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손 마사요시. 한국식 이름 손정의.
재일 한국인 출신으로 일본 재계의 살아 있는 신화라 불리는 그는 영국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고심하고 있었다.
‘SC 인베스트먼트라니, 그들이 갑자기 왜?’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
세상 사람들은 SC란 기업 집단이 그저 2차 산업, 그중에서 조선업과 중공업에 전문성을 띤 일반적인 기업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그 자신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SC 인베스트먼트의 자금력은 최소 삼천억 달러 이상으로 예상되는바.
그 막대한 자금력에 비한다면 SC 오션은 그저 어린아이 규모일 뿐이다.
그런 SC 인베스트먼트에서 ARM 인수에 관심을 보인다?
이건 SC의 정점인 이신후가 나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백억 달러의 투자가 하루아침에 결정될 리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손정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개고생을 해 놓고 이대로 뺏길 순 없다.’
ARM에 관심을 가진 지 무려 3년.
그동안 수도 없이 영국을 들락거렸다.
ARM의 이사회를 구슬린 것은 물론, 의회를 비롯한 정치인들에게 여러 번 기름칠해 놨다.
그런 고생을 해 가며 겨우 성사 직전까지 일을 진행하게 했는데.
엄한 놈이 나타나 그동안의 결실을 훔쳐 가는 꼴이 아닌가.
꾸욱.
투지가 치밀어 오른 손정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럴 수야 없지.’
그가 곧바로 비서를 호출했다.
“지금 당장 스튜어스 회장에게 만나고 싶다고 전해.”
다음 날.
손정의는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비록 연락이 안 되어 스튜어스와 약속을 잡는 데 실패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몇 시간 후, 영국에 도착한 그가 곧바로 스튜어스의 자택으로 향했고 희망적인 얼굴을 했다.
스튜어스의 차가 자택 주차장에 주차된 것을 봤기 때문.
손정의가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저택의 벨을 눌렀지만.
-회장님께서는 급한 일이 생기셔서 부재중이십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오시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스튜어스를 만날 수 없었고 동시에 그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허탕을 치고 숙소로 돌아온 손정의가 화가 났는지 홈 바에 있던 술병을 집어 들고 연신 술을 마셨다.
“젠장!”
그가 스튜어스 회장에게 약속한 커미션은 20억 달러.
이사회를 설득해 주는 대가였다.
하지만, 스튜어스가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게 확실해진 지금, 더는 그를 믿을 수는 없다.
“이대로 포기할쏘냐.”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자신이 직접 ARM의 대주주들을 설득하는 것.
그가 전의에 가득 찬 눈으로 호텔 밖을 바라봤다.
다음 날부터 손정의는 영국 곳곳을 쏘다니며 ARM의 주주들을 만나고 다녔다.
자신의 체면도 잊은 채 굽히고 또 굽히며 주주들을 설득했고.
이틀이 지나자 그는 모두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맨입으로 설득하지는 못했다.
기존의 제안인 250억 달러에 30억 달러를 붙여 총 280억 달러에 지분 전력을 인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손정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는 ARM의 가치를 300억 달러 이상으로 봤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오히려 20억 달러나 아꼈다고 느껴졌다.
이제 남은 건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인수 대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텐센트의 마화텅 회장에게 내일 좀 보자고 전해.”
손정의는 자신이 운용하는 비전 펀드가 소유한 슈퍼셀의 매각을 급하게 추진했다.
텐센트의 마화텅 역시 반기는 분위기였다.
슈퍼셀을 매각하고 가지고 있는 현금을 더해 SC가 손 쓸 틈도 없이 ARM을 인수한다.
손정의가 그린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뭐?! 서버에 문제가 생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그의 청사진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불타 없어져 버렸다.
***
“어때요? 이 정도면 만족하세요?”
만족하지 않을 리가 있나.
슈퍼셀의 모든 서버를 초기화시켰는데.
심지어 서버의 복구를 기다렸다가 복구 데이터까지 날려 버리다니 정말 악독하기 그지없는 한 수다.
이걸 해낸 빅터가 의기양양한 건 당연했다.
“대단한데?”
“오래간만에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요새 회사에서 지루한 일만 해서 이런 일이 그리웠거든요.”
여유롭게 말하는 빅터지만, 얼굴은 영 아니었다.
2박 3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슈퍼셀의 서버를 해킹했기 때문.
나 때문에 고생한 빅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고맙다. 내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냐.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 사 줄게.”
“괜찮아요. 필요한 거 있으면 제 돈으로 살게요. 아시죠? 저 요새 부잔 거.”
사실이다.
스마트폰 게임을 만드는 빅터 게임즈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스마트폰 유저 숫자와 정비례해 굉장히 순항 중이다.
애플과 구글에서 앞다투어 협업을 제안했을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빅터의 지갑은 점점 탄탄해져만 갔다. 상장만 한다면 단숨에 수천억 원을 거머쥘 정도로.
“인마, 형이 말한 거는 자동차나 집 같은 게 아니야.”
“네? 그럼 뭔데요?”
“네가 운영하는 회사, 언제까지고 게임 개발만 할 수는 없잖아? 퍼블리싱도 해 보고 플랫폼도 운영해 봐야지.”
“아아!”
“아직 잘 모르는 거 같으니까 제니에게 물어봐. 뭐가 되었든 간에 하나 사 준다.”
“네!”
빅터가 힘차게 대답했다.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간다. 수고해라.”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왔다.
곧바로 스튜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철컥.
-엘?
“그래.”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다. 마사요시가 주주들을 설득하고 있어. 당신보다 높은 액수를 부른 탓에 꽤 많은 숫자가 넘어갔다고.
전화기 너머로 스튜어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그는 ARM 인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야. 대금을 마련하지 못할 거거든.”
-무슨 소리야?
“이유는 곧 알게 될 거야. 너는 그때에 맞춰서 인수 조약서 들고 한국으로 와. 커미션 이야기도 마무리해야지?”
-흐흐, 감사합니다. 고객님.
뚝.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인수 조약서에 서명하는 것뿐.
***
며칠 뒤.
짝. 짝. 짝.
찰칵. 찰칵.
사방에서 박수 소리와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축하합니다. 부디 ARM을 잘 경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염려 마십시오. 세계 최고의 첨단 기술 기업으로 키워 내겠습니다.”
스튜어스와 신종민이 서로 악수를 하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손정의는 결국 기한 안에 인수 대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슈퍼셀의 매각이 아예 물 건너갔기 때문.
예상외의 결과였다.
‘단순히 매각이 미뤄질 줄만 알았는데.’
살짝 미안하긴 했지만.
뭐, 어쩔 수 있나. 먼저 먹은 놈이 임자인 것을.
또한, 지금이야 그가 분해하겠지만 나중에는 내게 고마워할 수도 있다.
2021년에는 손정의가 ARM의 매각을 추진할 정도로 비전 펀드의 유동성에 큰 문제가 생기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나는 소공동 루덴 호텔로 향했다.
홈 바에 있는 위스키를 꺼내 홀짝이며 기다렸다.
그렇게 한 병을 거의 비울 때쯤 스튜어스가 찾아왔다.
그가 술을 마시고 있는 나를 보더니 술 생각이 났는지 홈 바에서 술을 꺼내어 가져왔다.
지가 돈 낼 것도 아니면서 가장 비싼 위스키를 가져오는 꼴을 보니 입 안의 옥수수를 털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한잔하지.”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그냥 처마시게 뒀다.
쪼르륵.
얼음 컵에 위스키를 따라 몇 잔을 들이켜자 취기가 올라오는지 스튜어스가 넥타이를 풀어 젖히며 물었다.
“커미션 지급 방법은 어떻게 되나?”
“계좌 번호 써 놓고 가면 10분 내로 입금해 주지.”
피식.
그가 입가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농담이면 재미없다. 한국은 어떤지 몰라도 영국은 어림없어. 잘못 걸리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농담 맞아.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나는 품에서 CD 한 장과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리비아 트리폴리에 있는 은행 계좌와 비밀번호다. 40억 달러 정확히 넣어 놨으니 가서 찾기만 하면 된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무조건 현찰로만 지급하니까 가방 넉넉하게 가져가고.”
“현찰로? 수표도 아니고?”
“네가 원한 게 이런 거 아냐? 추적 불가능한 돈 말이야. 싫으면 몇 바퀴 돌려서 세탁해서 줄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니야, 그냥 내가 찾으러 가지. 안 그래도 트리폴리에는 가 보고 싶었거든.”
그가 CD를 가져온 가방에 넣었다.
“좋은 곳이야. 아마 저번에 만났던 터키보다 좋다고 느껴질 거다.”
“그래? 기대되는군.”
좋은 곳이지.
사막에서 길을 잃고 미라가 되기 딱 좋은 곳.
***
인수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날 때쯤 나는 ARM의 나머지 주식을 매입하여 비상장 회사로 변경하는 절차를 완료했다.
그리고.
-말이 안 나오는군.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해야지, 전자가 다시 한번 도약할 기회 아닌가. 놓치면 바보지.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상현 전자의 반도체 부문을 분사. ARM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물론, 상현 전자의 주주들 반발이 거셌지만.
대주주인 상현, SC, 이강진 회장의 지분이 40%가 훌쩍 넘어가기에 분사와 합병은 재빠르게 성사되었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이름.
SH-ARM.
영국과 한국, 양쪽에 본사를 둔 종합 반도체 기업의 탄생이었다.
시장에서의 기대도 엄청났다.
수율과 공정, 특히 생산성에 강점을 둔 상현과 스마트폰 CPU의 강자 중 하나인 ARM의 결합이 큰 기대를 모았다.
사방에서 돈을 싸 들고 주식을 매수하기 위해 열을 올렸지만 그들의 시도는 헛수고로 돌아갔다.
나는 합병된 회사를 상장할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시달린 신종민이 우는소리를 했지만 어쩔 수 없다.
하이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기업일수록 보안은 확실해야 하는 법이고.
대주주네 뭐니 하는 놈들이 간섭하려는 꼴을 보는 것보다야 낫다.
이번 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상현 전자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경쟁자인 애플과의 관계를 끊어 그들의 생산 체계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퀄컴 같은 다른 CPU 개발 회사를 찾거나 본인들이 직접 개발할 수야 있겠지만.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출하량이 모자란 애플은 스마트폰 점유율에서 상현 전자에게 큰 차이를 보이며 패배했다.
모르긴 몰라도 애플에 투자한 빌더버그 놈들의 표정이 볼 만하게 변했을 것이다.
당연히.
“으하하하. 나는 믿고 있었다니까. 최 실장, 어떤가? 정말 대단하지 않나?”
이 회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건 최 실장도 마찬가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잡스의 얼굴을 못 봐서 아쉽습니다. 지금쯤 거기는 난리 났을 텐데요.”
“이를 말인가! 으하하.”
그렇게 두 사람의 즐거운 대화를 구경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더 있고 싶지만, 회사에 할 일을 남겨 놓고 와서요.”
“잠깐만 기다리게나.”
떠나려는 나를 이 회장이 붙잡았다.
그러고는 서재 한쪽에서 커다란 갈색 서류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우리 일가가 가지고 있는 지분에 대한 의결권이네. 내가 죽을 때까지 유효할걸세.”
“회장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이깟 의결권 따위가 뭐라고.”
“아직 정정하십니다.”
“이만, 쉬고 싶네.”
이 회장이 뜻을 내비치자 최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전부터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대신 제가 일선에 남아 있을 테니 지시할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결국, 나는 이 회장의 뜻을 받아들여 상현 그룹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출근하는 형태가 아닌, 최 실장을 통해 임원들에게 내 뜻을 전파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바쁜 한때를 보내던 차.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라고요? 손정의?”