽다. 테라노스의 주식을 빌더버그 놈들에게 떠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그전에 테라노스를 아주 탐나는 먹잇감으로 보이게 만들 필요는 있다.
빌더버그 놈들이 침을 줄줄 흘리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